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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 성당 (당진 합덕)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3. 2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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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성당        (이하출처- http://info.catholic.or.kr/)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合德邑)에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본당이다.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성당으로 출발하여,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명칭도 합덕성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신축된 것인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으로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로 지었으며,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설계를 담당한 페랭(Perrin) 신부는 6·25전쟁 때 납치되고, 현재 성당 구내에 있는 그의 묘소에는 유해가 없이 유물만 묻혀 있다.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성당이 생김으로써 구합덕성당으로 불리다가, 1997년 다시 합덕성당의 명칭을 되찾았다. 아산만 일대의 내포(內浦) 지방은 예로부터 충남지역 천주교의 중심지로,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이후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까지 이곳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신부 집안도 이곳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박해시대 한국에서 활동한 성직자들은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1890년 장 퀴를리에(Jean Curlier) 신부와 피에르 파스키에(Pierre Pasquier) 신부가 이곳에 파견되어 양촌과 간량골(현재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2개의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후 퀴를리에 신부는 여러 차례의 교안(敎案)을 겪으면서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합덕지(合德池) 이웃의 창말[倉里]에 있는 언덕을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 본당을 이전하여 합덕성당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07년 매괴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결성(結城)의 수곡성당(현재 서산성당 전신)을 분리하였으며, 1928년 예산성당을, 1939년 당진성당을 각각 분리하였다. 1960년 11월 합덕읍 운산리(雲山里)에 여섯 번째 자본당인 신합덕성당을 신설·분리함으로써 본래의 성당을 구합덕성당으로 개칭하였으나, 1997년 다시 합덕성당으로 명명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合德里) 275번지에 있다. 합덕성당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이다. (글- 네이버 백과사전)

 

합덕성당

 

합덕성당

 

합덕성당

 

합덕성당

 

합덕성당

 

합덕성당 성모정원

 

합덕성당

 

합덕 성당,  한국 초기 성당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방식이다.

 

힙덕성당 안내판            (출처- http://info.catholic.or.kr/)

 

100주년 기념비          (이하출처- http://info.catholic.or.kr/)

 

백문필 신부상

 

김대건 신부상

 

1900년에 촬영한 합덕 본당 옛 사제관  (출처- http://www.djhistory.org/)

 

예수성심상

 

야외제대와 성모상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4처  

 

성당 내부         (출처- http://info.catholic.or.kr)


내부의 모습은 전주의  전동성당, 명동성당 등 오래된 성당의 모습들이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퇴색된 페인트칠을 한것 같은 성당의  벽면은 그 100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다. 제대의 성구들은 초기의 모양으로 바꾸어졌다

 

성당 내부 제대  

 

성당내부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제대

 

제대

 

십자고상, 감실 

 

 성인유해함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성인유해함      

 

성인유해함  

 

성당 내부 제대

 

제대

 

십자고상  

 

독서대

 

옛 제대

 

성모상

 

내부 출입구

 

성수대          (이하출처- http://info.catholic.or.kr/)

 

성수대 

 

내부 뒷면

 

합덕 성당 순교비 및 순교자 묘소  

 

 합덕 성당 순교비

 

 

제7대 페랭(1921~1950년 재임, 한국이름 백문필) 신부 순교비


합덕본당에 30년간 재임한 페랭 신부는 100년이 넘는 본당 역사에서 신자들 기억 속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사제다.  "이 근방에서 백 신부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고약과 안약을 만들어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종기나고 눈병 난 사람을 치료해 주곤 하셨지. 상처가 나은 사람들은 감사 표시로 달걀을 가져왔고…. 그런데 6ㆍ25 때 끌려가셨어."  김기산(루도비코, 75) 할아버지는 백 신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고 전하면서 예전엔 청년 성가대와 악단까지 있을만큼 활발했고 아이들도 성당에서 놀며 자랐는데 지금은 성당이 너무 쓸쓸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 신부의 자부적(慈父的) 사랑의 한 단면은 "내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는 그의 유언에서 드러난다. 6ㆍ25때 남은 신자 한명을 위해서라도 본당 사제는 성당을 지켜야 한다며 백 신부는 보좌인 박노열 신부를 남하시키고 홀로 성당에 남아 있다가 성모승천대축일 전날 고해성사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 순교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성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제였다. 성당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백신부 순교기념비가 있다. 백 신부의 사랑과 그 공덕을 높이 받들고자 1957년 신자들이 세운 것이다.

 

 

 

순교자 묘소 

 

성당 뒤뜰 성직자 묘지에는 백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 스승인 이 매스트르 신부, 홍요한 신부, 심 마르꼬 신부 4명 사제의 묘가 있는데, 유해는 대전가톨릭대 성직자묘지로 이장됐다. 

 

 

이 매스트르(1808-1857) 신부 묘


성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이었다. 1852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전교하다가 황무실 공소에서 선종하신 분이다.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묘


1861년 우리 나라에 입국, 전교하다가 병사하였다.

