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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야고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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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영광의 문’ 중앙 기둥에 있는 사도 성야고보 상

 

사도 야고보의 생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3대 성지의 하나로 로마, 예루살렘과 견줄 수 있게 되자, 한때는 산티아고 순례가 열광적으로 성행하기도 했다. 9세기 초 수도사 페라요가 사도 성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 교황 칼릭스투스 2세가 집필했다는 옛 문서에 따르면, 어느날 밤 카를 대제의 꿈에 성야고보가 나타나 “사도의 무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군을 이끄는 카를 대제를 빛나는 하늘의 강이 까마득히 먼 갈리시아로 인도하리라. 그것은 바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도 성야고보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에 묻혔다는 설은 이런 전설에 근거한 것이다. 성야고보는 로마 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에서 포교하려고 애썼으나 성과가 없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명으로 목이 잘려 순교(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했다. 몇 명의 신도들이 사도의 유해가 담긴 돌널을 해변까지 나르자, 천사가 양옆을 붙잡고 있는 배가 나타나 그 널을 실었다고 한다. 그 배는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까지 나아갔고, 로마 시대에 갈리시아 지방의 수도였던 이리아프라비아에 닿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동안에도 성야고보는 연어떼를 향해 설교했다고 한다. 성마르코가 베네치아에 부를 주고, 성안드레아가 비잔틴의 위엄을 상징하듯이, 성야고보는 당시 이슬람 세계와 접하고 있던 변경 지방 갈리시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당시 갈리시아는 레콩키스타의 열기가 고양되던 곳이기도 해서, 이 수호성인은 언제나 싸움터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크라비오 전투에서 사도 성야고보가 백마 탄 전사 모습으로 나타나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으며, 공격해오는 이슬람교도 앞을 막았다고 한다. 그러자 사기가 오른 그리스도교도 군대는 죽음도 아랑곳없이 “산티아고! 돌격! 에스파냐!”라고 외치며 적극적으로 돌격해 승리했다고 한다. 이런 고사 때문에 성야고보에게는 ‘마타모로스(무어인을 죽이는 자란 뜻)’라는 별명이 붙었고,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시청으로 쓰고 있는 라호이 궁전에 성야고보의 기마상이 놓이게 되었다

 

장인 마테오의 재능이 유감 없이 발휘된 ‘영광의 문’은 로마네스크 조각의 최고 걸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순례자는 이 아름다움에 압도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사도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묘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스페인 로마네스크 예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건물이다. 산티아고는 "사도 성 야고보"를 뜻한다. 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디에고 파라에스가 주교로 있던 1078년이었지만,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척된 것은 1100년 무렵부터였다. 순례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지나 ‘영광의 문’이라고 부르는 대성당 현관에 가까스로 다다른다. 장인 마테오가 만든 이 문은 유럽 로마네스크 조각의 걸작이자, 초기 고딕 양식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의 특징도 보여 준다. 순례자는 윗부분이 반원형 아치로 된 현관의 중앙 기둥에서, 순례 지팡이를 들고 상냥한 표정으로 순례자를 맞이하는 성야고보를 만날 수 있다

 

사진, 글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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