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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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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티성지 입구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 위치한 배티성지는 예전에 동네 어귀에 골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 라 는 말이 생겨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가 되었다. 언제부터 이곳으로 교난을 피해 교우들이 몰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교우들이 은거하였음에는 틀림없고 배티만큼 치명자의 묘소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곳도 드물다. 배티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 중심지였다. 배티 일대 모두가 신부님의 손길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박해시대 교통의 중심지였던 배티는 배티는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는 제천 (堤川), 배론, 원주(原州)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안성(安成),용인(龍仁),서울로, 남쪽으로는 공주 (公州), 전라도로,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지는 네거리였다.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 경이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될 수 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다.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동골, 새울,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는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여명(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다.  이 일대에서 배티 인근만큼 깊은 산골짜기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 왼쪽 골짜기에는 유사시에 배티로 도망하던 신자들의 비밀 통로가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다는 것이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곳에서도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신앙 생활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였고, 교회 서적이나 성물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죽는 날까지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자들은 1850년 초에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최 신부가 거처로 정한 곳이 바로 배티 이웃에 있는 동골 교우촌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있는 그의 친척집에는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었다. 또 산너머에 있는 서덕골 교우촌의 백부 댁에는 둘째 아우가 있었다.

 

충청북도 기념물 150호로 지정된 배티성지

 

충청북도는 4일 “청주교구의 배티성지는 제천 배론성지, 괴산 연풍성지와 함께 충북의 3대 천주교 성지로서 조선 후기 천주교 유입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사적지”라며 “이번에 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배티성지의 ‘조선교구신학교지’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소’,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 등 3개소”라고 밝혔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된 배티성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교우들의 신앙과 삶, 박해 등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성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은 “이번 문화재 지정은 ▲ 배티신학교가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였다는 점 ▲ 배티신학교가 1883년 함경도 덕원에서 문을 연 원산학사보다 33년이나 앞선 근대식 서양교육 기관이었다는 점 ▲ 천주교 박해기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무명 순교자들의 묘는 교회사뿐만 아니라 지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점 등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라며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안건에 대한 예비심사 조서의 법적 유효성 교령이 발표되고 자발적인 기도와 현양운동이 지속되고 있는 이때 그의 사목중심지였던 배티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것은 뜻 깊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13일, 권선형 기자]

 

성지 오르는 길

 

배티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부지

 

배티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투시도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출처- http://info.catholic.or.kr/holyplace/view.asp)

 

배티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공사 요지

 

성지 오르는 길              

 

 순교현양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수녀원 

 

이정표                    

 

최양업 신부 상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배티성지의 성당은 최양업 신부님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웬만큼의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성당 앞 성모상

 

성당 앞 성모상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기념성당 아래 있는 삼박골 쉼터 

 

사제관

 

 

성당

 

성당내부

 

성당내부

 

제대

 

십자고상

 

성당안의 십자고상은 여느 다른 십자고상과 다른 모습이다. 힘에 겨워 사지가 늘어진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리가 벌어진 채로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다.

 

감실

 

감실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산상제대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산상제대

 

양업영성관

 

양업영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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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골쉼터

 

동골쉼터

 

성물의집

 

양업 교회사 연구소  


배티성지에는 양업교회사연구소가 있다.  청주교구 배티 순교 성지의 담임 류한영(베드로) 신부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해 연구하고, 그 현양 활동과 시복 시성 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최양업 신부님 서품 150주년이 되는 1999년을 맞이하여 최 신부님께서 신학생으로 선서를 하고 마카오로 출발한 12월 3일에 최 신부님을 주보로 모신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창립하고 이를 운영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십자가의길

 

 

 

 

 

 

 

 

 

 

 

 

 

 

 

 

126위 하느님의 종 계단

 

십자가 고난

 

126 위 계단

 

 최양업 신부 성당 터, 성지에서 안성쪽 도로 0.9km 도로옆에 위치해있다.

 

최양업 신부 성당 터

 

성당 터와 잔해

 

103 위 성인 계단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103 위 성인 계단

 

잔디광장

 

잔디광장

 

야외제대, 철제 십자가의길

 

철제 십자가의길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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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복원, 103위 계단을 올라 정원 옆에 위치해있다.


성지를 나와 고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최양업신부님 성당터라는 곳이 나오는 데 신부님께서는 7,8월 장마때는 이곳에서 머무르시며 '천주가사'와 '성교공과'를 집필하기도 하시며 지내셨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

 

 최양업 신부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복원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복원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복원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복원

 

 

미사를 집전하는 최양업 신부상       

 

미사를 집전하는 최양업 신부상 

 

미사를 집전하는 최양업 신부상 

 

최양업 신부


최양업(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이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이다. 그는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고 그후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학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 나섰다. 최양업 신부는 위대한 목자요 백색 순교자이다. 1861년 선종하기까지 12년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순회하며 목자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죽은" 착한 목자이다.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정원에 있는 유 데레사 묘

 

유 데레사 묘

 

배티성지에서 안성가는 도로 1km쯤  입구에서 1km를 등산 산 중턱에 자리잡고있다.

 

 병인박해 당시에 배티에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아가던 교우들에게도 박해의 시련은 피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누가 얼마나 순교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배티 성지 부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보면 당시 순교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가 있다. 특히 안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에 있는 배티는 당시에 처형을 하기 위해 끌고가던 순교자들이 꼭 넘어야 할 고개였다. 배티 성지를 나와 안성으로 가는 고개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조그만 비석이 하나가 나온다. 바로 6인의 무명순교자 묘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지점인데 여기서부터는 산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한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오솔길을 가다보면 순교자묘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부터의 경사가 만만치 않다.

 

6인 순교자 묘역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6인 순교자 묘역 

 

6인 순교자의 묘 입구

 

6인 순교자의 묘역

 

6인 순교자의 묘역

 

6인 순교자의 묘

 

6인 순교자의 묘 

 

6인 순교자의 묘

 

14인 순교자 묘역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6인의 무명순교자의 묘를 내려와서 다시 안성방면의 고개로 50m 정도를 걸어가면 또 하나의 무명순교자 묘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14인의 무명순교자 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데 이들은 기구하게도 박해시에 안성으로 넘어 가다가 포졸들이 집단으로 처형을 한 순교자들이 묻혀있다. 그 중에는 아이의 무덤도 있다고 하니 그 당시의 비참함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14인 순교자 묘역

 

14인 순교자 묘역

 

14인 순교자 묘역

 

삼박골 교우촌과 비밀통로 


삼박골은 배나무 고갯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백곡에서 배티로 오는 길 중간에 '삼박골 비밀통로'라는 푯말이 하나 나오는데 이 통로로 걸어가면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배티성지로 나오는 지름길이 된다. 예전의 교우들은 외교인을 피하여 이런 조그만 길로 다녔었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순교자의 묘소만 남아있는 삼박골은 병인박해 당시에 장 베르뇌 주교가 숨어들었던 공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집터나 돌담의 흔적, 우물터만이 겨우 남아 있고, 마을 뒷편에는 유명한 신자인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이 남아 있다.

 

삼박골 교우촌과 비밀통로 설명문

 

삼박골 이진사의 부인과 딸 순교자의 묘,  이 진사는 피신하였다.

 

삼박골 이진사 부인과 딸 순교자 묘

 

삼박골 이진사 부인 순교자 묘

 

삼박골 이진사 딸 순교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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