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깃도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 기록을 남긴 사람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1481-1425 BCE)입니다. 투트모세 3세가 남긴 전쟁의 기록은 카르낙의 아문 신전에 남아있는데, 상세한 전쟁의 기록은 오늘날에도 전쟁 전술의 역사에서 꼭 한번 다루고 가는 소재라고 합니다.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평원이 아니라, 상대편이 예측하지 못한 협곡을 통해서 방어군의 허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최초의 전쟁 장소가 므깃도입니다. 가나안 땅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이스르엘 골짜기의 므깃도가 도대체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하길래, 므깃도가 역사의 첫 전장터가 되었을까요?
고대의 민족과 국가들은 예로부터 서로 교역을 하면서 문화를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의 것과 서로 바꾸는 교역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편히 이동할 수 있는 교역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수원지가 있어서 물을 공급받기 수월하던가, 넓은 농토가 있어서 식량을 공급받기도 편해야하고, 왕래하는 길의 지형상의 편이함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 길에 중요한 도시들이 있어서 목적지까지 오가는 길에 크고 작은 상거래도 있으면 그야말로 제격입니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곳이 바로 므깃도 입니다. 그래서 므깃도는 기원전 6,000년 부터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살면서 농사도 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상거래의 터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므깃도는 히타이트 제국이 있었던 오늘날의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오가는 해안길(Via Maris)이 지나는 길목이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지나가는 곳이기도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해안길로 가든지, 중앙산지 길로 가든지, 또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가든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므깃도는 반드시 거쳐야가하는 교통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러니, 므깃도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나라들 그리고 히타이트 제국의 교차로이며 관문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중요성을 이미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알아챘습니다. 그리고는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이 천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과 같다고 천명하고 기원전 15세기에 역사에 기록할 만한 첫 국제전을 치룬 것입니다.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은 제국의 교역로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길을 소유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오가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관리하며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고대 제국의 왕들이 이 길에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실질적인 관리 도시인 므깃도는 가장 얻고 싶은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므깃도의 전술상의 중요성 때문에 성경에도 므깃도와 관련된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에 므깃도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은 물론이고(수 12:21), 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전쟁에서도 므깃도 앞의 평원과 물가들은 주요한 전장터였습니다(삿 5:19).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아들이자 당시 왕이었던 요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나봇의 포도원 터에서 죽일 때에 함께 있었던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예후를 피해서 도망하다 죽은 곳이 므깃도이기도 합니다(왕하 9:2).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요시아가 이집트 파라오 느고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곳도 므깃도이지요(왕하 23:29).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처럼 이 곳의 중요성을 간파한 솔로몬은이곳에 오늘날의 기갑부대라 말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주둔지로 병거성을 쌓았습니다(왕상 9:15), 그도 그럴 것이 므깃도가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적들에게 빼앗길 경우, 사마리아 지역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므깃도의 무장과 방어에 공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아합 때에는 므깃도를 더욱 요새화 시켰습니다. 방어에 용의하도록 수로 공사를 했고, 이곳 저곳에 현재 발굴된 것만으로도 450필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17개의 마굿간들을 만들어서 전략적인 방어요새이자, 병거성으로 체계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이곳 므깃도와 므깃도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빼았겼을 경우, 왕국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므깃도가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서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전쟁의 패배는 곧 왕국의 멸망, 그리고 성전의 파괴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609년 요시아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왕국은 급격히 쇠토하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왕국이 무너졌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던 므깃도, 그리고 왕국과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던 므깃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이야기는 나중에 요한에게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으로 선과 악이 겨루는 전장의 모티브가 됩니다. 므깃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요한의 편지를 받아보며, 아마겟돈에서 벌어질 전쟁의 예언을 읽으면서, 피 비린내 나는 전장터인 므깃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으리만치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했던 그 땅을 말입니다.
므깃도(아마겟돈), 2005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성경지구로 알려진 므깃도, 하솔, 브엘세바는 오늘날 이스라엘에 위치한 고대도시유적으로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도시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도시들이자, 고대 근동의 중요한 무역로의 일부였던 성경지구는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므깃도는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삿 1:27 ~ 28), 아마도 다윗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깃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방 요새가 되었다(왕상 9:15-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깃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BC 609년에 요시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8-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므깃도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유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체 올라가는 길
텔 므깃도 박물관
텔 므깃도는 고대 근동 세계에 있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제국 사이에 대치점이라 할 수 있다. 므깃도는 수 천년 동안 공포와 두려움의 이름으로 사람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지중해 해변에서 이스르엘 평원으로 접근하는 좁은 길에 걸터 앉아있는 므깃도 성은 그 성의 주권자에게 나일과 유프라테스를 잇는 국제해안도로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주었다. 국제해안도로는 대상들이 오가는 무역로였는데 므깃도는 그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므깃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주전 6천년기에 도착하여 신석기 시대를 이루며 살았다. 이 시기에 바위 위에 긁어서 그린 인간의 모습은 이 첫 번째 정착민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으며 제의적 혹은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금석 병용기의 초기인 주전 4천년기까지는 므깃도의 주민들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실체 속으로 병합되기 시작했다. 좀 더 후기인 초기 청동기 시대의 출발점에서(약 주전 3300년) 므깃도의 신전들 중에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이른 신전이 그곳에 세워졌다. 이 시기가 보여주는 것은 므깃도가 처음으로 국제적인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원통형 도장이 인쇄된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와의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3천년기의 끝은 정착을 위한 건설의 시대였다. 거대한 성벽이 이 때 세워졌다. 므깃도의 유명한 제단이 있었는데 높이 1.5m의 원형 돌 구조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희생제사로 사용되었던 단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세기들(centuries)에서 적어도 세 개의 신전이 제단으로 신성시된 지역과 확장된 지역에 더 세워졌다.
므깃도 성문 터
성벽 유적
정상 오르는 길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곡물저장소
곡물저장소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 유적지
솔로몬의 마병장
솔로몬의 마병장
솔로몬의 마병장
므깃도 유적지
므깃도에서 바라보는 이즈르엘 평원
므깃도에서 바라보는 이즈르엘 평원
지하수로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의 발견이다. 지하 수로는 지하 35m에 200m 터널로 이루어져 있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입구 내려가는 계단
지하수로 입구
내부 계단
지하 수로
수로 통로
지하 수로 샘 근원지
지하 수로 설계도, 좌편 끝이 출구이다.
출구
출구
출구 문
<므깃도 전시실>
므깃도 모형도
므깃도 모형도
므깃도 모형도
모형물
모형물
모형물
신전
므깃도 지도
해변의 길과 국제무역도로의 접촉지점으로서의 므깃도
므깃도 발굴 사진
므깃도 발굴 사진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나사렛 성 요셉기념교회 ( St. Joseph church ) (0) | 2013.03.06 |
---|---|
야드바쉠 홀로코스트[Yad Vashem Holocaust] 기념관 (예루살렘) (0) | 2013.03.06 |
베드로 수위권교회 (St. Peter Church, Mensa Domini) (0) | 2013.03.06 |
막달라 마리아교회 (The Russian Church of St. Mary Magdalene , 예루살렘) (0) | 2013.03.06 |
눈물교회 (Dominus Flevit, 예루살렘 기드론골짜기) (0) | 2013.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