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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파키스탄)

타종교신전/불교사원

by baesungsoo 2005. 6. 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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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 시르캅 스투파

 


탁실라 시르캅 스투파

 

시르캅 Sirkap 유적지    (이하 출처- http://cafe.daum.net/migigaja/)


시르캅(Sirkap)은 기원전 2세기경에 건설되어 기원후까지 존속한 이 도시 유적은 탁실라 제2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 연구에 의하면 시르캅 지역은 여러 도시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처음 세웠던 사람들은 그리스인들... 기원전 2세기경에 건설하였고,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것이다. 시르캅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는 쌍두취불탑(雙頭鷲佛塔)이다. 이 불탑의 기단은 중앙계단을 사이에 두고 좌우 정면에 코린트식 둥근기둥이나 네모기둥을 세워 벽 공간을 각각 세 등분 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높이 9m의 성벽이 5.5Km에 걸쳐 축조되어 있는데, BC 2세기~AD 2세기에 번영했던 그리스 왕조와 쿠샨 왕조의 도시 유적이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너비 약 6m의 넓은 거리가 500m 가량이나 이어지고, 양쪽으로는 당시에 일반주택과 상점들이 그 위에 축조되었을 석축토대가 늘어서 있다. 거리에는 돔 모양의 스투파의 유적도 있고 왕궁 유적도 남아 있다. '무자비한 머리'라는 뜻이며 이 지역에 살았다는 신화속의 악귀의 이름인 시르캅유적. 악귀는 사람의 살을 도려 먹고 살았다는데 영웅 Rasalu에 의해 제거 되엇다고 한다. 시르캅은 데미트리우스왕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그는 180년 이곳을 정복했고 나중에 멘데레스왕이 재건설했다. 돔(Dome)모양의 스투파. 이 당시에는 이 지역에는 여러 종교들이 혼재했는데 유난히 불교적 유적이 많은 것은 불교가 중심종교였음을 알 수 잇다. 이러한 스투파 역시 많이 보인다.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시르캅 Sirkap 유적지

 


탁실라 압시달 사원

 

압시달(Apsidal)사원이라 불리는 시르캅에서 가장 큰 성역지(sanctuary). 규모는 70 x 40 m.승려들이 사용했을 몇개의 방이 있었으며 이러한 모습으로 건물의 형태를 미루어 짐작한다. 멀리서 본 압시달사원. 큰 지진 이후 사원들은 넓은 경내를 만들었다. 둥근 바깥쪽에는 작은 탑들이 놓여 있을거라 추측하지만 전혀 흔적은 없다. 이 곳의 조각들 중 그리스의영향을 받은 형체도 보인다.

 


탁실라 압시달 자이나교 사원

 


쌍두취탑, 시크랍 힌두교 유적지, 태양의 사원

 

 

흔히 쌍독수리탑 이라 불리는 탑. (Double-headed eagle stupa). 이 탑은 불교와 그리스 예술이 혼합된 양식을 보인다. 조형,처마, 기둥,박공벽의 벽감등은 헬레니즘 양식으로 추정된다.

 


쌍두취탑

 


쌍두취탑(쌍독수리탑)

 

탁실라 시르캅의 한 스투파에 머리가 두 개인 독수리가 앉아 있다. 그래서 이 스투파는 흔히 '쌍두취탑(Double- Headed Eagle Stupa shrine)'이라고 불린다. 이 모티프는 일찍이 서아시아의 바빌로니아나 히타이트에서 볼 수 있고, 그리스의 '기하학 양식'시대에도 쓰이던 것이다. 또한 시르캅 스투파의 방형 기단은 지중해 세계, 특히 로마에서 발달했던 제단의 형태를 연상시키며, 그러한 서방의 영향 아래 샤카, 파르티아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형 기단은 이후 간다라 지역의 대부분 스투파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사진은 '쌍두취탑'의 기단부인데 방형이다. 기둥은 흔히 코린트식 이라 부르는 그리스형태를 보인다. 왼쪽의 아치는 그리스사원의 형식이고 오른쪽에는 힌두적 디자인이다. 이 두 아치 위에 두마리의 독수리가 앉아 있다. 시르캅의 유적들은 그리스 예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탁실라 잔디알 조로아스터교사원

 

