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전주 숲정이 성지, 카톨릭신학원 (전주시 덕진구 진북2동)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7. 17:14

본문

전주 숲정이 성지  

 

숲정이는 일찍이 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이래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유혈이 있었다. 1839년 5월 29일에는 1827년(정해년)에 체포돼 13년간 옥고를 치른 신대보(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 김대권 등 5명이 참수됐다. 1866년 12월 13일에는 소양면 신리골의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과 성지동의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 여섯 분이 치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을 비롯한 수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치명하기도 했다.

(이하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전주 숲정이 성지

 

전주 숲정이 성지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순교자는 한국 순교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 부부이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며느리이기도 한 이 루갈다는 조선 왕조 태종의 14대손으로서 지봉 이수광의 8대손인 이윤하와 권일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터운 신앙의 가계에서 자란 그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이기를 결심하지만 이는 당시의 풍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루갈다의 결심을 알고 있었던 주문모 신부는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장남 중철이 역시 동정으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혼사를 주선,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 부부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후 4년 동안 오로지 천주의 정배가 되리라는 의지로 정결한 생활을 해 온 이들 부부는 마침내 신유박해를 만나고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된다.

 

 전주 숲정이 성지

 

전주 숲정이 성지와 전주 카톨릭신학원

 

순교자의 땅  

 

성지 전경  

 

성지 전경 

 

천주교 순교자의 땅

 

전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중철 요한의 처 이 루갈다가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기 직전 옥중에서 친정으로 보낸 편지는 그대로 전해져 한국 천주교회사의 귀중한 보물로 여겨진다. 옥중에서 옥리의 눈을 피해 그의 여동생과 올케에게 쓴 조각 조각이 어느 교우집에 곱게 간직돼 내려와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전문이 소개됐는데 그 구절구절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우리는 다 같이 천주를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맹세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의 애정은 다른 감옥에 갇힌 남편 요한에게로 끊임없이 달려만 갔습니다. 10월 9일 나의 시동생이 끌려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남편과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영광을 택한다. "고문이 시작되자 나는 천주를 믿음으로써 목숨을 바치겠다고 확실히 말했습니다. 형리는 나의 정강이를 때리고 수갑을 채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내가 순교자가 된다면 모든 나의 죄는 없어지고 천 배나 만 배나 되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복(福)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 부부의 무덤은 지금 전주 시내 어디서나 잘 바라다보이는 교동(校洞)의 치명자산, 시민들은 중바위라고 부르는 산머리 양지바른 자리에 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낮이나 밤이나' 기도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천주교 순교자의 땅 

 

야외제대와 성모상

 

야외제대

 

십자가상

 

성모상

 

순교자 기념비 

 

숲정이 순교성지에는 훗날 천주교인들이 해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92년 학교가 전주시 삼천동으로 이사하고 난후 체육관을 ‘윤호관’으로 개조하였고, 1400평의 성지를 확보하였다. 윤호관은 18세의 나이로 전주 서천교에서 순교한 조윤호(요셉)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을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 행사의 장소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 뜻이 깊다고 하겠다. 지방 문화재 제71호로 지정돼 있는 숲정이는 아파트 공사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1백50여 미터 떨어져 자리해 있는데 성지에서 옮겨 온 토사로 조경이 돼 있고 안내 표지판과 십자가 그리고 순교자 기념비가 순교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순교자 기념비 

 

신해박해

 

신유박해

 

호남지방은 ‘호남의 사도’라 불리운 유항검(柳恒檢,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전교가 되어 전주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회의 요람지였다. 현재 전주 가톨릭 신학원이 위치해 있는 숲정이(윤호관) 성지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정이’ 혹은 ‘숲머리’라고도 하는 이곳 숲정이는 신유박해 때 1801년 12월 28일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조카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등 유항검 가족이 처음으로 처형되면서부터 순교자들의 처형이 그치치 않았다. 

 

조창원 작, 숲정이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 처형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조창원 작,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의 순교, 65 x 53cm, 2008년  

 

정해박해

 

정해박해

 

기해박해

 

순교자 김대권 베드로 ( ? -1839년)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야고보)은 바로 그의 아우이다.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수계하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한때 베드로는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며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김대권 베드로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계하는 데 열중하였다.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수 성탄 대축일이면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기도를 다하고 내려왔다. 사순 시기 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중 아우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 원의를 나타냈다. 그 후 베드로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치자, 베드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고산에서 한 차례 신앙을 증거한 베드로는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대권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에 의해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 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다.

