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입구의 순교비
순교자기념공원비
올라가는길 좌우에 있는 순교기념비
기념관에 이르는 길의 양 옆에는 유족들이 세운 높이 50㎝의 자연석으로 된 '순교자기념비'들이 서있다. 여기에는 순교자들의 이름과 그 밑에 성구들이 적혀 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이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2년 간의 옥고 끝에 1893년 순교한 백홍준 장로, 천황 숭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고를 치루고 1944년 순교한 주기철 목사, 6·25 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 등,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천 6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순교기념비
서기훈 목사 (장방산의 노목사) 순교기념비
서기훈 목사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한 줌 흙을 퍼 옮겨놓으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다. 철원평야 한가운데서 長防山은 화선지에 찍힌 획 하나처럼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온통 낙엽송 밭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그늘 속에 마을이 소복히 앉아있었다. 마을의 돌담들은 나이가 든듯했다. 한탄강이나 대교천 강돌들일텐데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장흥교회도 돌집이었다.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곰보둘들이었다. 철원 제일교회의 무너진 벽채와 돌계단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현무암들이었다. 넌즈시 한 시대를 공유했던 두 교회의 아픔을 암시하고 있었다. 17평 벽돌집을 이어붙였지만 뒷채 곰보돌 벽엔 여전히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독교 감리교단의 첫 반공 희생 사건이자 장흥교회가 연루된 첫 순교 사건은 48년 8월에 일어났다. 이시영 부통령은 멀지않아 38선이 헐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극비리에 ‘38선이북관리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통령은 김윤옥목사(당시 34세)를 불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상임이사를 지낸 김병조 목사(1876∼1947)의 아들. 김목사는 38선 이북 강원도 반공책임자가 되어 38선을 넘어 철원 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젊은 부목사는 장흥교회를 주목했다. 이 교회는 1920년 장방산마을 고봉기씨집에서 창립한 철원교회의 자교회.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비롯해 명관조 박경룡 목사등이 담임하면서 민족교육이 단단히 착근한 교회였다. 이 교회 청년 30명을 모아 ‘신한애국청년회’를 결성했다. 46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해 8월 일망타진됐다. 장흥교회 청년들은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박성배장로는 8년, 박정배(당시 36세)는 5년, 김정필(당시 37세) 정창화(당시 35세)는 각각 1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모두 옥사했다. 몇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으나 이내 그들은 다시 함경고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장흥리 사람들은 시퍼런 한을 장방산에 묻었다. 장방산은 한많은 산이었다. 50년 10월 10일 육군 백골부대가 철원읍에 진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1백5가구중 30가구가 공산당원이었던 장흥리에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그들의 시선이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장방산에 ‘터졌다 38선. 만나보자 부모형제’란 삐라가 뿌려졌다. 마을 봉기의 예고탄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어느새 토마토 빨갱이 30명을 공회당에 감금해 놓았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저지를 죄과를 벗어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출타중이던 徐琦勳목사(1882∼1951)는 이 소식을 마을 밖에서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마을로 달려왔다. 이미 두 사람이 처형된 뒤였다.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徐목사는 준엄하게 청년들을 꾸짖었다. 徐목사는 徐榮九논산군수의 장남이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이미 고저 구역장,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 구세병원 원목, 원산 신고산교회 담임 등을 지낸 원로목사. 47년 5월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장흥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파송된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내말을 듣지않으면 내가 마을을 떠나겠다”는 호령에 청년들은 ‘원수’를 풀어줬다. 그러나 徐목사는 바로 그 원수들의 손에 순교했다. 전세가 역전돼 마을은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徐목사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냉정리에서 첫 밤을 보내던 徐목사는 열 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실을 알았다. 그날밤 노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장방산으로 돌아왔다. 열 집의 마을 주민들은 내무서원의 눈길을 피해 아궁이나 돌각더미속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목사가 울리는 새벽종소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밤중 돌담장모퉁이에서 “오늘은 약력으로 섣달 스무사흘,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하루, 30분만 있으면 자정”이라고 날자와 시간을 알려주는 노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었다. 51년 새해 첫날, 실성한 사람처럼 어두운 마을을 순회하던 노목사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장흥교회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 다시 장방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노목사는 교회에 없었다. 내무서원들은 노목사에게 처음 외아들 기택씨(현 인천 영화학교 교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요리의 빈창고로 끌려갔다. 그들은 창고에 훤히 불을 밝혀 놓았다. 등화관제를 하지 않은 건물은 B-29의 좋은 표적이었다. 그들은 목사의 아들을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포탄이 떨어지는 틈을 타 철원을 탈출했다. 그해 12월 13일 몰래 교회를 찾아온 권오창 장로에게 徐목사는‘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라)란묘한 글귀 하나를 적어줬다. 철원평야는 큰 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작은벌 끝 대교천변의 韓집사집에 기거하던 徐목사에게 새해 손님이 찾아왔다. 잘 아는 내무서원이었다. “갑시다.”들판을 가로 질러간 발자국은 세 개였다. 하나는 내무서원의 것이고 하나는 徐모사의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목사의 길을 마지막까지 동행하던 그의 지팡이 자국이었다. 발자국은 들판을 지나 장방산으로 올랐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발자국은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던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동송 사문안골로 이어졌다. 거긴 지금도 철원사람들이 그곳으로 끌려간 사람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해 ‘死不還’골로 고쳐 부르는 곳이다. 15년 뒤인 67년 마을 사람들은 장흥교회 뜨락에 오석으로 된 비 하나를 세웠다. 작은 비신이었지만 이수와 비좌를 갖춘 정성을 들인 비였다. ‘故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이란 그의 시구가 적혀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요(요:25∼26)’란 성경구절은 마을 사람들이 노목사의 음성인양 가슴에 묻고 싶은 바램같은 것일 것이다. 작은 동산 장방산은 동으로 자릿벌, 서로 달챙이들, 남으로 메닷다니들, 북으로 작은벌 등 온통 철원평야를 거느리며 한탄강과 대교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둔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장방산이라고 멧산자 하나를 더붙인 것은 아마 그 산이 작지만 큰 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www.dmzline.com)
도복일 목사 (1914-1950) 순교기념비
도복일 목사
도복일은 1914년 경북 경산에서 도봉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직이 영남지방에서 선교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를 믿었던 초기 신자였다. 도복일은 모태신앙으로 민족주의자 아버지 도봉희가 3.1운동 참여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도복일은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땅 용정으로 이주함으로 용정학교와 서전의숙을 나왔고 1935년 해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리교 만주연회가 경영하는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만주 조선기독교연맹 만주교구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고 만주영안교회 부임한후 1개월만에 해방이 되어 1년간 공산치하에서 목회하다가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8월 총리원으로부터 당진교회 파송되어 1949년까지 3년동안 당진교회를 비롯 지역 여러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1950년 삽교로 옮기고 몇달이 못되어 6.25사변이 터지는 비운을 겪게 되어 부여지역으로 피난했다가 9월 초 "여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렸으니 비겁하게 살지말고 차라리 의롭게 죽읍시다"라는 도복일 목사의 간곡한 말에 사모도 눈시울이 굵어졌고 "당신의 뜻이 정 그렇다면 좋을대로 하시지요 저는 당신이 하자시는대로 하겟습니다." 교인들의 권고로 부여로 피란갔던 도복일 목사는 조바심이 나서 죽음을 불사하는 결단을 하고 가족을 이끌고 목회지 삽교교회로 다시 돌아와 교회를 돌보며 남은 교인들을 살피며 위로했다. 1950년 9월 21일 유엔군의 활약으로 후퇴하는 공산군은 남쪽 지도자들을 나포해 가면서 도목사도 체포해 삽교천 뚝방으로 끌고가 총살한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최인규 권사 (1891-1942)
최인규 권사
1881년 11월 15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북평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속장, 유사, 권사로서 주일학교 교장으로도 봉사하였고 1932년 천곡교회를 권화선 속장과 함께 개척하여 열심히 전도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장로가 없는 교회에 장로 역활까지 했다. 또 자기의 전재산인 밭 539평과 논 1369평을 천곡교회 대지로 헌납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재목을 운반하는 등 초가 8칸의 예배당 건축에 헌시하여 1933년 봉헌식을 가질수 있었다. 강대상 3개도 만들어 옥계, 천곡, 북평교회에 기증하였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신앙생활로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선정한 모범신자에 선정되어 1938년 10월 포창을 받았다. 최인규는 창씨개명과 일어사용, 황국식민서사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자였고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 일제의 억압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40년 5월 일경에 체포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라고 기뻐하였다. 함흥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재판관 앞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증거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일본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으로 지인에 불과하다고 담대히 말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징역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늘 기쁘게 찬송부르며 전도하다가 1941년 10월 주로 항일투사, 사상법들이 수용되어 있던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병을 얻어 갇힌지 3년이 되던 1942년 12월 16일 대전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형제 여러분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의 일 하시오. 나중 천국에서 우리 만납시다" 그가 남긴 유언이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해방 후 1946년 3월 유골을 천곡교회로 옮겼고 12월 16일에는 수교 44주기를 맞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해지방에서 정성을 모아 순교비를 건립했다. 순교한지 40년이 되던 1982년 8월 최인규 권사가 섬기던 천곡교회 마당에 선교탑이 세워졌다. (글 출처- http://kcmma.org)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비와 타임캡술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비
2007년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8. 31일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서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 봉헌식 및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세워진 기념비와 타임캡슐은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교회의 연합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행사와 집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돌비에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인 2007년을 상징하는 2007mm 높이의 화강암에 ‘부흥’이라는 글씨가 세로로 새겨졌다. 또한 가로 120cm, 세로 90cm의 좌대는 100cm 높이로 만들어져 100주년을 상징하고 있다.