탁실라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잔디알사원도 있다. 네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 뒤에 신전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성소가 나온다. 지성소와 연단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예전에는 큰 탑이 있었을 것이고, 그 탑에 불을 피워 놓고 숭배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서기 2세기에 이곳을 지배한 이란계 파르티아인들이 만든 것으로, 조로아스터교는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불렸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조아스터의 정확한 활동연대를 기원전 6세기로 추정한다. 반면에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200년에 활동했고 그의 신앙이 확립된 시기가 기원전 6세기라는 설도 있다. 이란 지방에서 사제계급으로 태어난 그는 서른 살쯤에 아후라마즈다라는 선신의 게시를 받고 마흔 즈음에 집을 나가 종교를 창시했다. 그 후 어떤 군주의 보호를 받으며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했으나, 일흔 살 이후에 부족 대립 속에서 암살당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사원은 쌍독수리사원 부근에 있으며 시크랍시기(BC ~ AD 2)에 조성된 부조물. 유적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탁실라 잔디알 조로아스터교 사원

 

 

시크랍의 북문에서 1마일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사원은 중앙아시아에서도 가장

독특한 사원이다.

 


잔디알 사원의 내부

 


잔디알 사원의 이오니아식 기둥

 


 다르마 라지카 Dharmarajika

 

박물관 동쪽 약 3Km 정도 되는 곳에 있는 탁실라 최대의 스투파. 고갯길을 올라가면 갑자기 잡초에 뒤덮인 스투파가 나타난다. 기단만 남아 있지만, 아소카 왕이 이 속에 석가모니의 유골을 모셨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널리 알려진 〈잠자는 악공〉을 비롯하여, 후기 간다라 미술의 걸작이라고 하는 소년의 머리 테라코타, 불타와 공양하는 여인상 등도 출토되었다 

 


다르마 라지카 사원

 

다르마 라지카 사원

탁실라에서 가장 큰 사원인 다르마라지카에서도 기원전 3세기 이래 불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아쇼카가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다르마라지카의 대탑 둘레에는 원형 기둥들이 세워졌으나, 곧 기둥 대신 작은 탑들이 대탑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샤카,파르티아 시대까지 세워진 탁실라의 많은 건물은 기원후 30년경에 일어난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선된 석축법에 다라 불교사원의 건축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활발하게 이어졌다. 신피타고라스파 사상가인 튀아나의 아폴로니우스(4~97)가 탁실라에 온 것은 지진이 일어난 뒤인 44년경이었다. 그는 카불을 거쳐 탁실라에 들렀다가 중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필로스트라투스가 쓴 아폴로니우스의 전기는 아폴로니우스가 탁실라에서 본 도시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폴로니우스가 전하는 대로라면 시르캅은 이미 상당히 재건되어 옛 영화를 회복하고 있었다. 인도 서북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고 생각되는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스와트의 붓카라 스투파도 모두 기단이 원형이었다. 쌍두취탑은 기단이 방형

 

다르마 라지카 사원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모흐라 모리두, 조울리안, 칼라완에서는 이렇게 사용된 소조상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아직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소조 조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스투파의 외벽을 장식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노천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예외없이 스투코가 쓰였다. 다른 하나는 감실 내부를 장식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스투코와 점토, 테라코타 중 한 가지가 쓰이거나 점토와 테라코타가 병용되었다.

간다라 조각의 재료로는 석재 외에 점토와 스투코, 테라코타가 쓰였다. 스투코는 석회에 모래 등을 개어서 굳힌 것이고, 테라코타는 점토를 구운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점토를 빚고 다듬듯이 만들기 때문에 소조상(塑造像)이라고 통칭된다. 점토는 재료를 구하기 쉽고 만들기도 수월하지만, 밖으로 노출되면 쉽게 훼손되고 부서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은 매우 적다. 현재 전하는 유물은 거의전부 우연히 화재로 인해 테라코타로 변한 것이다. 테라코타는 구워서 제작해야 하는 과정 때문에 대부분 소품에 한정되고 그 수도 적다. 때로는 상의 머리만 테라코타로 만들고 나머지 부분은 점토로 만들기도 했다. 스투코는 석회를 구해야 하고 그것을 모래 및 물과 배합해야 하기 때문에 점토보다 사용하기가 까다롭고, 모델링하기도 점토만큼 수월하지는 않다. 그러나 일단 만들어 놓으면, 점토에 비해 훨씬 단단하고 오래 간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소조상 가운데는스투코로 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스투코상은 전체를 스투코로 만들기도 하지만, 안쪽 부분에 돌과 점토를 섞어 심을 만들고 거죽에만 스투코를 씌워 조각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스투코 위에 다시 얇게 회를 바르고 세부를 손질한 뒤 그 위에 채색을 입혔다

