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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성지순례/남유럽(스페인)

by baesungsoo 2013. 1. 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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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http://blog.naver.com/olaspain/100070119919)

 

스페인 마드리드주(州) 산로렌소 데 엘 에스코리알에 있는 수도원을 겸한 궁전은 스페인의 권력과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정식 이름은 산로렌소 데 엘 에스코리알 왕실수도원이다.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로마시대 순교자 성 라우렌티우스(스페인명 산 로렌소)를 모신 수도원이다. 1563년에 펠리페 2세는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에게 스페인 제국의 권력과 위대함을 상징하는 불후의 기념 건축물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펠리페 2세는 ‘기품이 있고 남성적이면서 엄숙하며 까다롭지 않은 건물’을 주문하면서 장소는 마드리드 북서쪽으로 50km, 과다라마 산맥 남사면이 카스티야 중앙의 메세타 평원에 닿는 해발 1000m 고지를 택하였다. 펠리페 2세는 건설 과정을 몸소 지시하고 감독하였다. 1567년에 톨레도가 죽자 후안 데 에레라가 1584년에 완성될 때까지 공사를 맡았다. 톨레도가 죽은 뒤 그의 설계는 변경되었지만 기본 구조는 처음 그대로였다. 1984년 유네스코는 이 수도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펠리페 2세 동상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440476)


펠리페 2세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과 왕궁을 짓기로 결심한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부왕인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생전에 부부가 함께 묻힐 무덤을 만들 장소를 끊임없이 물색하였다. 둘째는 생캉탱에서 프랑스군에게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고, 셋째는 순교자 성 라우렌티우스를 기념하는 일이었다. 생캉탱 전투는 성 라루렌티우스 축일에 있었다. 스페인 바야돌리드 출생인 펠리페 2세는 합스부르크가(家) 카를 5세의 황태자로서 1556년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았고, 1580년에 펠리페 1세로 포르투갈 왕위에도 올랐다. 그는 1554년에 영국 여왕 메리 1세와 정략결혼을 하여 구교반동(舊敎反動)을 지도하였고, 여왕이 죽은 후 1559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하고 프랑스 왕녀와 결혼하여 프랑스 종교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그는 스페인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그는 중세(重稅)와 종교재판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도발하였고, 국내 이슬람교도의 반란을 완전히 탄압하는 한편,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 해군을 격파하는 등 다방면에서의 가톨릭적 군사행동으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얻은 부(富)를 낭비하였다. 영국의 해적행위와 대결하여 1588년에 네덜란드 파견군과 무적함대에 의한 영국 상륙작전을 폈으나 대패하여 해상지배권을 영국에 뺏겼으며, 재정적으로도 곤란하여 평화를 찾게 되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서 수도원을 겸한 엘 에스코리알 궁전을 세웠으며, 회화 등 미술품을 보호하여 스페인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신앙심 깊은 펠리페 2세는 건물이 완성되자 즉시 궁정과 제국의 행정 기능을 그 곳으로 옮겼다.   ( 글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사진, 글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엘 에스코리알의 수도원과 궁전은 종교개혁에 대항한 시대의 기원(祈願)을 명확히 나타내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까지 스페인에만 있던 고유의 건축 양식과 결별을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전통과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조류, 그리스 로마 세계의 부흥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이 건물의 거대한 규모는 왕궁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깝다. 펠리페 2세는 치세 말년에 이 곳에서 대제국인 스페인을 움직였다. 장식을 배제하고 지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거대한 모습은 펠리페 2세, 나아가 스페인 제국이 갖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전사(戰士)란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비길 만한 건축물이 없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사진, 글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펠리페 2세가 추구한 이상은 수도원과 궁정을 겸하는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스페인의 건축은 다양한 양식을 마구 도입한 특징을 보여왔지만,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은 전체적으로 수수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밋밋한 벽이 사면을 둘러싼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기존의 양식과 결별을 고함과 동시에 르네상스 양식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수수한 가운데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처럼 건축 역사상 ‘완벽하다’고 불릴 만한 작품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건물은 유럽에서 최강국이었던 영광을 훌륭한 양감으로 나타내었지만, 반종교개혁운동의 정신적 거점으로서의 권위를 스토익적인 경질(硬質)한 선으로, 그리고 명상과 고독을 즐긴 왕의 성격을 우울한 정감으로 반영하였기에 건물의 그늘진 어두움에 대하여 비판하는 비평가들도 많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이하 사진, 글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수도원은 남북 207m, 동서 162m인 직사각형의 부지 위에 세워졌다. 수도원, 스페인 역대왕의 영묘(靈廟), 왕가의 휴식을 위한 별궁 등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원형 돔으로 솟은 대성당이 있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은 정치의 중추기관인 동시에 궁전, 신학교, 르네상스식 도서관, 귀족 자제의 학교, 병원 시설을 갖춘 어지간한 도시와 같은 규모였다. 이 수도원은 문인, 성직자, 공장(工匠), 음악가 등의 활동을 옹호하는 등 세기를 대표하는 문화센터이기도 하였다. 남쪽과 북쪽, 서쪽에는 산뜻한 직선을 긋는 파사드가 있으며 건물 중심축 뒤쪽에는 도서관, 제왕의 안뜰, 성가대석, 작은 왕궁, 국왕의 무덤 등이 있는데, 이런 시설들이 건물에서 가장 기품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커다란 탑을 세웠고 건물 안에는 방 300개와 안뜰 16개, 회랑 15개를 두었는데, 이를 합치면 전체 길이가 16km나 된다. 성당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본떠 지었다. 기본 구조는 가운데 둥근 천장이 있는 정사각형이며, 거기에 덧붙여 동서 중심축을 따라 중앙 제단과 불쑥 튀어나온 코로가 있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회랑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대 회랑