타임캡슐 (2007-2107)
가로, 세로, 높이 각각 50cm의 정방형의 캡슐을 가로 세로 높이 80cm의 석실에 매설됐으며, 상암대회 프로그램북, 한국교회대부흥 100주년기념대회 동판, 성찬기, 상암대회 관련 DVD 등 19가지 품목이 매설됐다. 타임캡슐은 1백년 후인 2107년 8월 31일에 개봉될 예정이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기독교순교자 100주년 기념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지 1백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세워진 것이다. 1983년 당시 개신교 20개 교단들은 '한국기독교1백주년기념사업회'를 결성,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천여 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기념관 완공에는 여러 장애가 있었다. 부지도 그렇고 당시 12억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건설비용도 문제였다. 그러나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1986년 용인시 추계리에 10만여 평의 부지를 헌납했고, 1989년에는 이 사업을 위하여 재미실업가인 한규빈씨가 1백만 달러(당시 7억여 원)를 선뜻 내놓다. 이 자금이 기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고, 부족한 자금은 국내 많은 교회와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어, 순교자기념관은 1988년 8월 진입로 공사를 끝내고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뒤, 1989년 11월18일 준공기념 예배를 드리고 문을 열면서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를 잡게 잡았다. 순교자기념관은 건축적인 면에서 아담하면서도 유려하여 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 건축가협회상'을 받기도 하였다. 기념관은 건평 3백66평의 3층 건물로.전체 직사각형에 가운데 원통형 모양을 넣어 유선을 강조했다. 양측에 원추기둥 두개가 받치고 있는 출입구를 들어서면 로비에 대형그림이 있다. 또 1866년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국내에 들어와 선교하다 순교한 토머스 목사가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참수 직전에 있는 모습을 그린 대형그림도 있다. 혜초 김학수 화백이 기증한 40점의 역사화들 중 하나다. 그림 옆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관람이 시작된다. 2층은 우측 회의실과 좌측 예배실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실에는 30년대 이전 개화기 교회들과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백20점이 걸려 있다. 초가 교회 앞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댕기머리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야구를 하는 교회 어린이들. 갖가지 사진 속에서 보는 개화기 성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우 전시실이 연결된 3층은 순교자의 선영들과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제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목숨을 바쳐 기독교 탄압에 항거했던 2백2명의 순교자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다.선영과 유리탁자 속에는 손때 묻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념관에는 이밖에도 회의실에 마련된 서가에 교계 관련 서적 8백60여권이 비치되어 있고, 성서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성서 40여권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십자가동산
주기철, 박관준 기념비
주기철 목사 순교 시비, 고난의 명상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시 '옥중명상'이다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기념관 내부 입구 안내판
순교자의 기도
입구 성화
1층 입구 대형 그림, 토마스 목사의 순교화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당하는 토마스 목사
대형 십자가 청동 그릇
요나 그림
<내부 전시물>
내부 계단 통로에 전시되어 있는 순교지 사진, 영암지역 순교비 (이하 사진들은 제가 직접 현지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치)
영암지역 순교비
영암 구림교회 18인 합동묘, 순절비
영암 구림교회 18인 합동묘, 순절비
상월교회 25인 순교기념비
영암읍교회 24인 순교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십자가 작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십자가 작품
2층 예배실
2층 예배실에 전시되어 있는 초기교회 자료들
2층 예배실에 전시되어 있는 초기교회 자료들
꾸츠라프 목사 선교사역 그림, 혜촌 김성수 화백
최초의 여성 의료기관 보구여관 그림,
초기 배재학당 그림
초기 이화학당 그림
최용신 선생의 천곡학원 그림
소래교회최초모습(김학수화백그림)
유관순 열사(김학수 화백 그림)
토마스 목사 순교화
조만식 장로 집회
최권능 목사 전도
주기철 목사
이상재 선생
서상륜 장로
이수정 선생
김창식 목사
길선주 목사
부흥사경회
한국인 최초의 예배당 소래교회 사진
순교자 사진
토마스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1839년 ~ 1866년)는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토마스 목사라 지칭한다. 영국 웨일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머스의 아버지는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았다. 런던 대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부인과 함께 청나라로 떠났다. 부인은 몇 달간의 여행 끝에 샹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으나 언어에 소질이 있었던 토머스는 중국어를 익힌 뒤 베이징에 머물며 교사로 근무했다. 중국에서 조선인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1865년에는 조선에 잠입해 성경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866년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으로 탑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났다. 이 배는 대동강에 진입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만경대에 상륙, 조선군 이현익을 납치한다. 모래톱에 좌초된 후 평양의 조선 군대와 전투끝에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조선측에서는 7명이 사망하였다. 선원들은 저마다 목숨을 구하려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혼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오,하나님이시여!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못한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 은헤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 다음,그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큰 상자를 갑판 위로 끌어 올렸다. 그 속에는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성경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성경책을 불에 타지않게 갑판 위로 끌어올려 가지고 한권 한권 언덕을 향하여 힘껏 내던졌다. "복음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애타는 마음에서 그는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언덕에까지 닿지 못하고 물속에 떨어졌다. 이제 불길은 배를 완전히 에워쌌다. 토마스 목사의 옷에도 불이 붙고 그의 머리칼도 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그는 헤엄쳐 언덕에 기어 올랐으나 군중들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사 박규수앞에 끌려 갔다가 다시 대동강 하류에 있는 양각도로 호송되어 참수 되었다. 이때에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으므로 평양에서의 초대 교인이 되었다. 평양은 그 뒤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고 전국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피가 흐른 대동강 수를 마시는 많은 사람들이 그후 오래지 아니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만이 아닌 것이다. 조선에서 기독교 신자가 늘어나면서 토머스를 순교자로 기념하게 되어 유명해졌다. 특히 평양의 장로교 계열 교육자인 오문환이 순교기념회를 발기하고 서해 섬 지역 선교를 위해 토머스의 이름을 딴 배를 띄우는 등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토마스목사 기념교회
주기철 목사(1897-1944)
주기철은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에서 주현성장로의 7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입학했으나 눈병으로 중퇴 중 웅천교회 집사시절 김익두목사의 부흥회에서 "성신 받으라"는 설교에 감명을 받고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1926년 30세에 평양신학을 졸업한 그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하여 기도와 성경연구를 강조하여 경이적인 300명교인을 확보하고 부산고등성경학교에 출강 후배양성에 힘썼다.1931년 5년간의 목회를 후배목사에게 맡기고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 1년만에 3백명으로 끌어올렸다. 가는교회마다 부흥시킬뿐 아니라 그의 설교가 한국교회에 폭팔적인 인기를 더한 것은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며 불의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는 교권이건 선교사이건 권력이건 가리지 않았다. 일본총독부가 예배시간에 전쟁승리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드려달라는 공문을 교인들에게 그대로 읽어주고"불의한 자는 망하게 하고 의로운 자는 흥하게 하여 주옵소서"기도를 드렸다. 이 무렵 평양 산정현교회는 길선주목사 후임으로 주기철 목사밖에 없다고 청빙하여 1936년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주목사는 이듬해 7만원 거금을 드려 교회를 건축했다.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만 묻고 결의할때 함부만 선교사가 "아니오"를 외쳤고 주기철 김선두 이기선 등은 이미 1938년 2월 년부터 구금해 있었던 상태였고 1차 2차 3차 4차 구금이 있었고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가 담임한 교회도 교회가 폐쇄당하면서까지 담임목사를 도왔다. 그가 일경에 끌려가면서 교인들에게 피맺히게 증거한 '일사각오'설교는 주기철목사의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와 함께 유명하다.(교회100주년기념설교집 참고) 1939년 8월 농우회 사건에 관계시켜 구속 7개월간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고문을 하며 목사직을 사면하라고 강요했지만 거절했고 ""3일간 밖에 나가 생각하고 오라"고 석방시켰다. 1940년 일경은 고문해도 죽인다고 위협해도 듣지 않자 3개월 이내에 목사직을 사면하면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1940년 5월 일경은 산정현교회를 포위하고 설교까지 못하게 하였지만 "설교권은 하나님이 주신 거이니 -- 경찰이 제재할 수 없다"고 뿌리치고 설교를 했다. 몇일 후 일경은 그를 체포해 투옥하고 산정현교회로 하여금 목사직에 파면시키라고 강요했다. 고문으로 눈병이 악화되고 폐와 심장이 약해졌어도 기도와 말씀으로 이겼다. 만신창이가 되어 병감으로 옮겨진 그는 "내 여혼의 하나님이시어 나를 붙드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끝으로 1944년 4월 21일 숨을 거두어 아버지의 품으로 갔으니 그의 나이 49세로 평향 돌밖 --- 그의 손자 주승중목사는 현재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이다. (글 출처- http://kcmma.org)
손양원목사(1902-1950)