 

순교자 신태보(申太補) 베드로 (1768?-1839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훗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 정도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사촌 이여진(요한)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는 없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는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2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신태보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훗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지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 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이후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순교자 이태권 베드로 (1782-1839년)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후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은 그의 삼촌이다. 베드로는 열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후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나갔다. 또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후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던 그는 1827년에 다시 한 번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천주의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동생만을 피신시켰다. 과연 얼마 후에 포졸들은 이태권 베드로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타났고, 그는 이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는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아무 것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를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김대권(베드로), 이태문(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에 의해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옥에 갇혀있는 동안 이태권 베드로는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수기를 남겼다. 한편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순교자 이일언 욥 (1767-1839년)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태문(李太文)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관명은 태문(太文)이었다. 욥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후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으나, 인종으로 이를 참아내면서 참다운 신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관장의 허락 아래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5년부터 욥은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의 대판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일언 욥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궁벽한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때 전주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욥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바라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 나섰다. 전주 관장은 이일언 욥을 처음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력을 알아내고는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그는 비록 키가 작고 몸집도 보잘것이 없었지만, 신앙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내 보는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곳에 있던 박해자들은 “우리가 그의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했군.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이 분명하이.”라고 수군거렸다. 문초와 형벌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지만, 욥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관장은 사형 선고를 내린 후 그를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이후 욥은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에 의해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처형 장소로 가는 동안 욥은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들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

 

정태봉 바오로 (1796~1839년)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5촌 당숙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그는 관명이 ‘만보’였으나, ‘태봉’이라는 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바오로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때에 바오로는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다. 그러한 사이에 그의 마음에는 점차 순교 원의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는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태봉 바오로는 무모함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가 자주 집에 들른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는 이를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할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고, 이 사실을 깨달은 관장은 그를 옥에 투옥하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바오로는 이일언(욥),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바오로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천주께 감사를 드렸다. 이때 바오로는 자신의 마음이 심약한 것이 안심이 안되었으므로 처형 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옥졸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 바오로는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태봉은 요사하고 황탄한 말에 빠져 이를 깊이 믿었으며, 제사를 폐지하고 지내지 않았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병인박해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1801-1866)


일명 '계식'으로도 불리는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고 있었다.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원 5일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한재권 등과 체포되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로 순교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고 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했다.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 손선지 베드로(1820-1866)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성 한재권 요셉(1836-1866)


성 한재권 요셉은 태중 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나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박해로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 직책없이 교회 일에 충실했다. 1866년 12월 5일 한재권은 전라 감사의 명으로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에까지 찾아와 배교 할 것을 간청했으나 한재권은 "아버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교했다.

 

성 조화서 베드로(1815-1866, 농부, 병인박해 때 참수)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곧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다.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1864년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했고 아내가 사망하자 김 수산나와 재혼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전라 감사의 지시로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서 조화서는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하고 아들을 격려했고, 아들 윤호는 "저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하고 격려하며 부자가 서로 순교를 각오했다. 6, 7차의 신문을 아들과 함께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거부하고,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아들 윤호도 10일 후인 12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성 조윤호 요셉는 아들이다.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정원지 베드로, 성 조윤호 요셉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 이명서 베드로(1821-1866)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서는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 조화서 베드로, 성 정원지 베드로, 성 조윤호 요셉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 정원지 베드로(1846-1866)


일명 '원조'로도 불리는 성 정원지 베드로는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전주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 지방으로 이사했고,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화서가 체포되던 날인 1866년 12월 5일 정원지는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 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끌고 가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다. 지극한 효성 때문에 노모를 생각하고 여러 번 눈물을 흘리다가 함께 체포된 성지동 교우들의 위로와 권유로 끝까지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다. 드디어 12월 13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성 조화서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조윤호 요셉와 함께 체포되었다.

 

십자가의 길 제 1처

 

제 2처

 

제 3처

 

제 4처

 

제 5처

 

제 6처

 

제 7처

 

제 8처

 

제 9처

 

제 10처

 

제 11처

 

제 12처   

 

제 13처

 

제 14처  

 

카톨릭신학원

 

예수성심상

 

전주 카톨릭신학원

 

<신학원 지하 카톨릭 역사 전시판>

 

신학원 지하 전시판

 

한국 천주교회 창립

 

주어사

 

조선교구 설립

 

조선교구 설립   

 

유교와의 갈등

 

박해의 시작

 

순교자의 피

 

배론 신학교

 

 

김대건 신부  

 

개항과 신앙의 자유

 

명동성당 축성식

 

일제와 천주교

 

한국 천주교회

 

