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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인도 씨크교)

타종교신전/시크교사원

by baesungsoo 2005. 5. 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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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 전경

 


 


 


사원 앞 대리석 길

 


사원 안 호수

 


사원 안 호수

 

인도 시크교의 성지이며, 황금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1604년 구르아르준이 세웠다. 시크교는 공생을 위해 태동된 종교로 나나크(Nanak)가 창설한 종교이다

 

사원 내부          (출처-  www.vtour.co.kr )

 

경호대

 

인도 펀자브 암리차르에서 시크교의 성서인 구루 그란트 사힙(Guru Granth Sahib)의 400주년 전날 시크교 성당인 골든 템플 콤플렉스(the Golden Temple complex)의 야경

 

인도 암리차르에서 시크교도들이 골든템플시크사원의 신성한 연못가에 앉아있다. 시크교는 이번해 시크교 성서 구루 그란트 사힙(Guru Granth Sahib)의 400주년 행사를 가진다

(출처- 블로그명 : Don't be a stranger~!!)

 

 

황금사원(Golden Temple)


황금사원은 암리싸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번쩍이는 금지붕의 사원이 연못에 비춰지는 모습이 장관인 황금사원은 사원을 가운데 두고 연못이 대리석 바닥 회랑(回廊)으로 빙 둘러져 있다.  사원은 씨크교의 다섯번째 구루인 구루 아르잔 데브 Guru Arjan Dev에 의하여 처음 지어졌는데, 오늘날과 같이 400kg에 달하는 순금을 이용하여 씌워진 지붕과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것은 1802년으로 씨크교도 지배자인 마하라자 란짓 싱 Maharaja Ranjit Singh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이 금지붕이 이 사원을 황금사원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도록 한 것이다. 사원 하리 만디르 Hari Mandir 안에선 언제나 씨크교의 성서인 그랜드 사힙 Grand Sahib(구루 Guru들이 남긴 말과 힌두와 회교의 경전에서 뽑은 어귀들의 모음)이 확성기를 통해 사원 전체로 울려 퍼진다.  따로 거처를 두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랜드 사힙은 매일 아침 4시에 연못안의 사원으로 옮겨오고, 저녁 10시엔 다시 거처로 옮겨지고 있다. 성서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짧은 의식이 날카로운 나팔소리와 둔중한 북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황금사원은 데오리스라 불리는 네 방향으로 있는 4개의 출입구와 세련되게 장식된 성소는 종교나 믿음에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개방이 되어있다. 순례자들은 암릿 사라스 꾼드(Amrit Saras Kund, 영생의 웅덩이)에 몸을 담구어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이 사원은 대부분의 사원과 달리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인 것은, 신을 섬기는 것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사원의 경내는 식당인 구루 카 랑가 Guru Ka Langar를 비롯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순례지 숙소와 모두 연결되고 있는데, 순례자 숙소는 사원의 입구를 통하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다.

 

 

인도 암릿싸르(시크교의 중심지)


시크교가 생기기 이전에 암릿싸르는 라마야나의 람의 쌍둥이 아들인 러브와 꾸시가 교육을 받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독립 이전까지 암릿싸르는 라호르(현재는 파키스탄에 속함)와 함께 인도에서 교육이 제일 잘 된 지역으로 평가 받았다. 요즘 암릿싸르는 시크교의 중심지로서 순례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성지인다. 따라서 많은 시크교도들은 이곳을 종교적으로는 반드시 방문해야 할 도시로 생각하고 있다. 암릿싸르는 성실하고 온화한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불려지는 지역이다. 그런 한편으로 암릿싸르는 인도의 근대사에 있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독립 투쟁이 있던 지역으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에 의한 뻔잡 지역의 분리를 반대해 거센 운동이 펼쳐진 장소로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씨크교의 역사