손양원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양군 칠성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종일씨는 손양원이 7세때 예수를 믿어 장로가 되었고 그의 두 동생 손의원 손문준도 신학글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보통학교시절 궁성요배를 거절 등교정지를 받았다. 중학교학생때 노방전도를 하는 등 졸업무렵 "몸바쳐 일하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렸다. 중학교졸업후 1934년까지 방어진교회, 남창교회,양산교회,감안 나병원교회,남부민교회,원동교회 등지에서 조사로 사역. 총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손목사는 신사참배를 극도로 미워하여 강단뿐만 아니라 전구교회에 부흥회를 다니며 그 부당성을 공격했다. 1945년 해방전까지 6년동안 광주,서울,청주형무소로 이감을 계속했다. 옥중에서 찬송과 기도와 독경으로 일관 "옥중성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해방후 애양원교회로 돌아갔을 때 교우들은 손목사를 부모처럼 따랐다.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10가지 은혜의 감사를 드렸다. 두 아들을 총살한 좌익학생 안재선을 자기 양아들로 삼아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영예로운 벌병을 갖게 되었고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소설과 영화도 만들어 유명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동년 9월 28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서울이 수복되는 날 9월 28일 전세가 역전되어 퇴패하는 공산군에 의해 미평과수원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그는 공산군의 총을 맞고도 환하게 웃으며 스데반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아버지의 나라로 옮겨갔다 (글 출처- http://kcmma.org)
박관준은 1875년 4월 13일 평북 영변에서 토호 박치환의 4념 2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체 많은 돈을 가진 부호의 아들인 박관준은 어릴적 방탕하여 한때는 병까지 얻게 되었다. 이 병으로 인하여 인생의 허무 감정을 갖게된 그는 나름대로 심령의 안식을 얻기 위해 구도를 했다. 불교는 물론 侍天敎에서 3년을 수도생활까지 했으나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던 중 1905년 30세 되던해에 묵상에 잠겨있다가 "십자가 종교에 들어가라 ."는 영음을 듣고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의사가 되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이고 예수를 위해 사는 길이라고 믿고 의학을 해서 십자의원을 개원해서 환자들에게 전도하기에 힘썼다. 그러다보니 치료비를 받는 경우보다 투입하는 약값이 더 많았다. 십자의원을 개원한 후 교회를 개원해 장로가 된 후에는 평양으로 이주해 병원을 개원했다. 1935년 그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나를 위해 피를 흘릴자가 누구냐?" 는 부름에 "제가 흘리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나의 십자가 군병이 되거라"라는 계시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박장로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미나미총독을 면회하여 결판을 내려고 평양에서 13회나 서울총독부에 올라왔으나 면회를 못하고 그러는 가운데 "모든 종교는 일본제국의 승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단체법을 상정 통과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보성여학교 교사직을 사임한 안이숙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신학교에 재학중인 25세 박영창과 함께 전조선총독 우까끼, 문부대신 아라끼.척무장관 야다를 찾아보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1939년 3월 22일 세 사람은 방청권을 구입하여 제74회 일본제국의회(일본제국중의원-국회의사당) 방청석에 들어가 국회가 사무절차를 밟아 종교법안이 상정될때 야스후지의원이 단상에 오르는 순간 박관준장로는 번개처럼 뛰어나가며 손안에 든 대 봉투를 아래층 의사당안으로 내 던지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다"소리를 질렀다. 의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박장로는 즉석에서 체포되고 경시청에 32일 구금되 있는 동안 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가에 대해 앞다투어 보도했다. 한국으로 송치된 그는 1941년 봄 천황에 대한 반역자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했음은 물론 1945년 1월 1일부터 7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금식기도 70일째 된는 3월 10일 내일은 밖으로 나가 3일간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으로 오라" 하는 소리를 들었고 1945년 3월 11일 병보속으로 나와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했다. 박장로는 병원에서도 문병자들에게 전도하고 "신사참배는 안됩니다 ---열심히 예수를 믿읍시다"라고 하다가 3일 후인 3월 13일 오전 10시 가족이 모인 앞에서 이사야 11:10-16절을 유언을 하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평양교회의 공동묘지인 돌박산에 순교자 주기철 최봉석 목사가 묻혀있는 그 옆 자리에 안장 되었다. 그 후예로는 박영창목사가 뒤를 이었다. 제국의회에 보내는 박장로의 경고문은 다섯조목이다.(순교신서 3권 제1집 175쪽에 있음) (글 출처- http://kcmma.org)
이기풍 목사(1865-1942)
이기풍은 1865년 12월 23일 평양 토박이로 태어났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2세 때 붓글씨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비범한 소년이었다. 평양깡패 이기풍은 30세가 되던해 일로전쟁당시 원산으로 피해 있던중 원산 시내에서 스왈렌 선교사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믿은후 과거 국가적 상황이 뜻을 펴기에는 너무 암울했던 시대에 깡패가되어 평양거리에서 그가 때려눕혔던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가서 울면서 회개했다. 마포삼열을 도와 함경도 지방을 순회하는데 앞장섰고 1903년 개교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한국인으로는 평양신학교 최초 7인 졸업생이자 한국교회 최초 7인목사가 되었다. 1907년 독노회 결정에 의해 이기풍목사는 제주도 선교가가 되었으나 제주주민들로부터 사교라고 몰매를 맞고 굶주려 쓰러졌다가 어느 해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때도 있었다. 그는 제주민들의 모진 학대에도 불구하고 분투노력끝에 제주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협재, 두모, 용수, 고산, 모슬포, 중문, 법환, 성읍, 세화, 조천 등에 교회를 세웠다. 1918년 3월 광주 북문안교회(현광주제일)당회장으로 부임 교회를 부흥시키는 한편 1920년에는 전남노회장이 되었고 1921년에는 총회 제10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23년 전남 순천교회부임 그 이듬해 고흥교회로 부임 4년동안 교회부흥에 전념하는 중 제주도 성내교회에서 청빙 망서렸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4년을목회하여 자립교회로 만들어 미련없이 후배에게 맡기고 1931년 벌교교회로 부임 3년만에 3백명을 넘는 교회로 부흥시켰다. 노회에서 전남 여수군 남면 우학리 섬에 교회를 개척 봉급도 식량도 없는 자비량교회로 아무도 자원하는 기색이 없자 이목사가 자원하고 나서 1934년 70노구를 이끌고 우상숭배로 찌들은 낙도선교에 도전 돌산도, 완도 등지를 두루 돌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덧으로 기독교의 순수신앙에서 변절하기를 강요했으나 이기풍목사는 자신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동료목사들에게도 거부하기를 권면했다. 결국 일경은 사람을 보내어 회유를 유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자 변절을 강요한 일제의 요구를 거부함으로 부정선인으로 몰아 체포하고 고문으로 변절을 강요했으나 이목사는 "예수님이 날 배반한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예수님을 배반하겠고 죽을때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목숨이 그리 아깝다고 변절까지 하겠오 난 못하오" 강도를 높여 고문을 했으나 70고령의 이목사는 끝내 몸이 약해져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혼수상태에서 헤아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웠다가 1942년 6월 20일 77세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1953년 5월 9일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교묘지에 이장했다. 후예로는 외손주 이성근 목사가 장신59기로 졸업 목사로 시무하다가 은퇴하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신석구 목사 (1875-1950.10)
신석구는 1875년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유학자 신재기 기의 2남으로 출생했다. 재주가 비상하여 10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줄줄 외울정도였고 11세에 향리서당 훈장이 되어 가르쳤다. 1908년 33세에 왓슨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기독교를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구국운동 차원에서 받아들이었다.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24인 결사대조직 항일투쟁 지도자로, 3.1운동으로 2년 6개월 진역형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 1908년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교역의 길에 올랐다. 1912년 9월에는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어 홍천 가평 춘천등지에서 목회하며 민조 계몽과 민족정신 함양에 몰두하였다. 1917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수표교회 부임했다. 3.1 운동에는 YMCA간사였던 박희도를 주축으로 이필주 신석구 오희영 김창준 박동완등이 민완하게 움직였다. 3.1운동이 터졌을 때는 33인 민족대표로 활동했고 24인 결사대를 주축으로 만세를 부르며 창령경찰서 및 영산 주재소를 습격 항일 투쟁을 지도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후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했다. 8.15해방후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기를 애원 협박했지만 오히려 그는 감리교 서부연회를 위시하여 기독교자유당에 더 휩쓸려 있었다. 1946년 김일성이 3.1운동을 주동했다고 속이고 김일성을 찬양하도록 했는데 민중들은 속지 않고 3.1절 행사 자체를 뒤죽박죽 만들었다. 정치보위부는 신목사가 폭도을 주도했다고 체포하고 3개월간 모진 고생을 하고 나왔다. 계속 공산정권 비판 하다가 1948년 4월 19일 새벽 '반동결사죄'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6.25가 발발하자 1950년 10월 10일 76세 민족해방을 외친 노 지도자는 사형장에 끌려가 총살 순교했다. (글 출처- http://kcmma.org)
