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준 장로(1875-1945)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박관준은 1875년 4월 13일 평북 영변에서 토호 박치환의 4념 2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체 많은 돈을 가진 부호의 아들인 박관준은 어릴적 방탕하여 한때는 병까지 얻게 되었다. 이 병으로 인하여 인생의 허무 감정을 갖게된 그는 나름대로 심령의 안식을 얻기 위해 구도를 했다. 불교는 물론 侍天敎에서 3년을 수도생활까지 했으나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던 중 1905년 30세 되던해에 묵상에 잠겨있다가 "십자가 종교에 들어가라 ."는 영음을 듣고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의사가 되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이고 예수를 위해 사는 길이라고 믿고 의학을 해서 십자의원을 개원해서 환자들에게 전도하기에 힘썼다. 그러다보니 치료비를 받는 경우보다 투입하는 약값이 더 많았다. 십자의원을 개원한 후 교회를 개원해 장로가 된 후에는 평양으로 이주해 병원을 개원했다. 1935년 그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나를 위해 피를 흘릴자가 누구냐?" 는 부름에 "제가 흘리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나의 십자가 군병이 되거라"라는 계시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박장로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미나미총독을 면회하여 결판을 내려고 평양에서 13회나 서울총독부에 올라왔으나 면회를 못하고 그러는 가운데 "모든 종교는 일본제국의 승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단체법을 상정 통과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보성여학교 교사직을 사임한 안이숙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신학교에 재학중인 25세 박영창과 함께 전조선총독 우까끼, 문부대신 아라끼.척무장관 야다를 찾아보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1939년 3월 22일 세 사람은 방청권을 구입하여 제74회 일본제국의회(일본제국중의원-국회의사당) 방청석에 들어가 국회가 사무절차를 밟아 종교법안이 상정될때 야스후지의원이 단상에 오르는 순간 박관준장로는 번개처럼 뛰어나가며 손안에 든 대 봉투를 아래층 의사당안으로 내 던지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다"소리를 질렀다. 의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박장로는 즉석에서 체포되고 경시청에 32일 구금되 있는 동안 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가에 대해 앞다투어 보도했다. 한국으로 송치된 그는 1941년 봄 천황에 대한 반역자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했음은 물론 1945년 1월 1일부터 7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금식기도 70일째 된는 3월 10일 내일은 밖으로 나가 3일간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으로 오라" 하는 소리를 들었고 1945년 3월 11일 병보속으로 나와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했다. 박장로는 병원에서도 문병자들에게 전도하고 "신사참배는 안됩니다 ---열심히 예수를 믿읍시다"라고 하다가 3일 후인 3월 13일 오전 10시 가족이 모인 앞에서 이사야 11:10-16절을 유언을 하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평양교회의 공동묘지인 돌박산에 순교자 주기철 최봉석 목사가 묻혀있는 그 옆 자리에 안장 되었다. 그 후예로는 박영창목사가 뒤를 이었다. 제국의회에 보내는 박장로의 경고문은 다섯조목이다.(순교신서 3권 제1집 175쪽에 있음)
(글 출처- http://kcmma.org)
박관준 장로 순교 추모비, 비문
순교 추모비
순교 추모비
순교 추모비
순교 추모비
순교 기념비문
순교 기념비문
박관준 장로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했던 일본국회 건물 (출처- http://evergreen.korea.com/evergreen)
박관준 장로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했던 일본국회 건물 (東京都千代田區 永田町1-7-1 )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면서 성도들에게 신사참배및, 일본국기배례, 일본 일왕 사진배례, 황국신민서사 제창등을 강요하여 우상을 섬기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지금도 일본에 가보면 교회보다는 곳곳에 신사가 더 많이 세워져 일반국민들이 참배를 드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일본 성경에 하나님을 가미사마(神樣)로 표현을 하지만 실제로는 가미사마하면 야오르즈노가미 (八百萬神)라고 800만의 신을 상징하는 다신교의 나라이다. 특히 이런 신앙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일본인들이 일제시대 우리에게 전국적으로 강요한 신사참배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은 순교자 주기철목사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주목사를 비롯하여 50여명이 순교를 하였으며 5000 여명이 투옥되어 한국교회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동안 주기철.손양원.이기풍,최봉석,서덕명,최상림,주남선,등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순교역사는 잘 알려지고 기념관도 세워져 있지만 평신도로서 신사참배 운동을 하다가 순교를 한 박관준장로에 대하여는 모르는 분들이 많다. 나는 일본에 가기전에 부천에서 박영창목사를 만나 뵙고 부친의 순교이야기를 다시 듣고 일본으로 떠났다. 박관준장로가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던 일본국회의 건물은 일본제국의 국력과 국위를 세계에 과시하려고 18년간의 장시간에 걸쳐 지은 흰색의 5층 건물인데, 개방시간에 맞추어 가면 국회를 개방하므로 볼 수가 있다. 국회내부는 37종의 일본과 한국산의 대리석과 산호석등으로 호화롭게 장식을 하였고,1만5천평의 건물을 짓는데는 총인원이 254만명이 동원된 건축물이다. 마침 내가 국회를 찾은 날에 국회가 열려서 일본 군대의 해외 파병안을 둘러싸고 회의을 하던 날이라 경비가 삼엄하였다. 