북한 천주교회

 

북한 덕원수도원

 

펑양 장충성당

 

현대 천주교회 

 

고마운 은인 오사현


숲정이에서 처형된 분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사람은 향리(鄕吏) 신분인 오사현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는 성지동과 인접한 유상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지동은 184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이었고, 대성동 신리골 역시 이 무렵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오사현은 이 두 마을이 신도들의 교우촌인줄을 모르고 지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에 사는 신도들은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생계를 근근히 이어가는 터라서 가난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도 일상 생활의 몸가짐은 누구나 본받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오사현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밀히 알아 본 결과 놀랍게도 나라가 금하고 있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이 비천하게 살면서도 훌륭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향리(鄕吏)의 신분으로 천주교도들을 관가에 고발해야 했지만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도 언젠가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내심 다짐하고는,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그는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교한 후 착실히 수계범절을 하다가 선종했다.) 그리고 평소 성지동에 사는 조화서 성인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오사현은 마음으로 아끼던 천주교도들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자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신도들을 구명하기 위해 전주 감영으로 찾아가 평소 친분이 있는 관원들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 날 방도가 없을까 물었다. 관원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당장 풀어줄 뿐 아니라 압수한 재물도 돌려주겠는데 저들이 막무가내로 죽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현은 신도들을 살려볼 요량으로 그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권고하기를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배교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자기들의 구명을 위해 애쓰는 오사현의 인정에 고마워하면서도 배교 하라는 말을 하려거든 다시는 옥에 나타나지 말라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신도들은 옥중에 있는 동안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교리를 토론했다. 이런 모습을 본 옥직이는,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매일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즐거워하니 도대체 네 놈들은 어떻게 된 놈들이냐' 하며 혀를 찼다. (입전에선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사현은 옥으로 신도들을 찾아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살아서 나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 우선 배교한다고 말하고 석방된 후에 다시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도들은 오사현에게, '우리와 무관한 당신이 우리를 구명하려고 하는 마음은 잊을 수 없이 감사한 일인데, 만약 우리가 이렇게 고마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보고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욕하지 않겠소? 이처럼 사람은 진실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 생각으로나마 거짓말을 품을 수 있겠소' 하고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사현만 아니라 영장(營長)도 처형 직전까지 여러번 설득했지만, 신도들은 끝까지 유혹을 물리치고 체포된지 여드레만인 1866년 12월 13일 참수당했다. 목격자 오순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들이 참수될 때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오사현과 그의 아들 오순보의 말은 이렇다.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처형장에 있던 거지들이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고 우루루 몰려 왔다. 오순보는 거지들을 쫓아내고 여섯 순교자의 머리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관졸들의 양해를 얻어 잘려진 머리를 각자의 몸에 차례대로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주었다. 그 후 군인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직했다. 삼일 후 순교자 가족들은 돈을 걷어 오사현에게 주면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오사현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만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와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갔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한 영장 이근섭과 교섭하여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섯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군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가에다가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무덤 앞에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 올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김사집 프란치스코 (1744-1802년)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金)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들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은 하나 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하고 돌아간지 얼마 안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프란치스코는 관장으로부터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매질을 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 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되어 프란치스코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신?망?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

 

◆ 순교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1839년)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래 아나스타시아는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더욱 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아나스타시아 부부는 다행히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피신한 곳에서 딸 이봉금(아나스타시아)을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때 그들 부부는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딸 아나스타시아는 첫 영성체를 하였다. 그녀의 가정에 다시 박해의 위협이 닥쳐온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밀고된 상황이었으므로 피신을 하기는 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 도착한 뒤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였으나, 어떠한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주를 배반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줄곧 거절하였으며, 이로 인해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옥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어느 날 아나스타시아는 딸 이봉금이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자, 짐짓 딸의 신앙을 의심하는 체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 그러자 딸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마침내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다시 곤장을 맞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아나스타시아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조이는 그 남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배웠고, 서양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 순교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 ? -1839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바오로)과 김조이(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들은 정해박해로 인해 피신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된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하나의 작은 천사였다. 그녀는 10살 때에 교리문답과 아침?저녁 기도를 배운 후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선교사는 그녀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그 마음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후 아나스타시아의 덕행과 신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프로타시아)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이내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서양 선교사가 간 곳을 묻자, 그녀는 나이가 어려 선교사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어요.”그러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려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그녀의 어머니가 아나스타시아의 신심을 의심하는 체하면서 “너는 틀림없이 배교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녀는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포졸과 옥리들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의 나이가 어린 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녀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또 이후로도 여러 차례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위협을 당하였지만,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아나스타시아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이제 의지할 데조차 없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천주 안에서 힘을 얻고 끝까지 자신의 영웅적인 결심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그러자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 순교자 심조이 바르바라 (1813-1839년)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토마스)와 결혼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루가)은 그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오자 바르바라는 그들을 헌신적으로 거두어 주었다. 그녀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는 눈치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심조이 바르바라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체포될 때나 문초를 받는 가운데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 나쁘고 체질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늘어놓은 형구를 볼 때나 관장들의 고함소리를 들을 때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이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천주를 위해 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두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바르바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바르바라에게 처형 때까지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형벌로 인한 고통에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예비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바르바라가 옥중에서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앞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심조이는 시아버지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배웠는데, 부부 사이의 정을 끊으면서까지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7년 동안이나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왔으니, 십자가 앞에서 서약한 것을 진실로 바꿀 수 없으며, 죽어도 (천주교를 믿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 순교자 오종례 야고보 (1821-1840년)