최봉석(권능)목사 (1869-1944)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일명 최권능목사로 더 알려진 유명한 목사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최준서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평양의 강동현 미곡창장으로 재직했고 그는 16세까지 구학문을 익히다가 1885년 평양감영의 통인으로 발탁이 되어 공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공직수행 중 국고손실로 귀양을 가있는 사이에 아내의 산후조리로 의원이었던 삭주교회 배유계 영수를 찾았을때에 "예수믿고 회개하여 새사람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의 머리에서 '회개'라는 말이 떠나지 않고 있던 중 재산 한푼 없는 거지 행색으로 잠시 평양 본가로 돌아왔다가 감리교 노불선교사를 만나 회심하고 평양뿐 아니라 상주까지 내려가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처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디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여보 어찌 천륜을 이렇게 매정하게 끊을 수 있겠오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하는 최봉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아들을 하나씩 맡기로하고 헤어지면서도 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더욱 예수에 미쳐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1907년 최봉석의 나이 38세에 벽동교회 조사가 되었다. 봉석의 목회는 그 성격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교인들의 담뱃대를 모아 꺾어버리고, 첩있는 사람은 원입을 못하게 했고 성수주일 못하면 세례를 불허하고 한달 결석이면 책벌 수상제물 금지 불신영혼 엄금 등 엄격하기만 했다. 신학교를 7년 다녔는데도 유급이 되자 교수들을 찾아가 기도하자고 해놓고"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졸업장을 주어 목사가 딜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아멘시키고 졸업장을 받았다.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로 14년간 만주에서 고독과 배고품 모진 배척과 싸우며 전도에 전념해 28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4년 만에 평양에 돌아왔을때 그가 외치는 "예수, 천당"소리는 평양의 새벽을 깨웠고 전도 못하는 교역자들을 '벙어리' '송장'이란 말을 거침없이 했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에 "총회는 사탄의 회로 전락했다"고 반대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39년 5월 15일 70세에 6년간의 긴 옥고가 시작되었다. 일경은 그를 세가지 죄목 1. 항일사상 선동 국체물란 2. 일본천황 무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자. 3. 선교사를 통한 미국비밀공작원 으로 몰려 두 차례에 걸쳐 무려 6년의 옥고를 치루게 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4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의사들의 만류에도 40일 금식을 마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눈동자가 풀어져 있었고 병원에서 5일간 버티다가 1944년 4월 15일 오후 1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하신다"며 찬송 289장(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후--)찬송을 가족들과 함께 부르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으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김유순 목사(1882-1950)
감리교 초대 감독인 김유순 목사는 1882년 12월 27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익혔다. 그러다가 구학문 만을 가지고는 미래 역사에 주역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신학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나이 21세에 평양으로 나와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고학이었다. 그는 낮에는 공부하고 아침 저녁으로는 땀흘려 일하며 어렵게 중학교를 마치었다.1904년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가 된 김목사는 미국에 체재하며 후배양성에 힘써 달라는 미국연합감리교 본부의 만류에도 주님이 자신에게 공부의 길을 열어준 것은 일제하에 신음하며 울부짖는 민족에 대한 향도의 역할을 하라고 하신 것인데 일인의 안일만을 위할 수 없다고 하며 뉴저지 마테솔신학대학 강사 자리도 마다하고 1920년 서둘러 귀국했다. 일제하에 위축된 교인들에게 그의 출현은 희망이요 총리원은 그를 부흥사로 명명하고 북쪽으로는 신의주 강계 헤산 남쪽으로는 부산 목포 여수 순천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 그의 발에 밟히지 않은 땅이 없었다 . 김목사의 민족 지향적 설교에 청중은 울었고, 외로움을 달랠 수 없어 찾아오는 인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몇년동안을 순회부흥사를 강제 사임당하고 지역교회 담임자로 부임한 교회는 홍성교회였고 이어 해주교회 천안읍교회 백천교회 만리현교회 북아현교회 를 시무했다. 그가 이렇듯 여러교회 목회자로 떠돈것은 감리교 툭유의 교직임명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나름대로 민족적 애국특성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재건파와 부흥파의 4년간의 싸움은 결국1946년 9월 부흥파는 총회를 열어 강태의 목사를 감독으로 재건파는 1948년 1월 장석영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여 두개의 감리교가 팽팽하게 맞서 있을때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세계에 대한민국 독립을 선언하게 되자 감리교 평신도들이 합동운동을 주도하게 될때 이 운동을 주도한 분이 김유순목사로 기독교감리회로 통합하게 되어 1949년 4월 26일 통합총회는 김유순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김유순목사가 총회장이 되고 1년 동안 교단 발전에 힘쓰다가 6.25전쟁이 발발 하여 "감독된 자로서 자기만 살겠다고 교단과 양들을 버리고 피난을 간다는 것이 덕스럽지 않다"고 하면서 적치하에서 끝까지 교단을 지키다가 공산군이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내린 교역자 납치 및 사살령에 의하여 1958년 8월 23일 정치 보위부원에 체포당하여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어졌으니 김감독의 연세 68세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남궁혁 목사(1882-1950)
남궁혁은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는 평양감사인 외조부 임씨를 따라가 평양 감영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한문을 읽었던 그는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기전 백일장에 나가 장원급제를 하는 놀라운 총명성을 보이기도 했다. 장로회신학교 교장직을 끝까지 고사한 남궁혁 목사 그는 배재학당에 나가기 전 백일장 장원급제를 할만큼 총명한 그는 배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목포세관장까지 했다. 선교사에게 발견되어 전도를 받고 언더우드와 에비슨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사랑방을 빌려주어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게 한 김윤방의 딸 정신출신 김함라와 결혼했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실력있는 인재들이 속속 모여 들어 김성수, 김병호를 비롯해 장면박사의 부친이 그의 제자였다. 영어실력은 천부적이어서 미국사람보다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고 선교사들은 그를 미국에 보내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게 했고 이어서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해 교수하랴 성경주석 번역하랴 신학지남의 편집 책임까지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옹졸한 학자가 아니었다. 명문가 양반답게 인격적이고 후배들을 친히 이끌어주어 길을 얼어주는 아량 넓은 이었다. 그래서 박형룡박사도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그가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귀국했을 때 평신의 교수직을 마련해 주었고 김재준박사가 가난한 문사로 떠돌때 사재를 털어서 양식을 도왔고 이성휘 송창근박사의 후원자로 진로를 열어줌으로 한국교회에 활기를 찾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신학교가 폐교조치당하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곧장 상해로 망명해 거류민단장이 되어 교포들의 생활을 돌아보며 함께 눈물흘리고 위로를 하며 살다가 해방이 되어 1946년 동포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해방훈 미군정하에서 정부의 적산관리처장으로 부임하여 공무를 집행하다가 재무세관국장 목포 세관장 재무부 세관국장직을 연이어 수행하게 되었다. 2년 간의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한국교회협의회 총무직을 수행하고 평양노회장에서 총회장(21대)까지 역임하였다. 항일운동으로 일경에 쫏기는 이승만을 집에 숨겨주고 해외로 방명시키기까지 한 그였지만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교회연합일에 묵묵히 헌신하다가 6.25를 만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이라고 대공 방송을 강요했지만 입을 다물고 물조차 먹지않는 금식을 하다가 쓰러져 아름다운 최후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도 한다. (글 출처- http://kcmma.org)
박봉진 목사(1890-1943)
박봉진은 1890년 경기도 평택의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한학을 공부했고 집안에 붙잡혀 농사를 하다보니 아무 희망도 없어 무엇인가 뜻을 펴기 위하여 가출하여 수원으로 가게 되었다. 돈 없이 수원으로 나갔지만 갈곳도 없었다. 마침 그는 거리를 방황하다 수원교회 청년회원들의 인도로 교회를 가게 되었다. 외로웠던 그가 교회에서 인간적인 환영을 받고보니 너무도 고마웠다. 갈 곳도 없었던 그는 저녁이면 교회에 나가 기도한다고 하며 꾸부리고 잤고 낮에는 공사장을 떠돌며 날품팔이를 하면서 믿음이 커갔고 교회생활도 본이 되었다. 한 권사님의 제안으로 권사님 집 금은방에서 세공기술을 익히고 기술자가 되고 신앙도 놀랍도록 성장하고 자수성가하여 고향 평택으로 돌아와 어엿한 사업가로서 일어나 돈을 갈퀴로 긁듯했다. 평택은 무교회 촌이라 주일이면 산으로 가서 기도드리다가 "네가 평택에 교회를 개척하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한옥을 세내여 교회를 시작하고 장사보다 교회개척이 주업무가 되어 이익금을 모조리 투입해 교회부지를 사고 교회당 건물을 올리고 교역자까지 모시고 장로로 봉사하였다. 그의 나이 42세에 성결교 계열의 신학교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 하고 학업중에도 토요일이면 장호원으로 내려가 개척교회를 하고 교회를 부흥시켰다. 193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여주지방 하리교회로 부임했다가 철원교회로 갔다. 철원교회 부임한지 다음주일 신사참배 거절한 이유로 일경은 그를 체포해 감금했고 그는 그후 여러번 감옥에 들락겨렸다. 1941년 일제는 선교사들을 강제 출국시키고 교회문에 못질을 해 폐쇄시켰다. 박목사는 거리로 나와 "예수믿으시오"를 외쳤다. 그의 노방전도는 일본이라는 큰 세력에 도전하는 행위였고 그는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숱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자기를 고문하는 경관들을 향해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다고 외치고 천황이 신이 된다면 일본의 멸망은 자초하는 것이라고 외쳤다. 온몸이 상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맞으면서도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일경들도 그의 인내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1943년 5월 27일 철원경찰서에서 "남편을 네려가시기 바랍니다"라는 통보가 왔다. 이같은 통보는 죽기 직전에 보내는 통보다. 들것에 들려나온 박목사는 손 하나 움지이지 못하는 참혹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였다. "일경은 장질부사가 걸렸다고 접근을 막았지만 교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초상집처럼 울었다. 박목사는 교우들과 부인의 손을 잡고 "나는 지금 지옥에서 빠져나온것 같소 이곳은 마치 천국같구려"하며 기도와 찬송을 부탁하면서 찬송을 들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다음날 평화로운 얼굴로 아버지의 나라로 옮겨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2년 앞둔 그의 나이 57세였다.
