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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아펜젤러 (Appenzeller, Henry Gerhart)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1. 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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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년 2월 6일~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추모비는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 12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는 1884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해외선교부(총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 2 27일 아라빅호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1885년 4월 5 미츠비시 배편으로 부산을 경유 인천에 그의 부인과 함께 도착했다. 이 때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첫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등 우리 나라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미국 공사(G. C. Foulk)의 권유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H. G. 아펜젤러 선교사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배재학당의 창설(1886. 6. 8)을 예시할 수 있다. 배재(培材)학교는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 일본인 4,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성서 번역에 공적이 큰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1858-1902)

 

1858년 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 (Souderton, P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을 따라 독일 개혁교회인 임마누엘 레이디스 처치(Immanuel Leidy’s Church)에 출석했다. 아버지가 유아세례를 믿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재세례파였기에 헨리 아펜젤러는 14살이 되던 해인 1872118일 출석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4] 웨스트체스터 주립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녔다. 마침내 1876101, 웨스트체스터 장로교회에서 회심하였는데 '영적으로 거듭난 날'로 평생 기억하였다. 이후 델라웨어 카운티 공립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후에 대한제국 고종이 아펜젤러의 교육선교를 신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헨리는 아버지의 지원으로 독일 개혁교회 신학교인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Franklin and Marshall College)1878년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회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영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점차 개혁교회보다 훨씬 편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고민 끝에 1879421일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를 출석하며 감리교로 적을 옮겼다. 대학에서는 그리스어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어와 히브리어, 코이네 그리스어도 수학했다. 괴테 문학 동아리 회장을 맡기도 했다.

(신학을 시작하다)

헨리 아펜젤러는 필라델피아 연회에서 전도사 안수를 받고,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잠시 일을 시작하였다.[4] 1881219일에는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1882년에 뉴저지주의 메디슨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했다.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은 2학년인 1883년에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The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을 참석하며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선교사가 되고자 했는데, 한국선교를 준비하던 친구 워즈워스(Wadsworth)가 중병에 걸려 한국선교를 갈 수 없게 되자 그 대신 한국으로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또 같은 해에 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제4회 전국신학생 선교대회에 드류신학교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조선으로 선교를 결심했던 것에 반해, 감리회 선교국에서는 아펜젤러를 파송하는 것에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선교를 위해 2,000달러를 희사한 가우처 목사는 경력이 있는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리회 본부에서 중국 및 조선 파송 선교사에 대한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찰스 파울러 감독이 아펜젤러를 변호하여, 결국 가우처 목사를 설득해 아펜젤러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이후 1884년 12월 17일에는 엘라 닷지(Ella J. Dodge)와 모교회인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조선 선교를 시작하기까지)

아펜젤러는 1885114일 드류대학교에서 파송예배를 받아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22일에 자신을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도록 힘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고, 이튿날 아내와 함께 아라빅호(S. S. Arabic)에 승선하였다. 아라빅호에는 윌리엄 스크랜턴과 그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동승했다. 이들은 227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했다. 요코하마에서는 35일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 선교사가 야오야마 에이와 학원(英和學院)에서 개최한 제1회 한국선교사회에 창립멤버로 참석하였다. 여기에는 매클레이 부부, 스크랜턴 부부, 메리 스크랜턴, 아펜젤러 부부, 그리고 박영효와 이수정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323일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고베를 경유하고 328일에 나가사키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331일 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같은 날, 감리회 본부는 조선선교부 감리사에 매클레이를, 부감리사에 아펜젤러를, 선교부 회계에 스크랜턴을 임명했다. 부산은 42일 아침에 도착했고, 하루를 머물러 43일에 부산을 출발해 인천 제물포항을 향했다. 마침내 부활주일인 188545,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에 발을 디뎠다. 아펜젤러 부부는 대불호텔에 도착했는데, 당시 주한미국공사대리였던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아펜젤러 부부의 입국을 만류했다. 갑신정변 직후라 정국이 불안하고 임신한 여성이 생활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했고, 아펜젤러는 포크의 조언을 받아들여 짐은 그대로 두고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729일에 서울에 들어와 첫 예배를 보았다. 입국후 아펜젤러 부인은 1885119일에 딸 앨리스를 서울에서 순산했다. 이 아기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로 알려져 있다.