15세기에 창시된 씨크교는 유일신관은 이슬람과 일치하며, 박티의 성격은 힌두교와 비슷한 특성을 갖는 일종의 종합주의적 종교였다. 하지만 교조 Nanak이 체험한 독특한 신성 계시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합리적 종합주의가 아니었고, 따라서 철학적 재구성에도 몰두하지 않았다. 나낙크는 1469년 Lahore에서 30마일 떨어진 Talwandi에서 Khatri라 불리는 상인 카스트 부모 밑에서 출생했다. 그는 매우 조숙한 천부적 시인이었으며, 명상과 종교적 사색에 열중했다. 그의 종교젹 열중을 우려한 친척들은 그로 하여금 행정관리의 길을 걷게 했다. 지방 수도 Sultanpur에서 행정부서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두 아이를 두었으나 저녁이면 자기의 창조주에게 찬송 부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후 음유시인 Mardana가 합세하고, 점차 조그만 종교집단을 형성했다. 어느 날 나낙크는 신이 준 감로주를 받아 마시고 "힌두교도라는 것도, 회교도라는 것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인도 북부, 서부 등지를 여행하며 쉬지 않고 노래하며 설교했다. 그는 이 때 스스로 고안한 의상을 입었는데 힌두교와 이슬람이라는 신앙을 조화시키는 시각적 과시의 일환이었다. 그 옷은 하의와 신발은 힌두교식이고 상의는 무슬림식이었다. 그후 현재의 Punjab 지방에서 시크(제자)의 집단을 처음 형성했다. 죽기 전 제자 Angad를 후계자로 임명한 후 538년 사망했다.        나낙크가 가르친 신의 이름은 "진실한 이름"이었다. 그는 힌두교의 마야(Maya) 교리를 채용하면서도 그것을 환상이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물질도 창조주의 영원한 진리를 담은 표상으로 실재성을 지니지만 욕망을 지니고 일상세계에만 빠져 사는 사람의 주위에 허위의 벽을 둘러 정말로 실재인 것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마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세계의 창조는 마야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에 의해서라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한편 영혼의 윤회, 업의 법칙 교리도 그대로 보유했다. 신과 떨어져 살기 때문에 윤회의 쳇바퀴를 계속하는 것이며, 신만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끝없이 되뇌어 비로소 신에 합일될 수 있고 힌두교인들이 열반이라고 부르는 축복된 경지는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구원이란 최후의 심판을 거쳐 극락 가는 것이 아니라 신, 즉 '진실한 이름' 속에 함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세상 속에 있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수피즘과 상통하는 것이다. 한편 제의와 의전을 극도로 혐오했는데 이는 의례가 인간을 적극적으로 타락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순례, 극단적 고행, 우상숭배도 불신했다. 이들은 선한 사람, 올바른 시크인은 동기와 행위를 순수하게 가지고 미덕을 택하고, 카스트를 불문하고 누구와도 형제애를 맺으며, 구루의 말씀과 온갖 신성한 지식을 갈망하고, 부인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 짓밟지 않고, 악한 친구 물리치고, 성스러운 것과 교분을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나낙크 이후 아홉명의 구루가 계승자로 활동했다. 처음 네 구루 가운데 Amar Das(1552-1574)가 전형적 구루이다. 그는 겸손을 강조하며, 계급의식을 철저히 부정했다. 시크교 초기 quietism 대표라 할 수 있다. 이 때 시크 공동체의 두 가지 진귀한 제도가 형성되는데, sangat(회중), 즉 계급 따지지 않는 모임과, langar(lankar, 공동체 식당), 즉 자유로운 회식 치르는 곳이다. 이는 시크교의 민주적 화합의 풍토 조성에 기여한 전통이다.  하지만 시크교도가 증대함에 따라 외부의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이에 5대 구루 Arjan(16581-1606)은 자기방어적, 호전적 태도로 전환했다.

그는 이곳 Amritsar에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가운데 섬에 Harmandir(신의 사원- 황금사원)를 건축했다. 한편 성전 Granth(책)을 편찬했다. 하지만 무슬림 왕 Jehangir에게 처형당하고 만다. 6대 구루 Har Govind(1606-2645)는 아르잔의 아들로, 무장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 그는 정숙주의를 강하게 나타내는 터번과 묵주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고, 칼 띠로써 묵주 목걸이 seli를 삼고, 터번은 왕의 깃털로 장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장 경비대를 강화하고 요새를 견고히 세웠다. 점차 군무를 자원하는 시크교도가 늘어나고 일종의 국가의식까지 발전시키자 이슬람 세력의 적대적 태도가 강화되었다. 결국 전쟁이 발발해 Jehangir에게 잡혔으나 제한기르 사후 몸값 치루고 풀려나 다시 전쟁을 계속했다. 다음 세 구루는 시크의 힘을 평화롭게, 그러나 세심히 강화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0대 구루 Gobind Singh(1675-1708)은 무슬림들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며 파상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전의를 복돋우기 위해 호전적 송가를 지었으며, Khanda di-Pahul(칼의 세례)을 통한 Khalsa(정화) 제도를 정착시켰다. 칼사 가입자에게는 Singh 칭호를 부여하고 '5K'에 따른 용모를 갖게 했다. 그것은 Kesh(머리와 수염 깎지 않음), Kangha(빗), Kachh(짧은 속바지), Kara(쇠팔찌), Kirpan(칼)이었다. 그리고 칼사 가압자들은 눈에 안보이는 존재로는 한 신만을 예배할 것,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그란트만을 숭경할 것, 구루 존경할 것, 해뜨기 전 일어나 찬 물에 목욕하고 그 다음에 명상, 기도할 것을 서약해야 했다. 또한 흥분제, 술, 담배를 멀리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한 칼에 죽인 동물은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한편 고빈드는 카스트에 상관없이 개방된 새로운 종교집단을 열었고, 이에 많은 하층민들이 몰려와 자유로운 전사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고빈드 싱은 결국 아우랑제브와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1708년 암살당하고 만다. 그는 죽기 전 유언을 남겼는데, 자기가 죽은 후 인간 구루를 세우지 말고 그란트를 구루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고빈드 싱 이후 시크교도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 거두고 펀잡 지방 전체를 지배하지만 1845년, 1848년에는 영국 군대와 전쟁을 거치고, 1849년에는 최후의 시크 통치자 Maharajah Dhulib Singh 이 영국에 항복함으로써 그 후 영국인들 편에 서서 경찰역을 수행하였다. 시크의 중심 사원은 마하나쉬트라, 파트나에 각각 하나, 그리고 펀잡에 셋이 있다. 이 다섯 템플의 헤드 프리스트들이 모여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한다. 각 중심사원의 협력속에서, 전체 교단의 활동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방문하게 된 황금사원은 그 사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시되는 시크의 대표적 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