(글 출처- http://kcmma.org)
양주삼 목사(1879-1950)
양주삼은 1879년 1월 25일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리에서 출생했다. 유년시 서당에서 한문수업 20세 되던해 1898년 뜻한바 상경 한문전도지를 받아보고 호기심에 교회에 찾아갔다가 귀의하고 노동을 하면서 1900년 10월 양잠학교를 졸업했다. 레이드목사가 설립한 배화학교 기도처에 출석하다가 그 교회 윤치호의 인연으로 1901년 상해로 건너가 수학하고 이듬해 세례를 받고 미국 밴더필드대학 신학부와 예일대학을 거쳐 콜롬비아대학에서도 수학했다. 1906년 학업중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교회설립 훌륭하게 목회를 했다. 1908년 대도란 월간잡지를 발간 샌프란시스코 교회가 주관을 했는데 주필을 3년간 맡았다. 대도는 한국인의 근대화를 위한 계몽과 기독교 선교를 사시로 하고 있었다. 1912년 10월 13일 양주삼은 미국 남갑리교회 떼니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5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협성신학 교수겸'신학세계주필'을 하면서 자교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는 중 윤치하는 양목사에게 송도고교 부교장으로 초빙했다. 1919년 해외선교10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도 그 기념행사를 치루기 위해 양목사가 총무로 선임되어 전국을 상대로 활동무대가 넓어졌다. 1919년 정월을 기해 신학세계를 선교100주년 기념호'로 출간했고 이때 비로서 감리교회 장정과 규칙 전부를 양목사가 친히 번역해 게재했다. 선교100주년 기념에 해외선교를 지향하기로 하고 도마련 선교사와 양주삼이 선정되었으나 1919 고종승하 3.1운동으로 기념식마저 1년후로 연기했다. 애국적인 기독교인들은 속속 체포되고 교회는 페허를 방불케 될때 감리교는 1년간의 기간을 영적 부흥은동을 해외로 정하게 되어 100주년 5대기념 목표를 정했다. 전도대 편성 쪽복음 가가호호 방문 각처를 순회전도 결신자 1만명은 반년내에 달성했다.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시베리아로 떠나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백명씩 되어 양주삼은 '저 양들을 누가 돌볼 것인가? 예수의 목자들이다'하고 뜻을 정하고 1920년 직접 선교지를 만들고 책임자가 되어 눈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았다. 1925년 철원지방 감리사가 된 그는 1927년 기독교연합공의회 화장 피선. 서울지방 감리사 겸직했다. 1930년까지 감리교는 미국처럼 남북감리교로 나위어져 있었으나 양목사의 노력으로 통합되어 초대 감독에 양목사가 추대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일제는 총력을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한국교회 신앙생활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1941년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킨 후에는 선교사들추방 교역자들을 한없이 들볶았다. 선교회의 재단관리인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선교사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영수증으로 처리, 문서관리에 엄겪했다. 해방후 감리교 재산 확보에 엄천난 도움을 주었다. 1949년 양목사는 해방된 조국 건설을 위하여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고 6.25동란시 수많은 전쟁 이재민들과 월남한 동포들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다. 1950년 8월 23일 교역자 체포령에 의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기었다. 새로히 증축된 종교교회당은 양주삼목사의 기념 교회당으로 세워져 지난날의 그의 업적을 말해준다. (글 출처- http://kcmma.org)
전덕기 목사(1875-1914)
전덕기는 1875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일곱살이 되던 해 부모를 여의고 서울에 있는 삼촌집에서 가난을 사기며 살았다. 그는 17세에 상동병원의 의사이며 상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였던 스크랜톤 선교사를 만나 새삶으로 접어들었고 선교사를 따라 전도사역을 하다가 그의 나이 21세 되던해 1891년에 세례를 받았다. 상동교회 속장으로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사상을 민족운동에 접목시켰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엡윗청년회가 총궐기하여 일제 침략정책에 항거하다가 일경의 미움을 받고 1906년 6월 13일 전격적으로 해체되었으나 공옥학교를 세워 불우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고 청년학원을 설립 민족운동의 구심세력으로 발전시켰다. 청년학원에 나와 뜻을 합친 동지들을 상동파라고 불렀고 이들에 의해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이 전개되었고 헤이그 밀사파견등을 감행했다. 1906년 국민교육회를 하달하고 목사 안수를 받던 1907년에는 안창호 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민족운동과 교회운동을 동시에 추진하던 청년지도자 전덕기는1907년 목사 안수를 받고 상동교회 3대목사로 부임했다. YMCA창설에 동참해 교육목회에 두각을 나타냈고 공덕교회 세검정교회 청파교회 북장교회 사촌교회 녹번교회 등을 개척했다.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 주도자로 체포되어 굶주리고 고문당해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발전하여 출감한 후 교회로 돌아왔으나 건강이 너무 다쳐서 재기하지 못하고 1914년 3월 23일 정오에 상동교회 사태에서 운명했으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남대문 일대의 불량배들까지 몰려와 죽음을 슬퍼했고 상여행렬은 10리에 늘어섰고 행렬중에는 기생 백정 상두꾼들이 많이 끼어 상여행렬을 더욱 석연하게 하였다. 일경은 경기도 고양군 두모면 수철리에 있는 그의 무덤마저 파하기를 강요했고 결국 유해를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으니 그의 무덤은 이세상에 없고 다만 위패만이 동작동 국립묘지 무연고 선열제단에 다른 애국자들과 같이 쓸쓸히 서있을 뿐이다. (글 출처- http://kcmma.org)
문준경 전도사 (1891-1950)
문준경은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신안군 임태면 수곡리에서 문재경씨의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기가 남보다 뛰어났지만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부친은 준경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나이 17세가 되는 1908년 3월 18일 정근택이란 청년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갔지만 소실을 얻은 남편은 시아버지가 돌아가실때까지 20년을 아내를 돌보지 않았다. 남편있는 생과부가 된 그에게 시아버지는 한글을 가르쳐주었고 결혼 20년만에 돌아가셨다. 시부가 돌아가자 그는 큰 오빠기 있는 목포로가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든 중 전도자를 만나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만나자 마자 의기투합해 함께 지내며 울음을 쏟아 놓았고 이때부터 목포 북교동교회에 발을 내 딛었다. 북교동교회 이성봉목사가 시무했고 문준경은 입교하고 6개월만에 학습세례를 받고 1년만에 집사가 되었다. 친정에가서 부모게게 예수를 전하다가 악신을 접하고 친정을 서양귀신에 망하게하려고 왔느나면서 아버지는 딸의 배를 거더차고 수채구멍에 오물을 뒤집어 씌었다. 이같이 친정부모에게 박대를 당하고 쫏겨나오면서도 원지 슬프지를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녀는 세상의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1년 상경하여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고 6년을 졸업할때까지 도서지방 순회전도사가 되어 교회 셋 기도처 셋을 세우고 성서학원을 25회로 졸업하면서 소실과 함께 사는 남편이 있는 임자도에 첫번째 개척 지로 삼았다. 버린 남편이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를 전도하면 그녀의 목회가 방해받지 않을 것이란 신념때문이었다. 재직중 6교회를 개척한 그는 졸업하고 다도해 773개 섬중에 122개 섬을 떠돌며 1년에 고무신을 9켤레나 떨어뜨리면서 목회를 했다.그의 전도의 특징은 섬마을 사람의 생활속에 들어가 함께 우는 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전염병으로 죽으면 염을 해주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가 발생하면 즉시 찾아가 위로해주고 육지를 오고가며 섬주민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짐꾼이 되어 주었고 주기를 좋아하는 그는 신던 버선이라도 벗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같은 섬에 목회하던 양도천전도사 백정희전도사를 다른 섬으로 피난을 시키려 했는데 배를 타려는 순간 공산 폭도들이 몰려와 두 전도사를 개패듯이 두들겨 패어 파죽음을 시켜 놓고 죄질이 나쁜 문준경 양도천 이봉서 세전도사는 목포 분주소로 옮겼다. 9월 28일 배가 목표에 도착하니 인공기는 살아지고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내무서원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하였다.그들 일행이 떠나는 날 밤 중동리 무수한 양민이 공산폭도들에의해 학살을 당했다.하나님이 세전도사를 빼내서 살리신 것이다. 문전도사는 그길로 은신하고 있는 이성봉목사를 찾아갔다. 난리 후에 중동리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이목사가 만류했는데도 문전도사는 "저때문에 무고한 성도 한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더구나 백전도사가 대신 붙잡혀 옥고를 치를텐데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중동리로 돌아가 내무서를 찾아가 백전도사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백전도사는 풀려나 순교한 문전도사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루어주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중도면 중동리에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 예배당이 아담하게 서있다. 그녀가 생전에 목회한 교회에서는 10명의 목사가 배출되어 순교 그루터기로 우뚝 섰다. 이만신 이봉성 이공신 이만성 이경순 이인재 안승갑 박훈용 박문석 김신배 목사가 그들이다. (글 출처- http://kcmma.org)
조만식 장로(1883-1950)
평야YMCA총무가 한국의 간디가 된 것은-조선 물산장려회'를 지직하면서부터이다. 그는 금주,금연,폐창운동등 절제운동을 표방 국산품장려운동으로 민족자본 육성의 업적을 이룩했다. 이같은 운동들은 3.1운동 후 강력하게 대두된 사회주의 계열의 교회에 대한 비판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독교 주도의 사회운동으로 정착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그는 자신이 작사작곡한 '물산장려가'를 전국으로 보금하여 물산장려운동을 진행시키는 한편 자신은 말총모자와 편리와 및 개량 한복을 입고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여 민족자본 축적에 기여했다.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양 진향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대의 선비였고 어려서부터 한학자 장정봉문하에서 수학 15세에 사서삼경을 마치고 관직보다는 대상의 길을 가기 위하여 포목상을 경영하게 되었고 사업적 수완이 뛰어나 벌써 술 잘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22세시에 한학 동문 한정교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어 술담배를 하루아침에 끊는 결단을 보이기도 했다. 때는 1894년이었다. 다음해 고당은 사업을 정리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 재학하는 중 평양 태극서관의 주인 안태국과 민족주의자 도산 안창호의 연설과 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졸업과 동시에 도오꾜 세잇소쿠 영어학원에 입학 간디의 무저항 주의와 민조주의 사상을 배워 평생 그의 사상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1911년 28세에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 이 학교에서 송진우 김성수같은 동지를 만났다. 1909년 YMCA회관에서 도꾜한인교회 창립멤버로 초대영수로 활약 한 교파에 예속을 원치 않는 장.