(사역 활동)

1.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학생들

188583일부터 청년을 모아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다음해인 1886년에 인원이 점차 증가하여 20명이 넘어서자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과 함께 현판을 하사하였다. 18851011일 사저에서 드린 성찬 예배를 시작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점차 참석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18879월에 좀 더 큰 공간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옮겼다. 이것이 훗날 정동제일교회가 되었다. 1891년에는 인천지역 성도들을 위해 인천 중구 내동에 내리교회도 설립했다. 한국에 성서 번역부가 생기자 언더우드, 게일 등과 함께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 보라달로마인셔 등 성서의 국역에 참여하였다. 교육 방식을 암기보다는 판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고치는 데 공헌하였다.

(사망)

190244세가 되던 해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일본배인 구마가와마루와 같은 회사소속인 기소가와마루가 어청도 서북방 2-3해리 지역에서 충돌해 구마가와마루가 침몰하면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지는 가묘이다. 시신은 아직 여학생과 조사 조한규와 함께 어청도 바다 밑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들인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 1889~1953)도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아펜젤러가 공부한 마셜대학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아펜젤러가 다녔던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는 겉으로 볼 때 평범해 보이는 교회는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크고 아늑했다. 젊고 영적인 아펜젤러는 같은 랭카스터에 있는 마셜 대학을 다니면서 이 교회에서 미래의 꿈을 키웠다. 그는 특히 이 교회에서 영적인 생명력 있는 작은 모임(감리교회는 그것을 이라고 부른다)을 통해 선교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했다. 그가 한국에 오기 6년 전인 1879년이었다.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신학교에 입학했고, 잠시 이 교회에서 전도사 일도 했다. 그가 언제부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1883년 그가 신학교 2학년 때 열린 신학교 선교사 연맹 세미나가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때 그는 일본 선교를 결심했는데, 때마침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친구 워즈워스가 중병에 걸려 자기 대신 한국에 가 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게 되었다. 하마터면 불발로 그칠 한국 선교를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건져내셨다. 놀랍게도 교회 안에 들어가자 아펜젤러 기념예배실이 준비돼 있었다. 2010, 정동감리교회가 자신들의 교회를 설립해 준 아펜젤러에 대한 감사로 이 채플을 봉헌했다고 한다. 이 교회가 1802년 설립되었으니 아펜젤러가 한국에 올 때도 이미 80년이 됐고, 그가 죽은 지도 120(190244세로 별세)이 됐으니 의인의 죽음은 예수님 말씀대로 시간이 지나도 한 알의 밀알처럼, 한 여인의 향유처럼 오랫동안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인지 모른다.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예배실.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아펜젤러 기념관 내부.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아펜젤러 기념관 내부.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아펜젤러 기념관 내부.  (출처- 가우처, 언더우드, 아펜젤러… 기막힌 섭리로 한국 온 첫 선교사들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1880년대 제물포항,  (출처- 순천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의 제물포 상륙을 묘사한 인천의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탑.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성경번역 위원 (아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언더우드 등)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와 번역위원들이 가장 중시한 것은 기도였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 간구했다. 선교사들의 거취에 따라 번역위원들의 면면이 다소 달라졌다. 언더우드 외에 북감리교 선교사들인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존스, 북장로교 선교사 피터스와 게일,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 등이 공헌을 했다. 한국인으로는 김정삼 이원모 이승두 등이 한국어 성경 번역위원으로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어학적 재능과 학습 집중력이 뛰어나 한국에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어를 구사했고, 피터스는 그 자신이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게일은 한글과 한문에 조예가 깊어 한국 고전 문학작품들을 영역하고 천로역정 등을 한역했다. 레이놀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서 뛰어난 히브리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735353

 

 

<양화진 아펜젤러 가묘와 추모비>

아펜젤러 가족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선교사 추모비, 가묘

아펜젤러 추모비 후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아펜젤러 추모비 전면 (배재학당 총동창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아펜젤러 추모비 전면 (배재학당 총동창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1. 배재학당>

배재학당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1858- 1902) 목사가 설립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이다.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고종황제가 배재학당 설립을 재가하고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하사하였다.

