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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선사 (대마도 이즈하라항)

타종교신전/불교사원

by baesungsoo 2007. 11. 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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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사           (출처- http://blog.naver.com/khw6592)


수선사는 백제의 사찰 슈젠지이다. 면암은 74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쓰시마로 유배됐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단식투쟁을 벌이다 그해 11월 순국했다. 면암의 주검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꿋꿋한 기개는 1986년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로 남아있다.

 

수선사 

 

수선사

 

최익현 선생 장례 치룬 곳  

 

수선사

 

수선사 공동묘지

 

공동묘원 묘비

 

수선사 내 어린이 묘역     (출처- http://blog.naver.com/ssoi0511)

 

당시 일본에서는 노부모 뿐 아니라 자신의 어린 자식까지도 내다버려야 했었는데 그렇게 자식을 버리고 난 후에 부모는 늘 자식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집 마당이나 근처에 이렇게 불상을 두고 아침마다 기도하였다. 불상에 입힌 옷은 앞치마가 아니라 아기들이 밥먹을 때 뭘 잘 흘려서 매어주는 턱받침같은 것이다.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출처- http://blog.naver.com/khw6592)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면암 최익현 선생 추모비                      (출처- http://blog.naver.com/okckfof

 

면암 최익현 선생       (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었는데 조선통감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등박문은 선생으로 인해 조선 유림의 봉기가 있을 것을 두려워 하여, 선생을 이곳 대마도로 유배하였다. 조국을 떠나는 초량(지금의 부산포) 앞바다에서 면암 선생은 아끼던 제자 임병찬에게는 물 한 동이를 떠오라 이르고, 자신은 버선을 벗어 그 안에 모래 흙을 담았다. 대마도에 내려서도 일본 땅은 밟지 않겠다는 굳은 결기였다. 대마도에 도착한 최익현 선생에게 경비대장은 '일본 땅에서 일본의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군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면암 선생은 흔들리지 않고 말씀하셨다. "내 그럴 줄 알고 조선에서 물 한 동이를 떠왔느니라. 나는 오늘부터 이 조선의 물만을 마실 것이니, 너희들의 명은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날부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이 수선사는 면암선생의 시신이 입관되고, 이틀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면암의 주검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꿋꿋한 기개는 1986년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로 남아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최익현 동상 (청양 칠갑산) 

 

최익현 선생 묘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는 최익현의 묘는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30㎡이다. 1907년 쓰시마섬[對馬島]에서 논산시 노성면(魯城面)의 국도변에 묘를 썼는데, 참배객이 몰려들자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묘의 왼쪽에 건립된 비석은 직사각형의 화강암으로 된 대좌와 오석(烏石)의 비신, 옥개형의 화강암으로 된 이수(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로 구성되었다. 비신의 전면에는 ‘勉庵崔益鉉之墓 貞夫人淸州韓氏附左’라고 음각되었으며, 묘의 앞에는 상석과 높이 1m의 석주가 좌우에 1개씩 있다. 묘의 입구에는 최익현의 태의비(太義碑)가 세워져 있다. 태의비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대좌, 오석으로 된 비신, 이수 등의 별석 3장으로 구성되었다. 대좌는 직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이 올려졌으며, 그 위에 ‘勉庵崔益鉉先生春秋太義碑’라고 음각된 비신에는 여의주를 문 용 2마리가 새겨져 있다. 최익현(1833~1906)은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일본과의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임병찬(林秉瓚:1851~1916)과 함께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나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거부하고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 선생 묘

 

최익현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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