 

둥근 천장의 높이는 마루에서 꼭대기까지 90m에 이르고 기둥은 도리아 양식이며, 세로로 홈이 패어 있다. 수도원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대회랑은 '복음서 기자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상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도리아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2층 모두 장식 아케이드가 있다. ‘복음서 기자의 안뜰’은 미켈란젤로에 대해 공부한 톨레도가 이 수도원에서 제작한 최고 걸작으로, 그의 고전주의에 대한 열정을 잘 말해 준다. ‘복음서 기자의 안뜰’은 우아한 양식과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스페인 르네상스 건축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건물 모양은 성 라우렌티우스가 타 죽은 석쇠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동쪽 중앙에 있는 작은 왕궁이 석쇠 손잡이, 건물 네 귀퉁이에 있는 55m의 탑이 석쇠 다리에 해당한다고 본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그리스 로마의 규범을 충실히 따랐다. 자재는 화강석, 여러 가지 색의 대리석, 청동, 납, 금 등을 사용하였다.

 

수도원 지하 묘실     (사진, 글 출처- http://blog.naver.com/sj97in/90019061527)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지하 무덤에는 많은 스페인 왕들의 유해가 있는데, 스페인 건축 가운데 인상깊은 이 건물만큼 합스부르크 시대를 확실하게 상징하는 건물도 없다. 스페인 국왕부부의 묘소는 지하 원형묘실에 집단 설치되어 있다. 1584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안치된 금속관이 맨밑에 자리잡은 이래 현재의 부르봉 왕가에 이르기까지 12명의 국왕과 그 부인 등 24명의 유해가 원형묘실의 4층으로된 아파트처럼 세워진 묘실인 니초(Nicho)형 칸마다에 숨진 연대순으로 모셔져 있다.  

 

수도원 지하 묘실          (이하 출처-http://blog.naver.com/olaspain/100070119919)

 

수도원 지하 묘실 

 

수도원 지하 묘실 

 

 

 

수도원 지하 묘실 

 

수도원 지하 묘실 

 

수도원 지하 묘실 

 

보쉬, 천국과 지옥, 1485-1490, 산 로렌조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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