옛 배재학당

1889년 배재학당 학생들 (출처- 종교교회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출처- http://blog.naver.com/j4274247/10048339621)

 

2001 3 1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된 건물로 한국 근대 교육적 의미가 크며 한국 근대 건축으로서 그 형식이 우수하다. 건물의 구조와 창문, 외장 및 벽돌 구조가 뛰어나며 정면의 현관(玄關)과 양쪽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原形)이 대체로 남아 있고 건물의 형태가 우수하여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 된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배재고등학교 동관으로 불렸다. 2008 7 24일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1), 기획전시관(2), 체험교실(1), 세마나 실(3)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을 재현한 체험관이 있고, 전시관에는 이 학교 졸업생인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있는 서유견문록, 1885년 최초에 사용된 벽돌, 고종이 하사한 현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배재를 빛낸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등 유물들이 있다. 2층 전시관에는 아펜젤러가()의 귀중한 유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신교육의 태동 배재학당

1885년 배재학당 설립

아펜젤러 문화훈장증, 훈장(국민장)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추서하였다

아펜젤러의 성경책(1897)

 

아펜젤러가 생전에 쓰던 성경으로 그의 자손이(리차드 다지 아펜젤러) 배재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증하였다.

 

<2. 서울 정동제일교회>

현재 정동제일교회(중앙), 문화재 예배당(구 정동제일교회, 우)   (출처- 정동 제일교회 – RPGKOREA)

문화재 예배당(구 정동제일교회)   (출처- 정동 제일교회 – RPGKOREA)

1897년 10월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 '정동제일교회' 

교회내부  (출처- 정동 제일교회 – RPGKOREA)

 

(교회연혁)

1885.4.5.  아펜젤러(H.G. Appenzeller)목사,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제물포에 도착

1885.7.29  아펜젤러 목사가 정동에 사저를 마련하고 선교활동 시작

1885.8.3  아펜젤러 목사가 사저에서 영어교육 시작(후에 배재학당으로 발전)

1885.9. 메리 스크랜튼(M.F.Scranton) 선교사의 아들 스크랜튼(W.B.Scranton) 선교사가 정동 사저에서 의료선교 시작

1885.10.11  아펜젤러 목사의 집례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찬식 거행(정동제일교회의 창립일)

1886.5.31   메리 스크랜튼(M.F.Scranton) 선교사가 여성교육 시작(후에 이화학당으로 발전)

1887.7.24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세례식 거행(세례자 : 박중상)

1887.9.  남대문안 근처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처소 마련(벧엘예배당, Bethel Chapel이라 명명)

1887.10.16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개신교 최초로 여성에게 세례식 거행(세례자 : 최씨 부인)

1887.11.  예배처를 인근 한옥으로 이전

1888.1.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주일학교 시작

1888.3.11  한국 개신교 최초의 남성주일학교 시작

1888.4.28  조선 정부의 기독교 선교 금지령으로 예배처 폐쇄

1888.  올링거(F.Ohlinger) 목사가 문서선교의 활성화를 위해 삼문출판사 설립

1889.2.12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교회(속회) 조직

1889.12.7  한국 감리교 최초의 계삭회(구역회) 조직

1895.9.9  정동제일교회 예배당(현 벧엘예배당) 정초식 거행(언더우드 목사, 법무대신 서광범, 외무협판 윤치호 등 참석)

1897.10.31  엡청년회 조직1897.12.26벧엘예배당(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 봉헌 예배

 

<정동제일교회 역사 기념관>

역사기념관   (출처- 정동제일교회 역사기념관)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입니다. 1897년 지어진 벧엘예배당은 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세기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으로 심겨진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정동제일교회 역사기념관이 2023년 11월 12일에 개관되었습니다.

아펜젤러 동상 (서울 정동제일교회 )

아펜젤러 동상 (서울 정동제일교회)

 

<3. 인천내리교회>

제물 포웨슬리 예배당 복원(인천 내리교회), 2012.09.23, 이길극 촬영       (출처- http://www.kmc.or.kr/)

 

왼쪽은 <아펜젤러 비젼센터>이고, 아펜젤러비젼센터 서쪽길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 쪽에는 이번에 헌당감사예배에 드려지는 <목자관>이 있다. 가운데는 111년 후에 다시 봉헌되는 <복원된 제물포 웨슬리예배당 > 멸실 57년말에 복원되었다. 오른 쪽이 <내리100주년기념예배당>이다.