 


모흐라 모라두 사원

 


모흐라 모라두Mohra Moradu

 

탁실라의 제3의 고대도시 시르수흐에서 남동쪽으로 약 1.4Km 지점에 있는 거대한 사원이다. 언덕 아래의 골짜기에는 약 7m의 대탑이 폐허 속에 솟아 있다. 대탑 동쪽 승원에는 스투파가 유리문 안에 놓여 있고, 간다라 후기의 불상도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스투파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원은 2세기에[ 만들어졌고 5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엇다.간다라에는 27개의 사원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원은 욕실,창고,식당,강단,화장실들로 둘 쌓여 잇다.줄리안의 사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이다

 


졸리안 Jaulian

 

탁실라와 시르캅에서 멀리 떨어진 지상에서 100m높이에 세워진 사원이자 학교인 곳. 모흐라 모라두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사원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안뜰이 있고, 가운데에 스투파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스투파가 있는 경내에는 지난 날 승려들이 사용하던 식당이며, 주방·강당 등의 유적이 있다  사원의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편잡의 간다라지방의 다른 사원처럼 이곳의 승방도 직사각형의 건물들로 둘러 쌓여 있다. 주위의 건물들은 목욕실,부엌,창고,강단,식당,화장실등이 승방을 둘러 싸고 있다. 사원내에는 우물이 없지만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른다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졸리안 Jaulian 불상

탁실라에서 불교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자울리안사원이다. 이곳에는 승려들이 명상하던 방과 부엌 집회장 식당 목욕탕들이 남아 있는데, 불상을 우상숭배로 여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목이 베어진 불상이 남아 있어 안타깝다

 


졸리안 사원 메인 스투파

 


졸리안 사원 스투파 일부

 


탁실라 박물관 Museums

 

간다라 미술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박물관이다. 탁실라 주변에서 발굴된 불상과 동전, 항아리, 보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모흐라 모라두에서 발굴된 일곱 스투파의 복제품이 나타나며, 유리진열장에 간다라의 불상과 조각품이 진열되어 있다. 모흐라 모라두 대탑에서 출토된 좌불상은 간다라 미술의 최고 걸작이다. 불좌상(佛座像).청동, 죠우리안 출토, 5세기경, 9×7cm. 탁실라 죠우리안 사원지의 제21실에서 출토된 이 청동불좌상은, 일반적으로 석조(石彫)나 소조(塑彫)가 많은 간다라에서는 특이한 예이다. 선정인(禪定印)에 통견(의 옷, 둥글고 높은 육계,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이 그 특징이다

 

 


봉안탑, 4-5세기경, 366cm

 


마투라의 불좌상(佛座像).

 

사암(砂岩), 바리 데리(Bhari Dheri) 출토, 2∼3세기경, 19×16cm. 오른판이 결손된 이상은 그 재료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 놓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착의법, 그리고 양감이 넘치는 신체표현 등으로 미루어 중인도의 마투라지방에서 만들어진 불상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 탁실라의 바리데리에서 출토된 것은 그 당시 서북인도와 중인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풍요의 여신. 테라코타, 시르캅 제2층 출토, B.C. 1세기경, 높이 10.2cm.

 

비록 머리, 양판 그리고 무릎 아래부분을 잃고 있지만 사슴과 엉덩이 부분의 과장된 표현으로 보아 증식과 재생산을 기원하는 지모신상(地母神像)임을 알 수 있다

 


마투라 불좌상

 

