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되재공소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2구 되재마을), 고산성당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7. 19:18

본문

 

 

되재공소, 2009년 복원 모습     (이하 사진출처- http://cafe.daum.net/Coreansanctus)


전주교구 고산성당 되재공소는 1895년 건립되었다.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완공된 성당이자 최초의 한옥성당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 지역은 약 50여개의 교우촌이 있었고 순교자도 약 110여명 나왔다. 순교자 중에는 천호성지에 묻힌 순교성인 4명인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 등이 있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다.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 성당의 역사는 1893년 4월 비에모(Vellemot, 禹一模, 1869~1950, 바오로) 신부가 차돌박이(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는 다음해 초 거처를 되재(화산면 승치리)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1895년 되재성당이 완공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 뮈텔 주교에 의해 축복식이 거행 되었다. 1895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비에모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한 때 400명의 교우가 모였던 큰 성당이었다. 1906년에는 신성학교를 세워 신자와 주민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신성학교를 태극계명학교로 개명하고 4년제로 개편하고 한글, 한문, 수학, 물리, 역사, 지리, 화학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1940년 경제난으로 폐교했다. 또한 1908년에 태극 계명 측량강습소를 설립 측량기술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 성당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어 1954년 되재공소 건물을 세웠다. 되재성당은 바실리카식 교회건축양식을 한식 목구조로 변형한 단층 건물로 새로운 문화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는 한옥성당이다. 기와를 얹은 팔작 지붕집이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종축상에 제단과 출입구를 배치하여 제단으로 향하는 공간의 깊이를 확보하였다. 성당의 본래 모습은 제8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일기와 사진자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96년 피정의 집을 세웠고, 성당 뒤편에는 이곳에서 사목했던 조스 신부(1851-1886)와 라푸르카트 신부(1860-1888의 묘소가 단장되었다. 되재성당은 2009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되재(升峙)’라는 명칭은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자리 잡은 고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2004년 7월 30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비에모(Villemot) 신부


비에모(1869∼1950, 禹一模) 바오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사제품을 받은 뒤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해 6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1893년 전라도 고산의 차돌박이를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 전교하였고, 1894년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전교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서울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전라도 지방의 모교회(母校會)격인 고산 되재(升峙) 본당을 신설, 건축하고 1898년까지 사목했다. 1898년부터 1916년까지 서울교구 당가(재정부장) 신부로 서울교구의 재정 문제를 담당하고,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 주임 신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 성당주임 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부터 노령으로 일선 사목을 떠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해 7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 사절 번(Byrne) 주교,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주교 등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만포(滿浦)에서 중강진(中江鎭)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하였다.

 

1895년에 세워진 옛 성당 모습

 

성당의 본래 모습은 제8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일기와 사진자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되재공소

 

되재공소 

 

종탑

 

복원된 공소 내부

 

제대

 

제대

 

입구

 

 이곳에서 사목했던 조스 신부(1851-1886)와 라푸르카트 신부(1860-1888)의 묘소

 

조스 신부(오른쪽, 1851-1886)와 라푸르카트 신부(왼쪽, 1860-1888)의 묘소


되재 공소 강당 뒤편에는 되재 성당 설립 이전에 고산 지역에서 사목했던 조스(Josse, 趙, 1851~1886, 세자 요한) 신부와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亨묵, 1860~1888, 아르날도) 신부 묘소가 있다. 프랑스인 조스 신부는 1883년 1월 서울에 도착, 1884년 9월에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과로와 열병으로 안대동 공소에서 판공 성사를 주는  중에 사망하였다. 라푸르카드 신부도 프랑스인으로 1887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그해 봄에 고산 얼음골에 부임하였으며, 1888년 2월 고산 빼재(수티)로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같은 해 7월 11일 과로와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1984년 12월 7일 공소 강당 뒤편에 있는 두 신부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글- http://paxkorea.kr/)

 

라푸르카트 신부(1860-1888) 묘소

 

조스 신부(1851-1886) 묘소 

 

 약도   (출처- http://paxkorea.kr/)

 

<고산성당>

 

고산성당         (출처- blog.daum.net/kghee31/11735826 )  

 

전북 완주군 고산 지방은 한국 천주교 창립과 더불어 형성된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어 우리 믿음의 고향과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고산은 전주시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다. 고산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이지만, 그 모태는 1893년에 설립된 되재본당이다. 고산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이다. 고산 지역은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저구리ㆍ넓은바위ㆍ다리실(천호)ㆍ차돌박이(백석)ㆍ석장리ㆍ되재 등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현재 천호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베드로)ㆍ손선지(베드로)ㆍ정문호(바르톨로메오)ㆍ한재권(요셉) 등 순교성인 4위와 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다. 또 한국전쟁 당시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창궐한 빨치산에 의해 순교한 신자들도 상당수 있다. 고산출신 성직자로는 이약슬ㆍ이종필ㆍ허일옥ㆍ김종택ㆍ김순태ㆍ경규봉ㆍ강명구ㆍ장상원ㆍ김광태 신부 등 9명이 있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고산 지역에서는 성당이 세워지는데 1895년에 완공된 '되재성당'이다. 되재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성당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성당을 지을 때 화엄사와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되재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그러나 되재성당터는 지난해 7월30일자로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현 고산성당은 본당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1994년에 완공했다. 성당 외관은 한옥과 교회의 전통 건축양식인 바실리카 형식을 절충한 건물로 장방형에 종탑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고산성당을 설계한 김승배(단국대 종교건축연구실)씨는 "옛 되재성당이 보여주었던 교회 건축의 토착화 의지를 계승해 설계했으나 복고적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뿐 아니라 성미술ㆍ조명ㆍ설비 등 모두가 복음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고산성당은 우선 해발 55m 언덕에 자리한 지리적 공간미를 잘 살리고 있다. 사방에서 보이는 위치에 종탑을 배치해 놓았고, 성당 전면에 넓은 광장을 두어 남서쪽 원경과 북동쪽 수려한 근경을 그대로 살려 주변 자연환경과 성당 건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출처- 평화신문 리길재 기자teotokos@pbc.co.kr)

 

고산성당         (출처- cafe.daum.net/photoino)

 

고산성당

 

고산성당

 

고산성당

 

헌당문

 

성모동산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cumorningsta)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제대 벽면에 '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조광호(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 작품이다. 벽화는 무명 순교자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고백을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19개 계단(지상의 12계단과 천상의 7계단)이 있고, 계단 양편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천상의 붉은 빛 십자가는 한국 순교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형구에 나 있는 7개 구멍은 7성사를 상징한다. 또 좌우 생명의 나무는 고산지방의 특산물이요 우리 농촌을 상징하는 감나무로 땅과 농촌이 우리 삶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당 네 면의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유리화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왼쪽 유리화는'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과 기적의 빵과 물고기로 나타내고 있다. 제대 정면 2층 성가대석 뒷편에 있는 7개 유리화 창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데 청색 주조에 붉은 색을 대담하게 배열해 강렬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제대 앞 면에는 성부의 '손'과 성자의 '십자가',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와 함께 삼위일체의 상징인 삼각형이 양각돼 있으며 제대 좌우로 'A'(알파)와 'Ω'(오메가)가 부조돼 있다. 이태주 신부는 "지난 2년 동안 54명의 장례미사를 거행할 만큼 본당 신자들이 고령화돼 유구한 신앙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해 안타깝다"며 "올해 되재성당터 복원공사를 본격화해 옛 교우촌 전통을 이어가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출처- 평화신문 리길재 기자teotokos@pbc.co.kr)

 

제대 오른쪽 유리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유리화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