내리교회 연혁 (1885.7- 1964.2. )

 

1885.7.29 아펜젤라 선교사에 의해 내리교회 시작 - "한국의 어머니교회 출범"

1890 한국 최초의 교회당 건축 "노병일씨 6간 회당 건축"

1891.8.   제물포웨슬리 기념교회 건축

1892.3.12 영화학교 설립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설립"

1893 한국 최초의 여선교회 조직 "보호여회: 존슨부인과 백헬렌 전도부인"

1894 한국 최초의 자비교회당 건축 "여자 예배당 6간을 26원으로 건축"

1895 한국 최초의 자비 개척교회 설립 "담방리 교회(현 만수교회) 10원으로 개척"

1897 내리 엡웟 청년회 조직 "한국 최초의 기독청년회 조직"

1899.12.12 한국 최초의 신학회 조직 개강 "감리교신학대학 전신"

1901.5.4 본 교회 초대교인 김기범목사 안수 받음 "한국 최초의 목사안수"

1901.11.1  한국 최초의 지방회 조직 "한국 서지방"

1901.12.25 내리교회 예배당 신축봉헌 "십자가형 교회"

1902.3 본 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남북 감리교회 합동신학회 개최

1902.11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제1호선에 내리교인 50명이 이민감

1902.12.22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

1903.11.3 한국 최초의 해외 개척교회 설립 "현 호놀루루 미연합감리교회"

1904   연회에서 한국 감리교회중 최우수 교회로 표창받음

1906. 6.13 엡웟 청년회 해산당함

1907.10 한국최초 예배당 남녀 칸막이 철폐

1908.4   엡웟청년회 독자부활조직

1919   여자청년회 조직

1923   소년회 조직

1925 내리 조선 소년 척후대 조직

1954.12   한국 최초의 메시아 전곡 발표

1958.12.22 교회당 완공봉헌"건평 323 2"

1961.4   내리유치원 설립

1964.2.26 교회당 완전전소

창립 122주년 맞는 인천내리교회 (사진, 글 출처- 내리교회 홈페이지, http://www.naeri.org/)

 

120년전 구한말 쇄국과 개국이 대립하며 국가의 진로가 불투명한 시절. 45일 제물포항에는 일단의 미국 선교사들이 발을 디뎠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일행이 바로 그들이다. 공식적인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이 땅을 찾은 이들로 인해 향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발전상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태동은 시작됐다. 또한 이날은 인천 내리교회(담임목사·김흥규)가 창립된 날이다. 올해로 꼭 120주년을 맞는 내리교회는 한국 교회의 모교회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첫 설교로 시작된 인천의 기독교는 바로 그대로 한국 교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 45, 인천에서는 내리교회의 창립과 최초의 선교사 도래를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린다. 인천을 필두로 전국의 개신교회가 모두 참여, 기독교의 참 뜻을 기리고 한국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성회가 펼쳐진다. 인천기독교총연합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와 기독교 교회협의회 등 교파를 초월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여, 오전 10시 서울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펜젤러 묘소를 찾아 12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 이어 오후에는 한국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 예배 및 1200만 성도 대각성 부흥성회를 개최한다. 인천 월미도 선교100주년 기념탑에서의 경배와 찬양을 마친 뒤 신도들은 내리교회까지 도보로 행진, 내리교회 본당에서 대규모 부흥성회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다. ‘한국교회 1200만 성도 대각성 부흥성회 발대식을 기점으로 전국을 순회한 뒤 서울에서 부흥성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한국 교회의 모교회로서 창립 120주년을 맞은 인천 내리교회. 120년전 인천을 찾은 아펜젤러 부부와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았던 내리교회 및 신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조태현기자/ 종이신문정보/20050405일자 1 12면 게재)

미주한인선교 100주년 기념탑(1903-2003)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1901년 교회 종 기념비 

한국 선교 120주년 기념비

 

인천기독교총연합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와 기독교 교회협의회 등 교파를 초월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여, 2005.4.5.오전 10시 서울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펜젤러 묘소를 찾아 12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한국 선교 120주년 기념비

 교회 내부

2012.9.23. 오후4시 헌당감사예배    (출처- cafe.daum.net/kkhsm/8E0o/23 )

 

