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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 공소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2. 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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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 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 

 

갈곡리 공소

 

갈곡리 공소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 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커다란 고개가 동쪽에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려면 20여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한다. 이렇게 험한 첩첩 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방지거,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2년 송도(개성)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된다.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된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된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 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된다. 1955년 1월 군종 신부님이셨던 에드워드 마 신부님의 도움으로 현재와 같은 공소 성당이 건립되어 노기남 대주교님의 주례로 축성 봉헌되었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이다. 법원리 본당이 약 3.5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일에는 법원리 본당 미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신자들의 영신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글- http://www.paxkorea.co.kr) 

 

갈곡리 공소 

 

갈곡리 공소 

 

사은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사은비

 

주보현판석

 

정초석

 

주차장과 성모상

 

성모상

 

성모상

 

공소 내부

 

공소 내부

 

제대

 

제대 십자고상

 

제대 

 

제대 십자고상, 감실

 

십자고상

 

독서대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내부 후면

 

십자가 14처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칠울강당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 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칠울강당, 사제관

 

칠울강당

 

칠울강당

 

칠울강당 머릿돌  

 

         

옛 사진              (이하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옛 사진      

 

옛 사진

 

2005년 50주년 기념미사

 

2005년 50주년 기념미사

 

2005년 50주년 기념미사

 

갈곡리 전경         (출처- http://www.paxkorea.co.kr

 

 

◆ 칠울 공소 출신 수도자 근황


현재 갈멜수도원에는  87세이신 최 성삼의 마리 이사벨 수녀님과  83세이신 최 미카엘라 수녀님 두 분 노령의 수녀님이 생존해 계시다. 그외 최 알렉산델 수사님은 혜화동 보나벤투라 수도원에서, 김 에스텔 수녀님께서는 횡성 안나의 집에서, 김 마리폴 수녀님은 춘천 주교좌 죽림동 성당에서, 최 라파엘라 수녀님은 제주 성 글라라 수도원에서, 전 아녜스 수녀님은 수유1동 성당에서 활동하고 계시다(2005.9).


◆ “칠울(葛谷里) 공소” 관련 기록 : Mutel 주교 일기


○ 1905년 1월 29일자 : 처음 ‘칠울’ 교우촌의 이름이 나타남 【주(註)】

○ 1912년 3월 13일 및 1915년 3월 2일 :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1866~1928년) 신부가 칠울 공소를 거쳐 서울 주교관 방문. 르 장드르 신부는 1909년 5월 부산 본당 주임에서 송도(개성)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1919년 5월까지 재임하다가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안학만(安學萬, 루가) 신부는 1917년 9월 22일 사제품을 받은 후 서산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1919년 5월 연례 피정이 끝난 뒤 송도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1919년 10월 30일에 서울 출발

○ 1918년 12월 11일~14일 : 뮈텔 주교의 칠울 공소 방문

  【주(註)】 Mutel 주교 일기문 발췌

1905년 1월 29일 영하 11도. 북풍이다. 며칠 전부터 이곳에 다시 온 가련한 시프리엥 발레 신부가 9시30분 미사에 참석했다. 칠울(Tchil-oul)교우들이 사냥에서 잡은 아주 잘생긴 노루 한 마리를 내게 갖고 왔다. 1912년 3월 13일 영하7.5도. 르 장드르 신부가 그의 칠울공소에서 송도로 돌아가기에 앞서 우리를 만나러 왔다. 1918년 12월 11일 8시 반에 20리 상거의 칠울로 가기 위해 떠났다. 날시가 좋고 길도 좋았다. 별 고생 없이 20리 길을 갔다. 10시 반에 도착했다. 1918년 12월 12일 성인 영세자 2명, 보례7명, 유아 영세 1명. 온몸이 흉터투성이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어떤 불쌍한 불구자의 고해를 듣기 위해 마을 끝까지 갔다. 이 불쌍한 모습은 우리 죄 때문에 매질을 당한 위대한 희생자를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자의 경우는 자기 죄 때문이다. 로일(露日)전쟁 때 그는 군대를 따라갔었는데 거기서 이 병에 감염되었다. 그것은 필시 성병일 것이다. 어제는〔판독 안됨〕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 노파에게 종부성사를 주었는데  그중 김 수산나는 회장의 모친이다. 10년 동안 맹인으로 지낸 그녀는 작년에 시력을 되찾았다. 오늘의 나이 79세이다. 저녁때 떡 12바구니를 받고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니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1918년 12월 14일 9시에 공식적으로는 북암리(北岩里)로 불리는 송굴암 공소로 떠났다.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전체 거리는 약 10리이다. 10시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때 매우 적은 양의 눈이 내렸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갰다.  (출처- http://www.pax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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