감 양파연합교회 전통을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1913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도미유학을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자 이승훈의 요청으로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족학교 오산중학교 교사로 부임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에 승진했다. 1919년 3.1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교장직을 물러나기 까지 5년간 그는 교장 교사 사가 급사로 봉사했다. 3.1운동으로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다시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일경의 불허로 평양 YMCA총무가 되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함으로 항일 독립투쟁을 "힘이 없으면 죽는다. 힘을 키우자."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1923년 김성수 손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1926년 숭인상업학교 교장으로 몸담았으나 그해 융희황제의 국상을 당해 6.10만세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영 교단에서 쫓겨나고 말았다.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중앙위원겸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일제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관서 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 원기를 북돋았고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 언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백선행기념관과 인정도서관을 개설하여 시문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게 한것도 이때이고 한인 사회 소송사건을 맡아 한인 스스로 해결하는 사랑방 담합장을 마련한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거수 일투족 제약을 받고 거기에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감방에서 병을 얻어 1938년 3월 10일 운명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학병에 지원한 것을 가지고 조장로가 학병지병을 격려하는 강연을 한다고 신문에 대대적이 선전을 했으나 그 날자를 기해 평양 기흘병원에 입원을 해서 위기를 넘겼다. 창씨개명 반대. 학병지병 격려강연 강요 거부. 조선군사령관 이다가끼 대장 면담 거부 등 강서로 피신 숨막히는 생활을 하다가 8.15를 맞았다. 그는 8월 17일을 기해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활동하기를 강요했으나 거절하고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결성했지만 1년도 전에 와해되고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내라고 강요했지만 반대하자 고려호텔에 감금해버리고 말았다. 조선민주당 청년 당원들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침입했을때 "북한 동포를 두고 나 혼자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련다."라고 했다.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간디의 무저항 불복종투쟁을 공사당을 향하여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는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심장병이 악화돼 있었고 늑막염까지 겹쳐 병원에 이송돼 있었다. 북괴는 1950년 6월 조만식 선생을 간첩 이주하, 김삼룡 등과 교환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이는 남침을 위한 위장 계략이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산당에게 학살됨. (글 출처- http://kcmma.org)
백인숙 전도사는 1917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안동중학교를 다니면서 마전교회에서 믿음을 키웠다. "죽어도 예수를 믿겠느냐?" 공산당의 추상같은 질문에 백인숙은 조용히 미소를 삼켰다.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광영이겠습니다" 공산당의 얼굴은 이내 일그러졌다. "이 년을 저 흙 구덩이 속에 처넣어" 백인숙은 몇 사람의 청년들에 이끌리어 흙 구덩이 속에 처박혀졌다. "흙으로 묻어" 흙을 뜨는 삽소리만 고요한 정적을 깼다. 34세의 동정 전도사 백인숙은 그렇게 예수를 위해 생매장되어 순교의 길로 달려갔다.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야 해 시집 가거라" 과년한 딸이 시집가서 잘 살아 주기를 바란 부모님들의 백인숙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 싫습니다. 저는 시집가지 않고 예수만 섬기겠습니다" 부모들은 펄펄 뛰며 금족령을 내리고 학교를 중퇴시켰다. 금족령에 얽매여 집에 감금당해 있을 수 없는 그는 그길로 집을 나와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가서 1919년에 일본 요꼬하마 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주기철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 여전도사가 되었다. 주기철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경찰에 끌려가 수감되고 2개월만에 출옥하는 등 교인들을 격려하며 그는 차라리 옥중에서 죽기를 바랐지만 여러번 끌려가도 번번히 몇달이 안되어 풀려났다. 1944년 4월 21일 그가 믿고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가 죽어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 일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매를 맞고 옷이 찢기면서도 참석했고 백전도사는 주목사 장례식에 슬피 울었다. 일경은 장례가 끝나자 옥에 가두었지만 그는 옥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굴하지 않게하소서 어떤 경우에도 연약한 꼴을 보이지 않게 하소서"기도했다. 백전도사 연약한 꼴을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애국운동을 하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일제에 저항할 때는 여인들의 몸을 발가벗겨 남자들 앞에서 갖은 수모를 다 주었고 담배불로 지지고 곤욕스러워 땀을 흘리면 어름물을 뒤집어 씌웠다. 백인숙도 예외가 아니였다. 여수들은 폭도로 변한 간수들의 노리개가 되어 갖은 폭행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백인숙은 이때도 2개월만에 풀려났고 그 이듬해 해방이 되었다. 공산화된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김철훈 정일선 두 목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했다. 백인숙은 1950년 6월 20일 공산당에 체포되어 생매장 되어 순교했다. (글 출처- http://kcmma.org)
<상동교회 관련 전시물>
3층 전시실 상동감리교회 코너
상동교회 소개
초기 상동교회 사진
상동교회 창설자 스크랜튼 선교사 편지
수업증서
1991년 상동 잡지
전덕기 목사
상동교회 100년사
최초 상동교회 대지 구입 계약서
<주기철 목사 관련 사진 자료>
웅천교회 집사 시절(1921년 신학교 입학)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1922-1925)
주기철 목사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 사진 (앞줄 중앙)
종교교육지도자 수양회(1930)
마산 문창교회 시절(1931-1936)
평양 산정형교회 예배당(1936-1944)
평양 산정현교회 시절(1936-1944)
주기철 목사 성경 (산정현교회 시절)
합천교회 부흥회
주기철 목사 장례식(1944)
건국공로훈잔(1963)
<3층 한국교회 순교자 명단>
3층 한국교회 순교자 명단
순교자 명단
3층 한글성경 번역의 변천 전시물
성경번역 역사 전시
피살 종교인들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仁善(김인선)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피살.
劉鍾鶴(유종학·63) 명동교회(감리교) 목사. 공산군이 납치 살해하였다.
이종도 제주도 제1대 목사.
임인재 전남 해제 중앙교회 목사.
전병무 경북과 울릉도에서 활동한 목사.
[전도사(24)]
高永昊(고영호·27) 전북 익산군 낭산면 호암리 낭산교회 전도사. 9월29일 낭산면 방공호에서 피살.
金奎興(김규흥·59) 전도사. 9월14일 인천경찰서에서 피살.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鍾五(김종오·33) 「피살자명부」에는 8월12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7일 납북.
金平國(김평국·71)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장로. 9월18일 묘량교회 뜰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8명과 같은 교회 신도 김윤환의 가족 18명이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平局(김평국)이 9월10일 묘량면 신천리에서 피살로 기록.
金顯慶(김현경·4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9월27일 같은 교회 장로 김상천과 함께 9월27일 소방서 창고에서 피살.
金揮男(김휘남·33) 전북 임실군 관촌면 관촌장로교회 장로. 8월25일 관촌면 광장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體男(김체남)이 7월27일 관촌면 사선대에서 피살.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白南哲(백남철·53)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장로. 「피살자명부」에는 9월26일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8일 납북.
邊榮守(변영수·39)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장로. 8월13일 논산군 성동면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이재규 목사, 안인호 집사와 함께 피살.
柴美錫(시미석·44) 전북 고창군 고창읍교회 장로. 9월29일 공산군이 사형장으로 사용했던 고창읍 뒷산에서 피살.
李德奉(이덕봉·49) 전북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교회 장로. 8월20일 금산 내무서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8월22일 금산내무서원에게 끌려가 9월22일 피살.
李判一(이판일·53) 전남 신안군 임자도 진리교회(성결교) 장로. 10월5일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붙잡혀 어머니와 차남, 아우 등 가족 13명이 교인 43여 명과 함께 모래사장에 생매장당했다.
鄭基奉(정기봉·34) 전북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 대송교회 장로. 9월27일 김제군 봉남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鄭奇奉(정기봉)으로 되어 있다.
鄭在浩(정재호·51) 「피살자명부」에는 8월17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3일 납북.
趙景宜(조경의·61) 서울 동막교회 장로. 8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옥사.
趙鏞錫(조용석·54) 경남 함안 사촌교회 장로. 9월17일 함안군 군북면에서 피살.
崔秉浩(최병호·77) 전남 신안군, 해남군, 장흥군 등지 교회에서 시무. 7월30일 전남 완도 관산리(조약도) 해변에서 우익진영 청년 7명과 함께 피살.
洪在棋(홍재기·76) 전북 정읍군 정읍제일교회 장로, 변호사. 9월27일 정읍경찰서 유치장에서 피살.
黃道文(황도문·55)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교회(감리교) 장로. 9월30일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개성에서 피살.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10월3일 선두리교회에서 납북.
[소속, 피살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金柳讚(김유찬·58)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에서 피살.
金鍾大(김종대·53) 전북 옥구군 미평 신관리교회 장로.
심은양 경북 육통교회 장로.
장석팔 충남 예산 웅봉교회 장로.
최치한 충북 영동읍교회 장로.
許詳(허상)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장로교) 장로. 제방공사 수문턱 위에서 피살.
[신학생(2)]
高光奎(고광규) 세례명 베드로. 광주교구. 9월 전주에서 피살.
全基洙(전기수) 세례명 그레고리오. 광주교구. 9월 전주에서 피살.
[집사 ·기타(41)]
영광에서 일가족 18명 피살
金永解(김영해·52) 전북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집사. 9월23일 가작동 뒷산에서 신도 22명과 집단 피살.
金容俊(김용준·33) 전북 전주 중앙교회 집사.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8일 전북 완주군 이서면 단교리에서 납북.
金元培(김원배·39)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10월4일 월출산 아래 남풍리 저수지에서 피살.
金允子(김윤자·37)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영암군 부인회장. 10월30일 서남리에서 피살.
金允喆(김윤철·24)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교회 주일학교 교사. 8월25일 정읍시 감곡면에서 피살.
