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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현덕면 전 현덕면장 정우범 영세불망비

배성수설교

by baesungsoo 2016. 5. 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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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현덕면장 정우범 영세불망비


정우범鄭雨范(생몰미상)

 

본관은 동래東萊. 창원공昌原公 광보光輔의 후손으로 현덕면 황산리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이 능통했고 보성전문을 나온 후 일본으로 유학 명치대학을 졸업 후 귀국해서 는 고향인 본가에 은거하면서 법률서적의 저서에 힘써왔다. 왜경倭警은 그의 항일사상이 강렬함을 느끼고 요시찰적 대상인물로 보고 늘 감시해 왔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식민 지화 정책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도모한 바 있다. 경기도 평의원직을 역임했 고 해방직후 현덕면장을 지냈다. 사후 현덕면 사무소 내에 주민들이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1. 1920년대 면협의회원 및 도평의회원 선거


1919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기만적이긴 하지만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에 제한적 참정권을 부여해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호도하고자 했다.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은 1920년 말 자문기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방제도 개정을 단행했다. “공공단체의 자치에 의해 지방을 개발한다는 취지 아래 지방자치를 실시하기 위한 예비 단계라고 선전했다.
1920년 지방제도 개정의 주요 내용은 부·면협의회 및 도평의회 등 지방의회의 설치, 지방선거 실시, 학교평의회 설치였다. 지방의회와 학교평의회는 의결 권한이 없는 자문기관 으로서 제한적이었다. 면협의회원의 선거·피선거·임명권의 범위는 면부과금 5원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으로 제한됐다. 보통면의 경우 선거가 아니라 군수 또는 도사島司의 임명 으로 면협의회가 구성됐다.
면협의회는 면장의 자문기관으로 면에서 처리하는 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면협의회는 명예직이며 직무의 성질 상 이를 전무직專務職이 아니고생활의 기초인 본업이 있으면서 공무를 담임하는 자이다. 급료를 받지 않으며 직무로 인한 비용은 변상받을 수 있다. 협의내용은 도로·교량·관개, 농업·임업 등 산업개량·위생·소방·수방 등에 관한 사항이 었다. 학교조합과 학교비學校費는 별도로 운영돼 교육 사업은 면의 업무에서 제외됐다.
1920년대 면협의회원 선거는 임기 3년으로 1920, 1923, 1926, 1929년에 각각 실시됐다. 면협의회원 선거는 먼저 면사무소에서 선거인명부를 작성하고 1주일간 열람하게 했다. 면협의회원 후보자를 각 마을에 할당하기도 했다. 선거는 선거입회인이 참석해 진행됐다.
1920년의 면협의회원 선거는 11월에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진위군 지역의 각 면협의회선거 현황은 매일신보19201127일자에 오성면협의회원 당선자 현황이 보도된 것 으로 보아 진위군 지역에서도 192011월경에 협의회원 선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성면협의회원 당선자는김대경金大經·노재협盧載浹·변사진卞師鎭·최기홍崔基弘·조성근趙成根정기창鄭基昌서규석徐圭錫조병석趙炳奭최건식崔健植·한용직韓用直* 등이었다.(*1923년 재선) 이후 1920년대 진위군 지역의 면협의회원 선거의 경우 1923년에 실시된 선거 당선자 현황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진위군 각 면협의회 회원 당선자 현황]6)

 

지역

면협의회원 당선자(104)

병남면

柳昌根 石川耐藏 李河善 久原豊 林元圭 金根培 崔泰卿 安鍾喆 權鍾台 李元承 (10)

송탄면

洪學裕 朴樹勳 洪承赫 嚴奎永 車相建 元濟東 宋鍾錄 李達榮 李承鍾 韓鴻履 (10)

북면

禹鍾哲 鄭鍾寅 李殷榮 梁柱元 權榮植 洪九連 全在喆 朴昌勳 李容範 李圭哲 (10)

서탄면

韓元敎 金大熙 崔承舜 趙英柱 車鍾完 金炳威 柳寅暢 黃魯烈 (8)

고덕면

玄永基 安在鳳 吳春根 黃魯聖 崔基昇 沈宜剛 文武爕 朴昌鎬 趙光喆 金學載 (10)

오성면

趙成根 趙炳奭 金郁培 鄭時昌 韓用直 徐圭錫 韓麟敎 鄭基昌 韓昇錫 金顯榮 (10)

청북면

崔基玉 李圭鳳 金華植 梁在根 金學習 朴承洙 金德秀 申慶休 朴士彬 朴大鎭 (10)

포승면

孫相敦 李有相 崔基昇 李薄淵 朴敎陽 李敏和 李源玉 李源緖 兪鎭圭 趙吉九 (10)

현덕면

孔榮烈 崔禹相 李昌秀 李敏星 李根昶 李康浩 尹鳳漢 鄭雨範 申鉉燾 林容肅 (10)

서면

張南鎭 元之性 姜蘭秀 張世直 安基濬 盧元章 朴世輔 方菊栽 (8)

부용면

李德三 吳春三 朴炳壎 崔鎭 李起鎬 鄭俊根 金用肅 方雨栽 (8)


 

1923년 진위군 지역의 면협의회의원 선거 결과 병남면 10, 송탄면 10, 북면 10, 서탄면 8, 고덕면 10, 오성면 10, 청북면 10, 포승면 10, 현덕면 10, 서면 8 , 부용면 8명 등 모두 104명의 면협의회원이 당선됐다. 평택역이 있는 병남면의 경우 일본인 거주자들이 많아 2명의 일본인이 면협의회원에 당선됐다.