인천내리교회(김흥규 목사)가 구 예배당인 제물포 웨슬리예배당을 복원하여 2012.9.23. 헌당감사예배를 드렸다. 제물포 웨슬리예배당은 1885년 4월5일 제물포항을 통해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가 개척한 인천내리교회의 전신이다. 웨슬리예배당은 정동 벧엘예배당(정동교회 전신)과 똑같은 19세기 미국 건축 양식으로 인천 최초의 서구식 개신교 건물이다.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은 1901.12.25 크리스마스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당시 담임목사는 조원시 목사(George Heber Jones)였다. 교인들과 국내외 내빈 등 1000여명이 봉헌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1955.10.19 더 큰 성전을 건축하기위해 역사적인 건물을 허물었다. 새로지은 교회는 안타깝게도 10년이 채 못되 전소되었다. 인천 내리교회는 인천시의 도움을 받아 57년만에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을 복원하였다. 복원 된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은 한국최초목사기념예배당이라는 건립취지를 살리고자 예배당 오른편 부분은 제물포웨슬리예배당(전 내리교회)을 7년간 담임했던 김기범 목사를 기념하여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의 모습으로, 왼편은 내리교회 출신으로 한국 최초 감리교 목사가 되어 평양 남산현예배당을 담임했던 김창식 목사를 기념하고자 평양 남산현예배당 모습으로 복원 되었다. 두 예배당 건물들을 병합설계하여 준비한지 2012.9. 현재로 27년만의 역사이다. 2008년에 시작된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과 함께 웨슬리 예배당 옆에 지하 2층 지상7층 연면적 8,266㎡(약 2,500평)의 ‘아펜젤러비전센터’와 반지하 1층 지상4층의 연면적 631.37㎡(약191평)의 부목사 주택 ‘목자관’도 함께 지었다.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은 과거 사진·기록물의 고증을 통해 연면적 294㎡(89평), 높이 9.89m(종탑 포함 11.6m), 지상 1층 규모로 복원됐다. 총 공사비는 174억 2천만원이 소요됐다. 예배당 복원을 위해 안상수 전 인천시장이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사 9억원을 지원하여 주었고, 교회부지 마련에 나선 내리교회는 건축비 마련이 힘에 겨웠지만 선조들이 남긴 서구 검단리의 부지 일부를 매각하고 교우들의 피눈물 나는 헌금으로 교회인근의 내동 166번지 외 15필지 2,470㎡(약 750평)을 확보했다.

1901년 최초의 십자가 예배당 머릿돌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 머릿돌 (봉헌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separk49/100167877131)

한국 감리교 첫 예배당세운 아펜젤러 목사

 

“가마 하나에는 8명의 가마꾼이 따랐습니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가마를 나릅니다. 가마꾼들은 평균 1시간에 4마일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달립니다. 교대할 때는 교대할 팀이 같은 속도로 옆에서 걸어가면서 가마의 손잡이를 잡고 멜빵을 한 쪽 어깨에 걸치면서 들어오면 다른 편은 물러가는 식으로 상당히 민첩하게 교대하는데 걸음이 멈춰지거나 늦어지지 않습니다.” 1890년 인천에서 가마를 타고 서울에 들어온 셔우드 홀이 기록한 가마꾼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처음 복음이 전해질 무렵 가깝고도 먼 인천의 모습을 어림풋이 떠올릴 수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된 인천은 외국문물의 집산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개항 후 일본지계가 설정되고 후에 청국지계 그리고 서구열강의 공동지계가 설정되어 인천은 그야말로 서양문물의 전시장이 되어갔다. 지계(地界)란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치외법권이 인정된 우리 나라 속의 외국이었다. 인천의 외국지계는 제물포를 중심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다. 개항이후 인천에는 외국의 물건을 하역하는 일에서부터 도로작업 그리고 가옥건축에 이르기까지 장정들의 일손이 많이 필요해 졌다. 이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장정들로 인천은 거대한 노동시장으로 변모해 갔다.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매력적인 인천선교에 착수하여 1889년 청국지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노병일을 이곳에 파송하여 책을 팔면서 전도를 하게 했다. 그러나 청국지계에서는 선교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아펜젤러는 선교의 근거지를 내동 언덕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 후 노병일은 2년여 동안 인천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나 선교의 결실이 거의 없었다. 노병일의 지나친 열정과 지방정부의 선교탄압이 그 원인이었다. 노병일은 밤에 잠자리를 방해할 정도로 크게 외치고 다니는가 하면 행인들에게 격분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유교문화에 젖어 있던 지방관리들은 이런 꼴을 가만 놔 둘 리 없었다. 그들은 서양종교를 외치고 다니는 노병일에게 전도를 금할 것과 만일 어길 시 퇴거를 명한다는 경고를 하였다. 관리들의 이런 서슬 시퍼런 태도를 보면서 서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천은 여전히 매력적인 선교지였다. 이런 판단에 따라 1891년 6월 내한한 굿셀감독은 아펜젤러를 인천(제물포)지역의 선교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아펜젤러는 매주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주일을 보낸 후 배재학당의 강의를 위해 월요일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말을 타고 걸리는 시간은 7시간 정도였다. 이렇게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면서 아펜젤러는 인천에 한국 최초의 예배당을 짓는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작지만 특이한 건물이 필요했다. 건물은 1891년에 짓기 시작하여 그 해 겨울 아직 완공되지 않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겉에는 하얀색 석회를 발랐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었다. 방은 두 개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는 아주 단순했다. 설교단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0평이 겨우 넘는 집에 방 두 개를 넣었으니 큰 방이 기껏해야 6평을 넘지 못했을 것이지만 바닥에 앉으면 설교자를 제외하고 성인 12명은 능히 예배드릴 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이 집은 한국에서 지은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이란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다. 아펜젤러는 이 예배당을 지은 후에도 말을 타고 내려와 예배를 인도했다.