 

백문필(패랭, 1885-1950)신부의 묘


1921년 부터 1950년 피납되기까지 계셨다. 현 성당 건물을 지은 분이다.1950년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 축일 준비를 위해 고해성사를 집전하다가 납치되었는데 시신은 현재 대전 사정공원 애국지사 묘에 묻혀 있다.

 

심재덕(마르코, 1908-1945) 신부의 묘


1942-1945년 까지 백문필 신부 보좌로 있다 병사하였다.

 

 

 

 

 

합덕성당 역대 신부 및 출신 성직자,  합덕 성당은 성소의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사제 40여명, 수녀, 수사 약 70명을 배출하였다.

 

순교비 제막식         (출처- http://www.photolic.com)

 

 

순교비 제막식 

 

충남 합덕본당, 유스호스텔 축복식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118년 전통의 고풍스런 합덕성당이 '유스호스텔'을 통해 신앙과 문화, 관광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내포교회 가운데서도 유서 깊은 공동체인 합덕성당은 충남 지방문화재 145호로 지정돼 있고 솔뫼ㆍ신리ㆍ여사울 성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순교신심을 현양하는 전당'으로도 떠오를 전망이다. 대전교구 합덕본당(주임 손범규 신부)은 7일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275 성전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합덕 유스호스텔' 축복 및 추수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행사에는 교구 사제단 30여 명을 비롯해 수도자와 평신도, 김낙성(대건 안드레아, 65, 자유선진당) 의원과 민종기(57) 당진군수 등 지역 기관장를 포함해 500여 명이 함께했다. 유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합덕 유스호스텔이 젊은이들에게는 새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 은총을 체험케 하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며 "오늘 성가정상을 축복한 합덕본당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공동체가 돼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재)대전가톨릭청소년회가 당진군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은 성당 관내 합덕리 329의8 2만2204.96㎡(6717평) 부지에 건축연면적 1953.72㎡(591평), 지상 3층에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졌다. 국ㆍ도비 및 민자 사업비 28억 원이 들어갔으며, 2007년 10월 공사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완공됐다. 120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대강당과 150명이 식사할 수 있는 대식당(지상 1층), 대화정보실과 사무실, 휴게실, 공동샤워실, 침실(이상 지상 2층), 장애인실과 지도자실, 침실(이상 지상 3층), 기계실(지하 1층) 등을 갖췄다. 지상 2ㆍ3층 침실은 7ㆍ8ㆍ10인실로 나뉘어 있고, 110명이 숙박할 수 있다. 김은경(마리아) 미우건축 대표가 설계했고, 서진산업(대표이사 이재천)에서 시공했다.

[평화신문, 제994호(2008년 11월 16일), 오세택 기자]

 

합덕본당, 유스호스텔

 

합덕본당, 유스호스텔

 유스호스텔 성모상               (이하출처- http://info.catholic.or.kr/)

 

 

유스호스텔 성모상

 

유스호스텔 성모상

 

성모상,  2008년 11월 7일 합덕유스호스텔 축복식을 가지며 유스호스텔 입구 부분에 설치된 성모자상

 

합덕유스호스텔 성가정상


2008년 11월 7일 합덕유스호스텔 축복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설립 118주년을 기념해 본당 주보인 성가정상 축복식도 가졌다. 파리 제2대학 예술학부 교수로 있는 저명한 조각가 최영철(바오로, 55) 형제가 제작한 이 성가정상은 높이 240㎝에 폭 120㎝ 크기로, 전통 한복 차림의 성가정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에 자생하는 아카시나무(싯딤나무)로 제작한 목각상으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특히 이 아카시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제단이나 증거궤, 성막의 널판 제작 등에만 쓰는 특별한 재질의 나무이다. 아직 초가지붕이 설치되기 전의 사진이다.

 

합덕유스호스텔 성가정상

 

합덕유스호스텔 성가정상  

 

합덕성당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충남 합덕성당, 이연숙 기자/ 평화신문)


