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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오비에도 부근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성당

성지순례/남유럽(스페인)

by baesungsoo 2006. 4. 2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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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겔 데 리요 성당

 

1985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1998년 확대 지정했다. 9세기에 건설된 아스투리아의 그리스도 왕국 교회가 대상으로, 선(프레)-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으로 이베리아 반도내 중세 건축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의 산미겔 데 리요 성당은 날씬하고 높게 뻗은 바깥벽과 가늘고 긴 신랑으로 짝을 맞춘 점이 눈길을 끈다. 돌로 된 멋진 격자무늬 창이 있고, 성당 내부 장식도 꽤 섬세하다

 

 

산살바도르 데 바르데디오스 성당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아스투라이스 예술 말기의 모습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입구의 아치 장식은 모사라베 양식의 영향이 뚜렷하다. 대왕이라고 불린 알폰소 3세는 말년에 이 곳에 머믈렀다고 한다

 

 

네모꼴의 아름다운 산타마리아 델 나랑코 성당은 가장 대표적인 아스투리아스 건축물이다. 외부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반원통형 천장이 있고, 전망대 기둥머리는 코린트식이며, 벽의 기둥은 각주로 되어 있다

 

 

산타크리스티나 데 레나 성당은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겉모습은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을 보여 주며, 성당 안에는 비잔틴 양식에공통적으로 있는 3연 아치가 있다

 

아스투리아 왕국의 성당 건축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이슬람교도에 대항해, 그리스도교도 쪽의 첨병 역할을 한 조그마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프레로마네스크라는 독특한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선구가 된 이 양식은 나중에 에스파냐 성당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스투리아스의 수수한 성당은 처음에는 왕궁으로 사용했는데, 고대 로마에서 이어받은 문화유산에 서고트 문화, 카롤링거 왕조 문화, 비잔틴 문화, 롬바르디아 문화 등의 요소를 가미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든 흔적이 보인다.

그리스도교의 마지막 성채

  에스파냐 북서부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서 “진짜 에스파냐는 아스투리아스에 있다. 나머지 지방은 정복된 땅이다.”라고 배운다. 이슬람교도가 이베리아 반도에 몰려 들어와 코르도바가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을 때, 그 세력을 쫓아내려 했던 사람들이 바로 아스투리아스인들이었다. 에스파냐 북부로 도망가서 저항 운동을 조직한 서고트족의 귀족 펠라요는 수완을 발휘해 에스파냐의 영웅이 되었다. 즉, 부하들을 이끌고 코바동가에서 이슬람군을 격퇴해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저지한 것이다. 그 뒤 펠라요는 아스투리아스의 국왕이 되어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794년에 알폰소 2세가 수도를 오비에도로 옮겼으며, 1492년에 레콩키스타가 끝날 때까지 아스투리아스는 이슬람교도를 막아내는 그리스도교도의 성채 역할을 해냈다.

눈길을 끄는 성당 3채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정치적으로는 큰 세력은 갖지 못했지만, 성당 건축이란 측면에서는 엄청난 공헌을 했다. 아스투리아스 건축 양식은 라미로 예술이라고 일컫는 제2기, 즉 라미로 1세 통치기와 오르도뉴 1세 통치기 때 원숙기를 맞았다. 그러나 알폰소 3세 때 왕국이 두에로 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혀, 도읍지를 레온으로 옮겼고 오비에도는 주역에서 밀려났다. 아스투리아스가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것은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의 종말을 의미했다. 10세기 건축은 이 양식을 따랐는데, 모사라베 양식은 코르도바에서 피난온 그리스도교도가 가져온 것이다. 그 뒤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기울었고, 차츰 성황을 이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길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이 퍼져나갔다. 아스투리아스의 성당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그 가운데 산타마리아 델 나랑코 성당, 산미겔 데 리요 성당, 산타크리스티나 데 레나 성당 3채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모두가 이 지방의 독자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었고, 나중에 에스파냐 성당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이 가운데 2채는 라미로 1세가 통치하던 때 지은 것이다. 필시 아스투리아스 궁정에서 고용한 기술자들이 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고대 로마의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여기에 서고트, 카롤링거 왕조, 비잔틴, 롬바르디아의 문화 요소를 받아들여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이들 성당의 천장은 모두 반원통형인데, 장식이 풍부한 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라미로 1세의 대저택

  푸르른 초목이 무성한 오비에도 변두리, 나랑코 산 남쪽 기숡에 산타마리아 델 나랑코 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는 고대 로마의 집회장 비슷하게 설계되었고, 국왕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1930년대의 발굴 조사 결과 욕실도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계단 밑은 오비에도의 대성당과 거의 비슷하며, 반원통형 천장과 보강용 아치가 보인다. 이 성당의 독특한 특징은 2층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쪽과 서쪽에는 좁다란 콜로네이드가 있는데, 전망이 좋다. 또한 국왕 연대기에 기록된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는 이 곳에도 일종의 발코니가 있었던 듯 싶다. 라미로 1세의 이 멋진 저택은 905~1065년에 성당으로 사용했는데, 뛰어난 구조는 후대 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 가느다란 버팀 기둥이 외부에서 반원통형 천장의 아치를 지탱하며, 남북의 측벽도 튼튼한 구조로 이어져 있어, 길게 뻗어 있는 성당을 보강해 준다. 동쪽 콜로네이드의 제단에는 섬세한 홈이 새겨져 있고, 거기에는 비문 일부가 남아 있다. 비문에 따르면 848년에 라미로 1세와 왕비 파테르나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려고 이 제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세월이 흘러 부서진 건물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같은 장소에 더욱 오래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곳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산미겔 데 리요 성당이 있다. 이 성당도 라미로 1세가 지은 것으로, 신랑과 익랑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이었지만, 지금은 익랑의 토대만 남아 있다. 또한 전형적인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의 돌로 된 격자무늬 창이 있고, 그림과 조각이 새겨진 아주 흥미로운 장식도 남아 있다. 특히 입구의 문설주에는,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 장면이 새겨져 있다.

비잔틴 양식의 영향

  아스투리아스의 건축은 비교적 작은 산타크리스티나 데 레나 성당에서 최고봉에 이른다. 이 성당은 오비에도에서 남쪽으로 37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850년에 착공해 866년에 완공했다. 스페인 내전 때 손상되었지만 복구되었다. 기초 부분은 10m짜리 네모꼴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넓어졌다. 구조는 십자 모양이며, 서쪽에 현관이 있고 동쪽에 내진과 후진, 남북 벽에 경사면이 있다. 겉모습은 라미로 1세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 주지만, 안쪽은 느긋한 인상을 준다. 벽에 달라붙은 기둥, 반원형 아치, 메달과 끈을 본떠 꾸며 놓은 기둥머리 따위가 보인다. 메달 모양의 이 부조 장식(메달리온)의 발상지는 동방으로, 건축가들은 아득히 먼 곳에서 발전한 비잔틴 양식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스투리아스의 성당 건축이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는 반면, 오늘날의 아스투리아스 지방에는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남부 지방과 달리, 이 곳은 관광 중심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글 -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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