아펜젤러 초대 목사 (1858-1902)

아펜젤러 초대 목사 (1858-1902)

아펜젤러 초대 목사 (1858-1902)

1895년 내리교인들, 한국최초로 오르간예배드린 내리교회

 

1885년 4월5일 기독교복음을 들고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딘 아펜젤러는 그해 7월 6일 우리 나라 최초의 오르간예배를 드렸다. 오르간 소리가 울려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초가집에 몰려들었고 아름다운 소리에 반해 버렸다. 그때 아펜젤러가 머물던 초가는 남한 최초의 교회인 인천 내리교회가 됐다. 찬송가가 우리말로 처음 발행된 것은 1892년이었다.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27곡을 우리말로 번역, 악보없는 [찬미가] 수형본를 만들었고, 다음해인 1893년에 언더우드가 사성부 악보를 집성해 1백 17곡이 수록된 [찬양가]를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 발행했다. 그러나 찬양가는 감리교에서 사용을 거절, 1896년 아펜젤러와 존스가 공동편집하여 새로운 [찬미가]를 발행했고, 1895년에 장로교는 [찬셩시]를 발행했다.

 

 

<중앙감리교회> 1890. 아펠젤러(H.G.appenzeller) 선교사에 의해 창립  

2015년9월  가우처기념예배당  

중앙교회 교회연혁    (출처- 중앙감리교회 | 행사 앨범)

 

1890. 아펠젤러(H.G.appenzeller) 선교사에 의해 창립

1902. 아펜젤러 선교사가 목포 앞바다에서 순직할 때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함

민족독립운동, 개화운동, 교육과 청년운동에 앞장섬

1. 대동서시(도서 무료 열람실 겸 서점)

2. 종로 여자소학교(이화학당의 분교)

3. 종로교회 유치원(1901년 어린이 교육)

4. 중앙보육학원(유치원 교사 양성기관  현 중앙대학교가 됨)

5. 황성기독청년회(1903년 창립, 1915년까지 교회 소속됨)

6. 3.1운동과 학생운동의 본거지(박희도 전도사와 김창준 목사)

7. 대한체육회 창설

1919. 민족대표 33인 중 담임목사 김창준 목사와 박희도 목사가 참여함

1926. 가우처기념예배당으로 건축 및 명명

1930. 교회 이름을 종로교회에서 중앙교회로 개칭

1975. 현 위치로 교회를 이전

1981 ~ 1983 교회건축 (하나로빌딩: 지상 12, 지하 3)

1990.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

1. 필리핀, 태국에 선교사 파송(정성수, 오세관 선교사)

2. 사팡팔라이교회(필리핀) 파송

3. 하나로 국민운동중앙회 창립

1991. 필리핀 레이떼 지역 가낭가 교회 건축봉헌(김양환 목사 은퇴기념)

1994. 필리핀 바사정착촌 선한목자교회 건축봉헌(유인희 장로 은퇴기념)

1995. 필리핀 비나투보화산지대 마와갓부족 초등학교 교실, 도서관, 교무실 건축

1999. 100주년 기념 건축봉헌(하나로중앙교회 최 헌 목사)

꿈이있는교회(하정완 목사) 개척 창립

2000. 학교법인 관악학원인수경영(현 서울관광고등학교)

중국 북경(김건상 선교사 파송), 중국 단동(주재훈 선교사 파송)