대전교구 모(母)본당인 합덕본당(주임 김홍식 신부)은 1890년 설립됐다. 양촌성당으로 출발했으나 9년 뒤 현 위치(충남 합덕읍 합덕리275)로 옮기면서 합덕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성당이 생기자 구합덕성당으로 불리다가 97년 그 이름을 되찾았다. 합덕성당은 넓은 내포평야가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우뚝 서있다. 성당 넓은 터를 감싸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이 성당 역사를 말없이 대변해주고 있다. 발 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 사제관 앞마당에서 한가롭게 노는 토종닭들은 포근한 초겨울 정겨운 농촌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다.  합덕본당은 대전교구에서 제일 먼저 설립됐으나 성당은 공세리성당에 이어 두번째(1929년)로 완공됐다. 충청남도 문화재 제145호다. 서양식 고딕 건물로 종탑이 두개인 것이 공세리성당과 다르지만 성당 내부는 비슷한 점이 많다. 공세리성당을 설계하고 지은 드비즈(한국이름 성일론) 신부가 합덕성당도 설계했다. "합덕성당 2대 복사를 지낸 최영세 요한 어르신이 합덕성당 설계 도면을 그리던 성 신부 옆에서 도와줬다고 증언했습니다."  대전교구 성지위원회 위원으로 내포지역 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윤배(방그라시오, 65)씨 말이다.  공세리성당보다 규모가 조금 큰 합덕성당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던 제대와 벽에 걸린 십자가의 길 14처가 옛 성당 모습을 보여준다. 14처 성화를 담은 나무틀마다 각 처를 한자로 새겨 표시했으며, 벚꽃 모양으로 장식도 했다. 성당 앞쪽 왼쪽 벽엔 본당 주보인 오래된 '성가정' 성화가 걸려 있고 오른쪽엔 성모상이 있다. 성모상 뒷벽을 이곳에서 손쉽게 구한 단풍가지들로 소박하게 장식한 것이 또 한번 고향 정취를 느끼게 한다.  "성당 정면 십자가 양쪽 창문은 얼마 전에 신ㆍ구약의 만남을 상징하는 유리화로 다시 했습니다. 영성체 난간틀도 다시 복원할 계획이고요."  본당 주임 김홍식 신부는 성전을 성전답게 복원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합덕성당은 제7대 페랭(1921~1950년 재임, 한국이름 백문필) 신부 재임 때 건립했다. 200평 규모 붉은 벽돌 건물로 당시 돈 1만원이 넘는 공사비가 들어갔다. 이 돈은 쌀이 귀하던 당시 쌀 1800가마에 해당한다. 성당을 짓고자 중국 기술자들을 불러왔으며, 신자들은 멀리서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성당 완공식 때는 인근 마을 비신자들까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합덕본당에 30년간 재임한 페랭 신부는 100년이 넘는 본당 역사에서 신자들 기억 속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사제다.  "이 근방에서 백 신부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고약과 안약을 만들어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종기나고 눈병 난 사람을 치료해 주곤 하셨지. 상처가 나은 사람들은 감사 표시로 달걀을 가져왔고…. 그런데 6ㆍ25 때 끌려가셨어."  김기산(루도비코, 75) 할아버지는 백 신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고 전하면서 예전엔 청년 성가대와 악단까지 있을만큼 활발했고 아이들도 성당에서 놀며 자랐는데 지금은 성당이 너무 쓸쓸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 신부의 자부적(慈父的) 사랑의 한 단면은 "내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는 그의 유언에서 드러난다. 6ㆍ25때 남은 신자 한명을 위해서라도 본당 사제는 성당을 지켜야 한다며 백 신부는 보좌인 박노열 신부를 남하시키고 홀로 성당에 남아 있다가 성모승천대축일 전날 고해성사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 순교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성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제였다. 성당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백신부 순교기념비가 있다. 백 신부의 사랑과 그 공덕을 높이 받들고자 1957년 신자들이 세운 것이다. 성당 뒤뜰 성직자 묘지에는 백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 스승인 매스트르 신부, 홍요한 신부, 심 마르꼬 신부 4명 사제의 묘가 있는데, 유해는 지난해 대전가톨릭대 성직자묘지로 이장됐다. 하지만 정신과 마음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합덕본당은 이미 1906년 이 지역 첫 사립학교인 매괴학교를 설립해 지역 교육사업에 헌신했으며, 1908년부터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거두어 각 교우 가정에 양육비를 주어 기르도록 하는 사회복지사업도 폈다. 1947년 고아원을 설립(21년간 운영)하기 전까지 이 사업이 계속돼 300명의 아이들이 따뜻한 가정에서 클 수 있었다.  또한 성당이 갖고 있는 토지가 수십만평에 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작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전교에도 한몫 했다. 해방 후, 6ㆍ25 후 토지개혁과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며 지금 남아 있는 성당 부지는 6900평에 불과하다.  합덕본당은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교우촌이 있었으며, 인근에 솔뫼성지와 신리성지, 이존창생가터가 있는 지역적, 역사적 여건 때문인지 특히 성소 못자리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사제 33명을 배출했으며, 수도자까지 합하면 100명이 넘는다.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침체된 농촌 성당이지만 성소의 맥은 이어가 신학생 2명을 두고 있다.  현재 교적상 신자는 468가구 1200명이지만, 주일미사 평균 참례자는 370명선이고 노년층 중심이다. 김홍식 신부는 지난 15년간 본당 신자 수와 관할 지역 인구수를 조사한 결과 1988년 관할 인구수가 9058명이던 것이 지난해 말 현재 4795명으로 줄었고, 신자 수도 매년 평균 40명씩 줄어 15년간 600명이 빠져나갔다고 전했다. 하지만 합덕성당은 지금도 학생들의 성지 도보순례 코스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을만큼 뿌리깊은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 신부는 "합덕도 한때는 풍수원ㆍ감곡처럼 성체현양대회를 계속했었다"면서 이 행사를 부활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역사에 걸맞는 여러가지 계획들을 하나씩 차분히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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