金允煥(김윤환·27)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18일 묘량교회 뜰 안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18명과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潤煥(김윤환)이 9월10일 운당리에서 피살.
金昌化(김창화·35) 서울 영락교회 집사. 8월4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뒷산에서 피살.
盧炳在(노병재)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장로교) 집사. 제방공사 수문턱 위에서 같은 교회 장로 허상과 가족 13명이 피살.
盧龍植(노용식)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피살자명부」에는 魯用植(노용식·53)이 10월5일 영암군 군서면 도장리에서 피살.
朴鍾海(박종해·38) 전남 진도읍교회(장로교) 집사. 피살된 목사 김수현의 아들을 피신시키려고 애쓰다가 공산군에게 피살.
徐鳳九(서봉구·22) 천주교회 급사. 7월3일 도림동 천주교회에서 피살.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宋光植(송광식·40) 전북 익산군 망성면 무형교회(장로교) 집사.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리 내무서에 수감되었다가 8월15일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宋廣植(송광식·39)이 7월28일 익산시 함열읍에서 피살.
宋炳德(송병덕·45) 전북 완주군 봉동읍 서두교회(장로교) 집사.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봉동면 소방서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9월27일 교인들과 집단 피살.
李仁錫(이인석·39)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성결교회 영수. 8월6일(또는 8월1일) 북면 분주소원에게 납치되어 춘천에서 피살.
崔泳旭(최영욱·60) 기독교인. 광주 제중병원장. 美 군정 시기에 한국인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7년 「호남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돌산면 군내교회 집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피살 일자 및 장소가 확실치 않은 집사]
고웅두 충남 오량교회 집사.
金東信(김동신)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김두환 경북 기계제일교회 집사.
김춘동(61)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문봉순(43)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박상문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朴仁在(박인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안수집사.
박일규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방후용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서상철 충북 청산교회 영수.
서석근(52)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申相翊(신상익·44) 전북 이리 제일교회 집사. 광주형무소에서 피살.
심만길 경북 육통교회 집사.
안인호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집사.
오죽현(77)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윤성전(7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윤임례 전북 정읍 두암교회 집사.
李一(이일·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이민우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임유삼(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任子壬(임자임·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교회 집사.
鄭壽一(정수일) 충남 논산 병촌교회 집사. 같은 교회 교인 65명과 함께 피살.
조인심(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蔡水原(채수원)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한창교 경남 거창군 덕산교회 집사.
납북 종교인들
납북된 교직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수는 개신교 목사 74명, 가톨릭 신부가 26명이었고, 장로 5명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었다. 납북된 주요 교직자 가운데는 종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사(77)]
새문안교회 金英珠 목사의 운명
具滋玉(구자옥) YMCA 총무 역임.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경기도 지사 역임. 서울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타고 끌려가다가 龍淵(용연)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權泰羲(권태희·45) 경북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위원장 피선. 납북된 후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동원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10월까지는 평양에 거주.
奇世福(기세복)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庚鍾(김경종·56) 서울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인 6월28일 오전 7시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金東哲(김동철·52) 서울 서소문교회(감리교) 목사. 7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자택에서 공산당원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斗錫(김두석·61) 파주 봉일천교회(장로교) 목사. 9월18일 오후 9시경 서울 용산구 동자동 153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3명에게 연행되어 동자동 내무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峠(김상·61) 종군목사. 9월12일 서울 서대문구 의주동 자택에서 납북.
金尙七(김상칠·53) 제7안식일교회 총무(목사). 7월27일 오후 5시경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90-9번지 자택 앞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4일 동안 억류된 후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옮겨졌다가 납북.
金聖元(김성원·68) 장로교 목사. 9월25일 전남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金誠源(김성원·78)이 완주군 일대에서 교역하던 중 납북.
金英珠(김영주·57) 서울 새문안교회(장로교) 목사.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때 총회의 정죄를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목사. 광복 후에는 새문안교회를 개방하여 교파 통일을 위한 장로·감리교의 협의회와 초교파 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도 제공했다.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3 자택에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
金元圭(김원규·49) 개성 감화원(소년원) 원장. 감리교 목사. 1946년부터 개성지방 감리사로 시무. 경기 개성시 관훈동 604-2. 7월6일 11시경 개성에 있는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납북. 1951년 5월 熙川(희천)까지 끌려갔을 때에는 다리를 삐어 굴신을 못 하는 상태였다.
金裕淳(김유순·69)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9대 총리원 전도국 감독. 서울 북아현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전 8시50분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의 140 자택에 기독교민주동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 납북.
내무서원에 연행된 후 납북
金有淵(김유연·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 성결교회 목사. 성결교단 잡지 「活天(활천)」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京西(경서)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 교회(現 신덕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8월10일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
金熙雲(김희운·38) 서울 중앙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후 3시경 시내 노상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서울 지방의 목사 여러 명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납북.
南宮爀(남궁혁·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 8월24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간부 朴允模(박윤모), 崔鐸(최탁)에게 연행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朴萬春(박만춘·42) 대한 감리회총리원 전도국 총무. 감리교 목사. 6·25 전쟁 후 총리원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던 총리원 감독 김유순 목사 등과 함께 납북.
朴相建(박상건·54) 서대문형무소(장로교) 목사. 정부가 6·25 전쟁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 확실하다. 7월13일 오전 11시경 서울 한강로 1가 183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새벽 공산군에 의해 납북 기록.
朴璇齊(박선제·67) 경동교회(감리교) 목사. 태평양 무역(주), 국제 손해보험(주) 사장 역임. 공산군이 납북.
朴炫明(박현명·48)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교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 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 8월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 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납북 기록.
朴亨圭(박형규·51)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사감.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이건 목사 등과 함께 8월10일 납북 기록.
方薰(방훈·58) 자교교회 목사. 감리교 총리원 이사. 8월23일 창성동에서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白學信(백학신·52) 강화읍교회(감리교) 목사. 9월26일 밤 12시경 강화읍 신문리 549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12명에게 연행 납북.
徐斗成(서두성·3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교회(성결교) 목사. 백암중학교 교장. 7월28일 10시경 경기도 용인군 백암교회에서 보안서원 2명에게 연행되어 용인 보안서를 거쳐 수원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徐太源(서태원·46)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목사. 협성감리교 신학교 교수. 8월23일 오후 3시경 기독교민주당원에게 연행 납북.
宋昌根(송창근·53) 한국신학대학장. 8월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으로 되어 있다.
宋台用(송태용·43)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34년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을 맡았으며 1935년 1월 창간된 「성화」의 편집 주임으로 창간에 참여. 8월27일 서울 중구 주교동 자택에서 납북.
沈明燮(심명섭·50) 감리교 목사.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8월23일 오후 9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0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연행 납북.
安吉善(안길선·60) 서울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 8월24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동구 신당동 333-8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납북.
梁柱三(양주삼·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8월23일 기독교연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울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
吳澤寬(오택관·63) 장로교 목사.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9월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문공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장남이다.
兪世根(유세근·41)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
劉在獻(유재헌·46) 장로교 목사. 임마누엘수도원 부흥사.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223 기독교 사업체인 修禱園(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이 연행 납북.
柳禎喆(유정철·46)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
尹聖浩(윤성호·32) 장사동교회(감리교) 목사. 9월19일 오후 3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내무서원 수명에게 트럭에 실려 연행된 후 소식 두절.
특별회의 소집 후 납치
李鍵(이건·53) 서울신학교 교수. 성서학원장.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기독교민주동맹원 3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목사와 함께 8월10일 납북.
全用燮(전용섭·33) 충북 청안교회(장로교) 목사. 9월17일 12시경 청주시 문화동 수도국 밑에서 후퇴하던 북한군이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26일 공산군 패잔병에게 체포되어 우암산에서 피살.
全珍珪(전진규·56) 서울 성동교회(現 보문교회) 목사. 대한감리회 전도국장. 서울 동지방 감리사. 연희대학교 재단이사,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기독교연합회 간사. 8월23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318-16 자택에서 납북.
田斅培(전효배·65) 서울 금호동교회(감리교) 목사. 서울 동지방 감리사. 8월23일 밤 12시경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이 마포구 아현동 산 11 자택에서 연행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가 납북.
鄭達雄(정달웅·35) 서울 청파동 감리교회 목사. 8월3일 새벽 5시경 서울 용산구 청파동 감리교회 사택에 내무서원 3명이 와서 특별회의가 있다면서 연행 납북.
鄭致鎬(정치호·33) 서울 미암교회 목사. 8월13일 새벽 2시경 서울 돈암동 산 11번지 미암교회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2명에게 연행되어 돈암동의 안재홍(국회의원, 한성일보 사장, 납북) 집에 있는 방공호에 감금된 후 면회, 의복 및 식사 차입 등이 일절 거절당한 채 심야에 납북.
曺相文(조상문·53) 서울 북아현교회 목사. 8월23일 오전 8시경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9-1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연행 납북.
趙相學(조상학·74) 전남 여천 덕양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 전남 여천군 소라면 덕양리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여수 내무서원이 연행하여 손양원 목사와 9월28일 美坪(미평) 공동묘지에서 살해.
曺喜哲(조희철·50) 서울 신암교회 목사. 7월23일 오전 노상에서 인민위원이 연행 납북.
강계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
朱在明(주재명·32) 장로교회 목사, 8월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175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되어 12월에 강계까지 끌려가던 중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
朱埰元(주채원·46) 마포형무소 형목. 서울 향화동교회(장로교) 목사. 7월27일 오후 10시경 서울 마포구 아현동 468-2 자택에서 마포 내무서원 2명이 연행하여 정치보위부에 감금한 후 납북.