탁실라


오늘의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을 선점(先占)한 종교는 불교다. 그러나 지금 파키스탄에는 불교가 종교로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불교의 흔적들이 거대한 유적군(群)으로 여기저기 남아있을 뿐이다. 불교미술사의 첫머리를 찬란하게 장식한 이들 유적은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 하나가 펀자브주 라발핀디지방의 탁실라(Taxila)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한시간을 가면 탁실라박물관이 있다. 유네스코는 탁실라를  대단위(大單位)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하였다. 고원지대에 자리한 탁실라. 비르마운드를 비롯,자울리안,모라모라드,시루스크,잔디알,시르캅, 사르아이코라,다르마지카,기리 같은 숱한 유적들이 있다. 탁실라의 역사를 후세에 증명한 유적은 시르캅(Sirkap)이다. 기원 전(BC)2세기쯤에 건설되어 기원후까지 존속한 이 도시유적은 탁실라 제2의 도시였다. 이보다 훨씬 앞선 도시유적 비르마운드가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역사를 뒷받침하기에는 좀 미흡했다. 그러나 시르캅은 영국인 고고학자였던 존 마샬경(卿)이 옛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땅속에서 찾아내는 고고학 발굴조사에서 도시의 주인이 적어도 다섯 차례이상 바뀐 사실을 밝혀냈다. 시르캅은 탁실라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다.  출입구로 사용하는 성문은 서쪽에 나 있다. 이 도시를 처음 세웠던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다. 오늘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쪽의 박트리아왕국을 식민지로 거느렸던 그리스인들이 BC 2세기 전기(前期)에 건설했다. 도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었다. 지금도 계속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시르캅의 도시규모를 당장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드러난 도시규모는 대략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1.7km이나 발굴구 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도시유적 한복판 간선도로 양쪽엔 네모 반듯반듯하게 돌을 쌓아올려 지었 던 집터가 즐비했다. 규모가 좀 작은 일반시민들의 주거용 집자리 사이로 터를 보다 넓게 잡은 차이티야당(Caitya堂)자리가 보였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투파(불탑)는 예배의 대상이다. 그래서 예배장소에 수투파를 안치했다. 그런 탓에 차이티야당은 넓을 수 밖에 없다. 도시 유적안의 수투파는 다른 야외수투파처럼 크지 않다. 시르캅에서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머리 두개의 독수리가 있는 쌍두취불탑(雙頭鷲佛塔)이다. 이 불탑의 기단(基壇)은 중앙계단을 사이에 두고 좌우 정면에 코린트식 둥근기둥이나 네모기둥을 세워 벽 공간을 각각 세등분 한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좌우 양쪽 세공간에다 그리스,서아시아, 서남아시아풍(風) 건물출입 구 모양의 감(龕)을 만들어 장식해놓았다. 두 머리를 가진 쌍두독수리는 서아시아풍의 출입구문위에 조각되었다. 그러고 보면 쌍두취불탑에는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시아라는 모티브가 서로 다른 문화가 혼재한 것이다. 이들 세 지역의 문화가 만나 만들어낸 쌍두취 불탑은 불분명했던 탁실라역사를 그런대로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쌍두독수리는 스키타이의 일족인 샤카족의 심벌이었다. 그래서 쌍두취불탑을 세운 시기는 샤카족시대 후기부터 파르티아족(페르시 아족)시대 전기로 추정되었다. 대개 기원후(AD)1세기 전기로부터 중기(中期) 에 이르는 시기다. AD1세기는 탁실라를 답사하는 동안 매우 주목할만한 시기였다. 불교미술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바로 1세기였던 것이다.이전에는 수투파가 예배대상 이었기 때문에 불교미술,더 나아가 불상은 전혀 조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경전에 근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아함경」(長阿含經)이 기록한 「이 몸이 명(命)을 다한 뒤에는 나를 볼 수 없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불상조성을 가로 막았을 것이다. 어떻든 불교미술이 탁실라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간다라(Gandarah)미술이 출현하는 것이다. 간다라미술은 파키스탄 북부 일대와 아프가니스 탄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 중심축을 이루었다. 이들 지역은 실크로드에서 인도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라서 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박트리아족과 박트리아에 살던 그리스인의 침략,샤카족 지배와 파르티아족 시대,쿠산왕조시대가 번갈아 거쳐갔다. 그런데 불교미술은 헬레니즘 양식을 짙게 받아들였다. 불교미술이 출현은 했지만 불상이 곧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부처가 없는 불교미술로 출발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르캅 도시유적 출토 릴리프「헌화공양도」(獻花供養圖)는 꽃을 받을 대상이 없는 가운데 연꽃다발을 든 사람들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 부처가 대중들과 더불어 불전도(佛傳圖)에 등장했지만 부처의 차별화(差別化)는 그 다음 단계에 이루어졌다. 부처의 키를 대중들보다 크게한다 든가, 자리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릴리프들이 시르캅유적 땅 속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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