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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유적지(Ephesus)

성지순례/튀르키예(터키)

by baesungsoo 2013. 8. 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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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에베소 유적지         (출처- http://blog.naver.com/sp0207/140022419625)  

 

Ephesus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번영하였던 고대도시이다. 에베소는 유럽대륙에서 소아시아로가는 주요 길목으로서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로마제국의 4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4대도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안디옥,에베소)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사도 성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에베소 유적지 한글 안내판 

 

크레테스 도로, 에베소 유적지   

 

크레테스 길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크레테스에서 셀슈스로 가는 도로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항구 방향 도로


원형극장 앞쪽에는 거대한 아고라(시장)가 있고 원형극장에서 항구까지는 530m나 되는데 항구로 이어지는 길 폭이 6차선이나 됨직한 길에 돌로 포장이 되어 있다. 이 길로 수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했을 것이다  

 

중앙도로 옆 모자이크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의 인도(사람 다니는 길) 모자이크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길 양편에는 화려한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그 상점들 위로는 3,4층의 건물들이 연립주택처럼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에베소의 인도(사람 다니는 길) 모자이크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인들이 살았던 주택의 잔해

 

고대에베소 총독관저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에베소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자치 도시였고, 상업적으로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다. 로마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치 정부를 허용했다. 에베소에 로마 군대를 강제적으로 주둔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행정관이 있었다. 또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으로서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으며 기타 민간 기구들도 있었다.

 

아데미 신전 터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아데미 신전 터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세계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리스인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하는 격찬의 말이 있다. 다음은 아데미 여신을 위해 열렸던 축제에 대한 묘사이다. 이 신전에서의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은 기묘하고 황홀하고 광적인 것으로 고함소리와 울음소리를 동반한다. 나팔이 울리면서 분향을 시작하게 되면, 군중들은 흥분과 발광으로 날뛴다. 게다가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다. 에베소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 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데미 신전에서 출발한 아데미 신상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동방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는 또 하나의 아데미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은 관저에서 나와서 아데미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데미 여신상은 크레테 도로를 지나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다.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대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의 열광인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데미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

 

에베소 목욕탕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목욕탕의 폐허는 3층으로 된 큰 건축물로 로마 유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표적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의 경우에도 여러 개의 대형 체육관과 목욕탕이 있었고 시설도 초호화판이었다. 직접적인 육체 노동은 노예들에게 맡긴 지배층들은 주로 무역, 유통, 금융 등과 같은 사무직에 종사하는데다 육식을 중심으로 하는 식생활 습관 때문에 비만해지는 경향이 짙었기에 운동 시설과 목욕탕은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에베소 목욕탕 온수관

 

 청소년 체육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멤미우스 기념비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헤라클레스의 문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헤라클레스 게이트는 대리석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물을 따서 지었다. 쿠레테스(크레테스) 도로가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 문은 2층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문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출처- http://info.catholic.or.kr/)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 따라서 로마-그리스 타입으로 무척 아름다운 극장의 표본이 되겠다. 고대 극장이 모두 그러하듯이 3부분으로 되어있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음악당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662285)

 

에베소 음악당(원극장)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에베소 음악당(원형극장)  

 

오데온(Odeion) 소극장 

           

오데온(Odeion)은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극장과 같은 형태로 소극장이라고 도한다. 에베소의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하며 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베소인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들은 대원형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콘서트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400명을 수용하였다.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 전용이었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 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 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때 세워진 시청 건물인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에는 영원히 꺼지면 안되는 성화가 타고 있었으며, 이 불은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잘 관리가 되었다.

 

오데온(Odeion) 소극장 

 

오데온(Odeion) 소극장

 

도미시안 황제 숭배 신전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페스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파트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요한은 그가 암살 당한 후 요한은 에페소로 돌아 올수 있었다. 이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굴된 도미티안 황제의 조각상이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그 오른쪽에는 가이우스멤피우스를 위해 세웠다는 멤피우스 기념비의 잔해도 남아 있다. 가이우스멤피우스는 이 도시에 수로를 만든 건축가이며 의사라고 한다. 멤피우스 기념비 맞은쪽으로는 도미티안 광장이 있는데 도미티안 광장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를 기념하여 만든 광장으로 이 광장 왼쪽에는 부분적으로 복구된 폴리오 분수가 있다

 

도미시안 황제 숭배 신전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고대 에베소 나이키 여신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로 유명한 스포츠 용품 회사인 나이키의 로고는 스워시(swash 물의 튀김, 허세, 강타, 세차게 부딪히다)라는 영어단어의 뜻도 있지만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의 날개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고대 에베소 나이키 여신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 병원터(아스클레피온 신)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트라얀 황제 신전(우물)

 

크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트라얀 황제 신전(우물)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드리안 신전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하드리안 황제 신전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흉상

 

로마시대, 2세기,  빌라 몬타르도, 이탈리아 , 그리스산 대리석, 높이 61 , 대영박물관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의 통치기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공격적인 대외확장정책을 편 직후에 해당되며, 로마제국의 평화적 통합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는 북방 야만족으로부터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일명 하드리아누스의 벽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으로서도 중요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방방곳곳을 순례한 여행자로, 또 그리스문화의 애호가로서도 잘 알려져있다. 로마황제로서는 처음으로 턱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철학자적 풍모 또는 그리스식 스타일에 대한 그의 추종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하드리아누스의 스타일은 로마제국 전역에 유행했다.