2. 1920년대 평택지역의 도평회원 선거 현황
19201210일 첫 번째 도평의회 선거가 있었고 192312월 두 번째 선거가 실시됐다. 도평의회원 가운데 2/3는 부·면협의회원들의 선거를 거쳐 도지사가 임명한 민선의원 이었고 1/3은 도지사가 직접 임명한 관선의원이었다. 민선의원의 경우 조선인이 90% 내외였고, 관선의원은 조선인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일본인이 많았다. 지역에서는 주로 일본인이 선출됐는데, 지역에서는 유권자인 면협의회원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조선인이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됐다 1920년에 시행된 도평의회원 선거에서 진위군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정우흥鄭雨興이다.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정우흥은 1878년생으로 수원군 안중면 안중리 출신이다. 관립한어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 부교관이 됐다가 육군무관학교와 법관양 성소를 졸업했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헌병대 편제가 폐지될 때까지 군법회의 판사, 육 군헌병 참위 등을 지냈다. 정우흥이 언제부터 평택지역으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진위군 도평의회원으로 활동했고, 1927년 안중금융조합장, 1930년 동아일보 평택지국 고문을 지냈다. 이 외에 1936심복사중수기를 집필했고, 심복사의 능인전能仁殿현판을 직접 썼다고 한다 정우흥에 이어 유창근柳昌根192441일부로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 임명됐다.유택근의 성장과정과 학력은 알 수 없고 1920년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평택분국장에 임명돼 재직 중에 공진회의 일본 대분현大分縣 시찰단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1년 평택청년체육구락부 부장, 1923년 은평강습회 학부형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311월 병남면 협의회원에 당선됐다. 1924년 도평의회원에 당선된 이후 병남면장, 동아일보사 평택지국장을 맡다가 19271115일 평택역 앞 자택에서 사망했다. 1117일 진위청년회 및 관 공청官公廳 10여 단체와 기타 유지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식을 거행했다.
1927년 지방선거에서는 정우범鄭雨范이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됐다. 그는 1923년 현덕면협의회원에 당선된 후 19281933년까지 현덕면장을 지냈다. 현덕면장 재직 중에 19281116일자로 소화 대례기념장, 1932101일자로 일본 상훈국으로부터소화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03월 지방선거에서는 박원용과 한필호韓弼鎬가 입후보해 43표를 획득한 박원용이 40표를 얻은 한필호를 제치고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됐다. 박원용은 19151920년 진위군 군서기, 19211922년 진위군 군속, 19231928년 부용면장, 1929년 평택금융조합 조합장, 19291930년 병남면장 등을 역임하고 193041일자로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 임명됐다.10)19311933년 평택면장을 지내다가 19334월 면장에서 해임됐다.11) 19331938년 진위군 팽성면장(8), 1939년 평택군 팽성면장을 지냈다.12)194059일 팽성면장 박원용이 주임관대우의 거물면장직을 그만두었다.

 

3. 평택곡물협회 제칠회 정기총회   


평택곡물협회 제칠회 정기총회는 지난 이십사일 오후 한시에 동 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회장으로부터 개회사가 끝난 다음 결산보고가 있었고, 역원을 투표 선거하였는데, 회장 이민훤(會長 李敏煊) 씨는 재임되었고 역원 전부는 아래와 같이 선거하였다고 한다(하략)”(조선일보, 1939428) 곡물협회의 기원은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로 일본인이 중심이 돼 미곡시장을 장악해나갔으며, 미곡유통 구조를 식민지적으로 재편하기 위해 일본은 1903인천곡물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여타 지역에서도 곡물협회가 조직됐다. 일제강점기 곡물협회는 조선의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가 중심이 돼 미가 하락, 미곡 유통을 위해 조직된 이익단체였다. 때문에 자신들의 미곡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의 피해를 줄이고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일제의 전기체제기 되면서 조선총독부가 조선미 통제를 본격화하자 지역의 곡물협회는 연합해 19349조선곡물협회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미곡 이출을 제약하는 곡물 검사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총독부의 미곡 통제와 곡물 검사 개선책을 제기했다. 그러나 1939년 이후 식량 통제가 실시되면서 연합회는 해산됐다. 평택은 일제강점기 미곡 생산지뿐만 아니라 유통지로서도 유명했다. 평택곡물협회의 설립은 언제였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19394월에 7회째 정기총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아 19324월에 설립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424일 개최한 정기총회에서는 결산보고 등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임원진 선거였다. 회장에는 이민훤, 부회장에는 신순호와 정우범이 각각 선임됐다. 이들은 평택의 유지들이었는데, 활동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민훤은 평택금융조합 이사·평택합동운수 이사·동아일보 평택지국 고문·진청학원 원장, 신순호는 평택합동운수 이사·평택산업 이사,

정우범은 평택금융조합 이사·안중금융조합 이사·현덕면장 등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생활이 어려운 빈민구제에도 적극 참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밖에 평택곡물협회에 참여한 인물로는 이하선(李河善), 조성하(趙成河), 윤응구(尹應九), 이홍식(李洪植), 김정수(金正洙), 김사순(金思淳), 이민응(李敏膺), 방준용(方俊容)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은 지자치단체인 군()의 하부 행정구역이다. 면은 조선시대에 전농관(典農官)의 지역 배치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사(), (), (), ()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면은 5~10개의 동리가 모여 하나의 면이 형성됐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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