2차대전 말기에 미국의 원자탄을 맞아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히로히또 일왕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선언을 한지 50여년만에 일본은 경제, 군사대국이 되어 외국에 군대를 파병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통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과거의 조상들의 죄악상을 가리우려고 하지만 해방후에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일반시민들의 반대로 그 교과서가 거의 채택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박관준장로는 1875년 4월13일에 평안북도 영변의 성안에서 당시로는 굉장한 부자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당시의 청일전쟁과 일제침략의 소용돌이에서 집안이 망하고 1905년에 유교와 불교에 집착하였던 과거를 버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니 서른살의 나이였다. 이때는 일제가 조선을 1910년에 강점을 한 민족의 시련의 시기인데 오히려 길선주목사가 인도하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의 부흥회가 출발이 되어 예수믿는 백성들이 국내와 만주, 시베리아일대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1910년에 한국교회의 성도의 수가 17만8천명이나 되었는데 1866년 9월3일에 대동강에서 첫 순교를 한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민중들은 일제의 간악한 압제에서 독립을 얻는 길은 서양에서 전해준 기독교가 국가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여 그동안 섬기던 유교,불교,동학을 버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단결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관준장로는 1912년 서울에 와서 3년간 의학공부를 하고서 사이또(斎藤)총독으로부터 개업의사의 면허를 받았다. 그후에 평안도의 개천읍교회의 장로로, 또한 직업은 의사로 영변에서 제중의원을 개업하였다. 1937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이 신사참배 불참석으로 인하여 폐교의 위기에 있게 되자 박관준장로는 합법적인 투쟁을 하기로 하고 장문의 진정서를 니시모도 평남지사와 우가끼(宇垣)총독에게 보냈다. 그리고 신사참배의 문제를 직접 총독과 만나서 권고하려고 13번이나 총독부를 방문했지만 모두 거절되었다. 특히 박장로가 우까기(宇垣) 총독이나 미나미(南)총독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 성경에 기록된 데로 흉년같은 저주가 임한다는 경고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이런 일을 하는 중에도 박관준장로는 늘 세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한 분은 당시의 철종의 사위이며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말년을 어렵게 보내던 박영효를 만나서 전도를 하자 박영효는“나는 예수를 믿을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 뿐아니라 우리 동포가 다 같이 예수께로 귀의을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만든 인촌 김성수와 춘원 이광수에게 예수님을 강하게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인촌은 자신이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으며 춘원은 과거에 기독교를 거쳤지만 지금은 해탈을 위하여 불교를 연구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춘원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의 주필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귀국하여 언론계에서 활약을 하며 민족정기를 고취하면서 사상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였지만 말년에 친일에 가담한 경력을 보여주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결국 박장로는 이와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서 고위층들에게 직접 항의를 하기로 하고 보성여고 음악교사를 그만 둔 안이숙양의 안내를 받아 일본 동경에 건너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외아들 박영창군과 같이 일본의 정 관계인사를 두루 만나서 협조를 요청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박장로 일행은 1939년 3월24일 오후1시경 마침 일본제국의회에 들어가서 2층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신종교법안이 심의가 될 때에 1시48분경에, 성명서 뭉치를 의장석에 던지며 일본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외치자 국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임검하고 있던 경관에게 세명 모두 체포되었다. 박관준장로는 대를 이을 외아들인 박영창목사를 같이 거사에 참여를 시켰고 박영창목사는 부친의 말에 순종을 하여 이삭과 같은 믿음을 보였다. 다행히도 일제는 아들인 박영창목사는 석방을 하고 박관준장로는 평양으로 압송을 하여 오랜세월 감옥에 투옥을 시켰다. 박장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6년간 옥고를 치루다가 1945년 1월1일부터 40여일간 금식기도를 하여 결국 빈사상태에 빠져서 평양의 기독병원으로 후송되어 3월13일에 순교를 하셨다. 1945년 8월에 해방을 예언하며 기뻐하셨지만 해방을 5개월 앞두고 순교를 하셨으며, 금식 40일 동안 비몽사몽간에 천사들이 박장로의 입에 향기로운 과일들을 넣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오고 있다. 박장로는 감옥에서 기독병원으로 나와 5일이 되는 아침에“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의 말씀데로 됩니다. 여러분은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런 하늘 나라에서 만납시다”그리고 낮은 음성으로“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라는 찬송을 부르며 고요히 숨을 거두니 향년70세 이며 1945년 3월13일 오전 10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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