陳學哲(진학철·54) 장로교 목사. 7월5일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황해도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공산군에게 피랍으로 기록.
車敬昌(차경창·51) 서울 수표교회(감리교) 목사. 6월 하순경 남하 도중에 경기 수원(또는 오산) 부근에서 내무서원이 연행 납북. 몇 년 후 월남한 어떤 여자 교인이 북한 어느 곳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외출하였다가 공산군에게 납북.
崔相殷(최상은·45) 서울 응암동교회(장로교) 목사. 함남도청 사무국장. 8월11일 오후 7시경 서울 종로구 원남동 147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崔相鉉(최상현·61) 기독교회신학교 교수·목사. 美군정청 군정장관 고문. 8월25일 오후 9시경 서울 성북구 돈암동 482-58 자택에서 인민군 2명이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사실을 들었으나 그 후 소식 두절.
崔錫模(최석모·61)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1949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피선.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379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김유연, 박현명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8월10일 납북.
崔元初(최원초·45) 장로회 목사. 8월23일 새벽 1시경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162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 납북. 신안주 방면으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崔宗默(최종묵·54) 서울 궁정동교회(감리교) 목사. 7월 공산군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북
崔泰龍(최태용·53) 대한복음교회 목사. 국민훈련원 원장. 정부의 농민회(現 농협) 부회장.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친구 柳錫東(유석동)의 집에 은신 중이었는데 9월6일 오후 10시30분경 정치보위부원 3명이 가택을 수사하여 최태용과 유석동 등 3명을 연행하였다가 이튿날 두 사람은 석방하였으나 최태용은 목사라 하여 국립도서관 정치보위부에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감금하였다가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11일 공산군에게 체포된 후 피살.
許殷(허은·37) 서울 해방동교회 목사. 7월25일 12시경 서울 중구 회현동 일출아파트 자택에서 내무서원이 연행해 중부 내무서에 감금하였다가 납북.
玄碩鎭(현석진·44) 경기도 광주군 둔전리교회(장로교) 목사.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친미파이며 미국의 연락자, 국군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는 등의 이유로 같은 교회의 장로 金德男(김덕남)과 함께 연행 납북.
[소속 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鳳圭(김봉규) 강원도 철원교회(성결교) 목사.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
金相俊(김상준·25) 청풍감리교회 목사. 충북 단양군 홍성읍에서 납북.
金晟植(김성식·43) 경기 화성군 마도면 (같은 이름의 김성식 목사가 2명 더 있는데 나이와 주소가 달라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金晟植(58) 주소 경기 시흥군 중정 안양리. 피랍 장소 개성시: 金晟植(67) 주소 서울, 수원교회 목사).
金裕海(김유해) 강원도 지석교회(감리교) 목사.
金長輝(김장휘·60) 7월20일경 서울 을지로 노상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鍾萬(김종만·59) 감리교 신학교 교수. 체부동교회 목사.
金珍珪(김진규·54) 목사. 서울.
金哲星(김철성)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납북.
金泰周(김태주·63) 8월13일 10시경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4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성북 내무서에 1주일간 감금되었다가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납북.
都柄日(도병일·37) 9월2일 충남 예산군 삽교면 석리에서 납북.
朴成萬(박성만·31) 7월18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申基俊(신기준·47) 서울 서대문구 행촌동 자택에서 납북.
劉載報(유재보·53)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납북.
李成萬(이성만·31)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張德檀(장덕단·68) 서울 중구 회현동. 효자동교회 목사 .
全有淵(전유연·48) 8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자택에서 납북.
陳令鐘(진령종·49) 7월5일 서울 뚝섬 자택에서 납북 .
崔明殷(최명은·45) 서울 종로구 원남동. 8월11일 납북.
崔榮鎔(최영용·50) 8월15일 서울 시내에서 납북.
韓致明(한치명) 납북된 후 반동종교인으로 낙인 찍혀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洪吉龍(홍길용·31) 전북 김제군. 7월25일 납북.
[전도사(4)]
金陽淳(김양순·40) 전도사. 9월27일 오후 4시경 같은 마을 교인의 집에 심방 나갔다가 귀가 중에 납북. 주소는 서울시 중구 쌍림동 119.
金麟熙(김인희·43) 장로교 전도사(助師). 북한의 종교탄압을 피해 월남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태평로 재건교회를 설립했던 재건교회 지도자. 7월20일 10시경 자하문 밖에서 납북.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5일 납북.
朴寶(박보렴·여·54) 전도사, 독립운동가. 6·25 전쟁 후 서울대 약학대학장이었던 남편 김기우와 함께 납북.
朴文熺(박문희·50) 성결교 초기 전도사, 독립운동가.
[장로(19)]
張德櫓(장덕로·68) 서울 옥인동교회 장로. 3·1 운동 후 上海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1949년 옥인동교회 창설.
高明宇(고명우·68) 서울 남대문교회 장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 겸 외과과장. 7월26일 오후 2시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 3가 184 자택에서 사복청년이 납북.
金奎植(김규식·74)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 YMCA 학교 교사 및 경신학교 학감, 重慶(중경) 임정 부수석. 6·25 전쟁 후 피랍되어 1950년 12월10일 만포진 부근에서 사망.
金德男(김덕남·41) 둔전리교회 장로.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서 현석진 목사와 함께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연행 납북.
金東元(김동원·67) 장로교 장로. 소설가 김동인의 형. 광복 후 군정청 고문을 거쳐 한민당 총무, 제헌국회 부의장 역임.
金允童(김윤동·48) 장로. 7월25일 오후 8시경 서울 마포구 만리동 세관 앞에서 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서대문구 당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열흘 뒤 구로구 서울시 정치보위부였던 국립도서관에 감금된 후 납북.
金益俊(김익준·46)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장로. 직업은 신수동회 사무소 회계사였는데 7월13일 마포구 신수동 300번지 자택에서 같은 동네 사람 2명과 함께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내무서에 감금되어 있다가 동네 사람 2명은 석방되었으나 김익준은 교회 장로이며 洞(동)청년단 부단장이라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 수감된 후 납북.
金在恩(김재은·27)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목실리성결교회 전도사. 8월7일 오후 2시경 교회에서 내무서원 3명에게 연행 납북.
林壽烈(임수열·31) 강릉 성결교회 전도사. 납북 당시의 정황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했었고 본인만 교회를 사수하겠다며 강릉성결교회에 있다가 납북당했다.
黃國祿(황국록·40) 창신장로교회 장로. 육군본부 지정 대동장유공장 대표자로 있으면서 육군 부식 및 각종 물품을 조달했다.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김창일외과병원에서 치질을 가장하여 입원 중이었는데 8월15일 오후 5시경 성동내무서원 2명과 인민군 수명이 찾아와 연행. 성동내무서와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17일경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까지 끌려간 사실을 같이 끌려가다 탈출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소속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강준표 서울 서강교회 장로.
權相和(권상화·68) 7월5일 오전 10시경 서울 서대문구 만리 2가 294-22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金東元(김동원·44) 감리교 장로. 9월20일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서 납북
金斗枚(김두매·43) 8월14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에서 납북.
申相厚(신상후·39) 장로교 領袖(영수).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이정진 서울 수송교회 장로.
李鍾聲(이종성·62) 8월25일 경기도 파주군 위동면 금촌리에서 납북.
李弼斌(이필빈) 서울 신암교회(장로교) 장로.
정호석 서울 서강교회 장로.
[신학생(2)]
金龍瑞(김용서·22) 장로회 신학생. 8월27일 납북. 주소는 서울 성동구 신당동 175-8.
金相振(김상진·25) 세례명 토마스. 함흥 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7월 중 행방불명.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4일 서울 중구에서 납치. 주소는 중구 충무로 2가 12.
기타 납북·피살 종교인들
[집사·기타(45)]
金炳德(김병덕·30) 서울 영락교회 집사. 8월10일 납북. 서울중앙전신국 총무과 근무.
金奉在(김봉재·29 ) 9월25일 전북 이리에서 납북. 주소는 경남 거제도
金姓女(김성녀·42 )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成德(김성덕·41) 8월16일 중구 남산동 자택에서 납북.
金輪林(김수림·61) 8월27일 서울 중구 산림동 90에서 납북.
金榮淳(김영순·40)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株完(김주완·30)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金振秀(김진수·45) YMCA 근무. 8월11일 서울 종로 근처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泰煥(김태환·39)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翰洙(김한수·36)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김현자 서울 신암교회 집사.
南邊植(남변식·38) 9월28일 전남 완도군 완도면 양리도에서 납북.
獨孤堂(독고당·26) 7월25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납북.
朴寬姬(박관희·25) 7월7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납북.
朴琮奉(박종봉·42)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朴卓根(박탁근·31)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裵春根(배춘근·35) 7월7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납북.
白桂淳(백계순·32) 9월25일 금산군에서 납북.
宋京燮(송경섭·38)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安仁祐(안인우·40) 7월29일 전북 익산군 황등면에서 납북.
梁斗泳(양두영·36) 9월25일 전남 옥구군 계림면 유사리에서 납북.
吳吉弘(오길홍·28)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尹得淳(윤득순·31)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李京天(이경천·63)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李基泰(이기태·34)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李成擇(이성택·34) 7월29일 전북 익산군 황등면에서 납북.
李壽哲(이수철·22) 8월18일 강원도 홍천면 진리에서 피살.
李周光(이주광·45)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任連用(임연용·33)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감리교 총리원 회계. 20년대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문서사업 종사.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張相善(장상선·31) 8월14일 서울 용산구 14 자택에서 납북.
張順禮(장순례·48)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張長壽(장장수·38)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張長順(장장순·33)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張宗錫(장종석·28)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鄭南奎(정남규·35)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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