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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틴스 수도원 (영국 요크)

성지순례/서유럽(영국)

by baesungsoo 2015. 10. 2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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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틴스 수도원[Fountains Abbey] 유적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


요크에 있던 시토회 수도원에서 뛰쳐나온 수사 13명이 스켈데일 계곡에 세운 수도원이다. 이곳은 신앙심 깊은 수사들의 발자취가 폐허가 된 수도원과 주변 경관에 지금도 남아 있다. 근처에는 엘리자베스 왕조 양식으로 지은 파운틴스 홀이 있다. 파운틴스 수도원은 돌벽과 아치는 반쯤 무너지고, 유리가 떨어져 나간 창문이 남아있지만 남아 있는 부분을 통해 시토회 건축가가 감소함과 명쾌함, 질서를 중시해 성당을 지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에 수도원이 폐쇄된 이후 한때 채석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이 곳은 ‘성모 마리아의 샘’이라는 이름이 유래하듯이 많은 샘물이 솟아나는 스켈데일 계곡이다.  파운틴스 수도원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 때는 1130년대였다. 요크에 있는 세인트메리 수도원의 안락한 생활을 거부한 수사 13명이 멀리 떨어진 스켈데일 계곡까지 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왔을 때 이 곳에는 북부 지방의 미심쩍은 움직임에 대해 잔인하리만치 강한 힘을 과시한 압제자 윌리엄 2세의 보복으로 황폐해진 곳이었다. 수사들은 느릅나무 주변에 작은 집을 지은 뒤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프랑스 클레르보의 성베르나르두스(12세기 시토회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가 파견한 조프루아 데네가 공사와 기부금 모집을 지휘했다. 시토회의 자그마한 공동체는 점차 커졌고, 수도원 재산도 늘어났다. 광활한 토지를 얻은 덕분에 도서관까지 갖추었다. 인근에 있는 리보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파운틴스 수도원에서도 지적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유럽에 있는 다른 수도원과도 빈번하게 교류했다. 시토회에 속한 수사들은 옷 색깔 때문에 ‘하얀 수사’라고 불렸다.

  

파운틴스 수도원

 

대수도원 유적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것으로 중세 수도원의 흥망성쇄를 한 눈에 볼 수있다. 이 수도원은 1132년 요크에 있던 베네딕토수도원에서 세속화된 소두원 풍토를 쇄신할 것을 주장하다가 수도원장에게 추방당한 13명의 젊은 수도사들이 세웠다. 이들은 요크 대주교가 주선해 준 산 골짜기에서 절대 청빈과 절대 순결, 절대 순종의 덕목을 요구하는 베네딕투스 수도원칙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수도원을 건설했는데, 초기엔 생활고로 고생했다. 수사들은 십일조뿐만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거두던 조세도 걷지 않았다. 수사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면양을 키우고 양털을 팔아 수도원을 번창시켰다. 그들은 중세의 주민들을 지도해 이 지방 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기록에 따르면, 스켈데일 계곡은 ‘사람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들짐승의 소굴 같은’ 곳이었는데, 당시에는 수도원 땅을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하루종일 걸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수사들이 온 지 1세기가 지났을 무렵에는 영국 시토회 수도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유럽에서 중세 클루니 수도원개혁운동을 이끌었던 프랑스 Citeaux수도원과 연결되어 재속수도사(lay monk) 제도를 도입한 결과, 생활과 수도를 겸하는 수도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정치권과 일반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 수도원은 3백 년 만에 영국에서 제일 부요한 수도원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 물질적 부요가 정치권과 민중의 비판을 받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 당시 영국 국왕 Henry 8세에 의해 폐쇄되고 말았다. 파괴된 수도원 모습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계명을 저버리고 "부요한 자는 화가 있을지니"라는 징계를 받은 교회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1135~1147년에 지은 성당의 신랑과 익랑은 프랑스의 퐁트네 수도원의 성당 구조와 비슷하고 아케이드, 기둥머리, 까치발 장식에는 앵글로노르만적 요소가 엿보인다.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소박하고 명쾌한 시토회의 이상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247년에 성당 동쪽에 완성한 9개 제단이 있는 예배당은 영국 최초로 뾰족 아치를 구사했다. 뾰족 아치로 높은 곳까지 아름답게 꾸며 놓은 내진은 이미 베르나르두스가 부르짖던 시토회의 소박한 건축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도원의 정신적인 영향력은 곧 영국 밖으로도 퍼져 나가, 똑같은 시토회 수도원이 속속 생겨났다. 그 즈음에 생겨난 7개 수도원 가운데에는 노르웨이에 자리잡은 것도 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으로 영국의 수도원은 큰 변화를 겪었다. 헨리 8세는 1534년 자신의 이혼 문제를 빌미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독립시키는 법령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1536년부터 수도원을 해산시키면서, 그 땅과 재산은 국고로 환수했다. 오늘날 영국 각지에 수도원의 폐허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파운틴스 수도원은 해산 뒤 잠시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무너졌다. 오늘날 방아찧던 곳, 부뚜막, 엿기름 제조소는 폐허로 변했다. 또한 회랑에 있던 목조 아케이드도 없어졌다. 파운틴스 수도원은 노동과 신앙생활을 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는 시토회의 상징이다 


파운틴스 수도원[Fountains Abbey] 유적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


파운틴스 수도원[Fountains Abbey] 유적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

파운틴스 수도원[Fountains Abbey] 유적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

 

세인트메리 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건축가 윌리엄 버지스는 리폰 후작의 의뢰를 받아, 1871~78년에 수도원 근처에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성당을 지었다. 이 세인트메리 성당은 빅토리아 시대의 후기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오래전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을 통해 19세기 영국인이 고딕 양식을 얼마나 선호했는지 엿볼 수 있다. ‘고딕 부활’로 불리는 이 양식은 독일 등 대륙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19세기 중반에 이 양식으로 지은 성당이 약 200채나 된다. 4세기 동안 경제 활동에 공헌했던 시토회 수사들의 근면한 발자취는 자연석을 쌓아 만든 돌담 풍경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 사욕법과 웬지데일 치즈의 제조법도 전해 주었다.  

 

스터들리 왕림 공원  파운틴스 홀     

 

스터들리 왕림 공원은 그리스 양식으로 새로 단장한 정자, 로마 양식의 조각상, 다리, 기둥 등이 완만한 언덕 위에 서 있어 18세기 사람들의 기로를 보여 준다.  이 정원 안에는 1595~1611년에 지은 여름 별장이 있다. 이 곳에는 17~18세기의 생활 양식을 알 수 있는 가구, 집기, 수집품이 있다. 겉보기에 중세 건축물 같은 이 저택을 파운틴스 홀이라고 한다. 건축 자재는 일꾼들이 근처에 있던 시토회 소속의 파운틴스 수도원의 폐허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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