오종례(吳宗禮) 야고보는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로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야고보는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형과 다른 교우 여럿과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야고보는 관장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영장이 “너는 아직 젊은 나이니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섬기는 행복을 알고 있는데, 어찌 형벌이 두려워 천주를 배반하겠습니까?” 그러자 관장은 달콤한 말로는 그를 배교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고문을 하라고 지시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간 오종례 야고보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갖가지 형벌을 받았으나 꿋꿋하게 이를 참아낸 다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 전부터 원하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옥으로 돌아온 야고보는 다른 증거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그들은 여러 달 동안을 옥에 버려진 채 있었는데, 마침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사형 집행일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종례는 아주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이웃에게도 전교하였습니다. 또 입으로 십계를 외우면서 조상의 가르침을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다섯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으면서도 아주 큰 기쁨이 마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요망한 괴물을 청명한 세상에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 순교자 이조이 막달레나 (1808-1840년)


이조이(李召史) 막달레나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성한 뒤 그녀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을 하였으나 20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수계를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뒤부터 막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천주께서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두어 주신 것을 자주 감사하였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조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과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돌아온 뒤 막달레나는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 있는 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그녀는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에게 충실하여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이어 감사 앞으로 끌려가 형벌을 당하는 중에도 막달레나는 한결같이 굳센 마음을 나타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조이는 천주교 신앙을 신봉하여 천당 지옥설을 깊이 믿었으며, 죽은 남편의 훈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다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겠다고 하였으니, 그 독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또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고 하였으니, 지체없이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 순교자 최조이 바르바라 (1790-1840년)


최조이(崔召史) 바르바라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성한 뒤 바르바라는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곁에 홀로 남은 탓에 거북하기도 하였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결코 피로나 슬픔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또 1827년의 정해박해 때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후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하나마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최조이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평온한 마음으로 참아 받았다. 그런 다음 감사 앞으로 끌려가자, 1801년에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또 ‘자신의 시아버지 신태보는 올 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감사는 바르바라의 고백을 들은 후 ‘너는 죽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 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바르바라는 이후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녀의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최조이는 그 부친과 시아버지가 모두 천주교 신자로 흉악한 종자이며,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믿어 고질이 되었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가업으로 여기고, 형벌을 다반사(茶飯事)로 보니, 이는 죄를 끊임없이 저지르는 무리와 같습니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순교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1840년)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루가)은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프로타시오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또 장성한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후에는 부친과 같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프로타시오는 한 동안 냉담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으며, 이때부터는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려는 생각에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기도와 묵상 생활에도 열중하였다. 어떤 때는 너무나 오랫동안 꿇어앉아 기도를 한 탓에 걷기 어려울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또 일주일에 대재(大齋)를 세 차례나 지켰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자선을 베풀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프로타시오를 불러다 ‘이제 마음을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광주에서 살았다. 이로부터 7년 뒤인 1839년에 이르러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마음에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름으로써 이전에 잃은 기회를 다시 찾겠다는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다. 또 그는 피신해 다니는 여러 교우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그들을 한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러던 중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광주의 관장은 프로타시오에게 한 번 문초를 하고 나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로 이송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읍내의 주민들 3~4백 명이 나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 하면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괴로움으로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날부터 프로타시오는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밀고하는 것도 주님을 배반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였다.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전주 감사는 프로타시오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 후 조정으로부터 사형 판결이 내려오자, 감사는 다시 한 번 프로타시오를 불러내 유혹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 때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 권에 이르며, 수십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따라 프로타시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