로마에서 발견되었으나 그리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흉상은, 머리를 왼쪽으로 돌린 황제의 영웅적인 나신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우아한 머리칼과 수염 처리는 주로 조각끌로 처리되었다. 새겨진 홍채와 패인 눈동자 등의 눈 처리형식은, 초상 조각상에 있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형식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대리석상, 차낙칼레 고고학 박물관  (출처-http://toads.blog.me/20140960168)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테라스가 있는 집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귀족들이 살던 집인 듯 함) 거리 왼쪽에 모여 있고 그 반대편에는 하드리안 신전과 스콜라스티카 목욕탕(로마는 목욕탕을 가는 곳마다 지었고 목욕탕 때문에 멸망을 했다고 한다.)이 있다. 목욕탕에는 온탕, 냉탕, 체육관(체력 단련실)으로 구분되어 있고 사우나 시설도 완비된 목욕탕이었다는 걸 유적을 보고 알 수 있었으며  코스모스처럼 생긴 기름나무로 목욕탕에 불을 지폈다고 한다. 그 아래쪽에는 수세식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50여명이 동시에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었는지 구멍이 50여개가 뚫려 있다. 공중화장실이 공중목욕탕보다 낮은 지대에 만들었는데 이는 공중목욕탕에서 쓰고 난 더운물이 공중 화장실로 흐르게 하여 뒤처리를 수세식으로 하게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비데를 겸용한 화장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공중목욕탕이나 공중 화장실이 모두 남성 위주로 만들어져 당시 여성들은 어디서 목욕을 하였고 어디서 볼일을 봤는지 알 수가 없다. 화장실의 돌들이 모두 대리석이어서 겨울철이나 추운 날에는 돌들이 차갑기 때문에 미리 노예를 보내어 화장실에 걸터앉게 한 후 따듯해진 다음 주인이 볼일을 보게 했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수세식 화장실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셀슈스 도서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셀슈스 도서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셀슈스 도서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셀슈스 도서관                                  (출처- http://blog.daum.net/seoljg/17041386)

 

에베소의 아고라(시장터)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160mX 56m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곳은 모든 의미에서 도시의 중추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판매대만 놓으면 시장이 되지만 그 뿐 아니라 시민들이 문제가 있을 때 총독에게 호소하는 집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적인 문화 행사에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고라   

 

아고라는 시장을 뜻한다. 대극장으로 가는 대리석 도로의 서쪽에 위치한 아고라(Lower Agora)는 네로 황제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아직도 발굴중이다. 이곳에서 3개의 문이 있다. 오데온 극장 건너편에 있는 아고라(Upper Agora)는 사방이 가로 세로 110 m로서 기원전 3세기 경에 설치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두 줄의 화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서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그 때 당시의 모든 여성들은 이곳에 꼭 한번 오고자 했다고 한다. 다른 시장터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시장의 한 가운데에 신전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처음에는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Isis Temple)이 있다. 로마시대에 아고라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사람들은 밭에서 입는 옷을 입고 아고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아고라는 기둥과 둥근 지붕형 구조로 만들어진 대단히 인상적인 곳이다. 시장터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전은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신전으로 2세기에 로마의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에페스가 항구도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밀접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었다

 

 

아고라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아고라

 

아고라

 

아고라

 

아고라 

 

아고라

 

아고라 

 

아고라

 

아고라

 

에베소 창녀촌으로 가는 광고판 


셀수스 도서관 앞에는 '창녀의 집' 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랑의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리석 도로 바닥에 새겨진 이 기호는 바로 그 곳으로 안내하는 안내판으로 이 안내판에는 발 모양과 하트, 그리고 조그마한 동그라미와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장식한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로마 여인들에게는 발 모양은 하나의 상징으로 그 시대에는 발이 예뻐야 몸매와 성품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트는 마음과 사랑을 뜻하는 것이고 동그라미는 돈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인의 가슴에는 이제는 지워져서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지만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은 발자국이 표시하는 방향으로 오세요. 이곳에 올 때는 약간의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여인들의 사랑과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발자국 보다 작은 미성년자는 오지 마세요."  

 

 

에베소 창녀촌으로 가는 광고판   

 

성모마리아의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leesungkook/154)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성모마리아의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leesungkook/154)

 

성모마리아의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leesungkook/154)

 

성모마리아의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leesungkook/154)

 

성모마리아의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leesungkook/154)

 

 

성모마리아의 교회                   (출처-http://blog.naver.com/60start/70170836282)

 

<7인의 잠자는 동굴(카타콤베) >


 7인의 잠자는 동굴(카타콤베)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662285)

 

파나지르 다흐 동북록에는 `7인의 잠자는 자'의 카타콤베(Catacombs, 로마에 있어서의 초대 기독교도의 지하 매장소로서알려진 지하 구조의 유적 명칭)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박해시(A. D 250년경) 7명의 청년이 동굴에 갇혀 잠에 빠졌다가 겨우 데오도시우스 II세(Theodosius II, 480- 450)때에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깨어났다. 그들은 사후 그 동굴에 장사되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다른 많은 성인들의 묘도 그리로 옮겨졌다.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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