2006. ○○ ○○○ 선교사 파송 제27대 담임목사로 정의선 목사 취임

서울연회에서 정영관 목사 은퇴

2009. 사회교육관 리노베이션 봉헌

2010. 창립 120주년 기념 행사

1. 예배당 리노베이션 봉헌

2. 하나로 한중교회(유 석 목사) 개척 창립

3. 북녘 어린이 우유 전달 출항식(컨테이너 선적)

2011. 중앙교회 추모관 구입

2012. 5회 대한민국 환경.사회봉사대상 수상(월드그린 환경연합 중앙회 주관)

2013. 예진교회(최 운 목사) 개척 창립 애찬실, 주방, 찬양대실(12) 리모델링 봉헌

수양관 구입(대명콘도 회원권 3)

2015년9월  가우처기념예배당 헌정예배, 창립 125주년 기념 행사

1. 가우처 흉상 제막식

2. 창립 125주년 기념 도서 한국선교의 개척자(가우처,매클레이,아펜젤러) 출판

북한교회 재건 현판식

2017.  28대 담임목사 이형노 목사 취임()

서울연회에서 정의선 목사 은퇴

            

<4. 군산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군산시 내초동) , 방문 촬영, 2009

 

여명기 조선땅에 들어와 신식학교(배재학교 이화학당)를 세우고, 교회(정동교회)를 지어 어린 양들을 돌보다 해상사고로 1902년 고군산열도 어청도에서 희생된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리는 추모비나 예배처소는 없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를 파견한 감리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일으킨 이준 열사를 포함한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교단으로 일제 치하 민족운동에도 적지않은 힘을 실어주었는 데도 우리는 무심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 105주년을 맞이하여, 전북 군산시 내초동에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 기념교회를 세웠다.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

 

 

<5. 서천 마량리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아펜젤러순직 기념관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정교회 옆에 세워진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기념관은 당시 파선된 배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새로 지은 동백정교회와 구 교회도 아직 남아있다. 

아펜젤러순직 기념관, 감리교 선교역사관

동백정교회(좌), 아펜젤러순직 기념관(중앙), 구 동백정교회(우)

아펜젤러순직 기념관 입구 아펜젤러 목사 부조

아펜젤러 추모비 (서천 마량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양화진 아펜젤러 묘역의 아펜젤러 자손 묘>

헨리 닫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아들 ) 선교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 ()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 1889.11.6.~1953.12.1.) 1889년 11월 6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프랭클린-마샬(Franklin and Marshal)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1915년 드루(Drew)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7년 뉴욕대학에서 M. A. 학위를 받았다. 1917 9 4일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인천지방에서 3년간 활동하였다. 1920년 배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1919 11 6 미국감리회한국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 9 17일까지 다섯 차례나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찬송가 개정작업에 동참하여 <신정 찬송가 1931년 발행하는데 공헌하였다. 1952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미국 뉴욕감리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3년 12월 1일 64세로 별세하였다.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1954 10 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화·배재 연합성가대의 주악과 찬송(570)과 신흥우 박사의 조사 등으로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진행되었으며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H. D.아펜젤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 1894.6.14.- 1986.11.25.)선교사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 1892 10 1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34년까지 봉직한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1866-1945)선교사의 딸 1894년 6월 14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중학교와 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의 아들 H. D. 아펜젤러와 미국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917 9 4일 남편과 함께 내한하였다.(자료 : 윤춘병,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처음에는 인천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남편을 내조하며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했다. 1941년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세계봉사회 한국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여 1952년 남편의 병 치료차 귀국하였다. H. D. 아펜젤러와의 사이에 3남매(Appenzeller, Alice R., Mary E.)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사후에 다시 내한하여 1962년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선교사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책임자(Hostess)로 봉직하였다. 정년 후에는 나이트(Cecil Knight)와 재혼하여 미국 그렌다르(Glendale)에서 살다가 1986년 11월 25 별세하였다.(자료 : Donald N. Clark)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7 1 19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펜젤러 선교사 아들 H.D. 아펜젤러 묘(배재학당 교장) 묘비 후면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 18851950)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 18851950) H. G. 아펜젤러의 딸로 한국에서 백인 선교사의 첫 자녀로 출생하여 미국에서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화학당 제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헌신하면서 세계적 종합대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검은 색 묘비의 상단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고 하는 교훈적인 글이 새겨져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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