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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 동당, 남당, 북당 성당

성지순례/필리핀,중국,아시아,일본 등

by baesungsoo 2006. 7. 12.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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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동당성당   (블로그 > 하늘마음의 쉼터)

 

왕푸징 교당(동당)은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 74호에 있다. 북경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다.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북경에 들어올때 훼손됐다가 순치(順治) 12년(1655)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다. 하지만 가경(嘉慶) 12년(1807년)에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그러다가 의화단의 난때 다시 불탔으며, 1904년 배상 형식으로 다시 중건됐다. 프랑스와 아일란드가 공동으로 건설했는데 지금 건물이 그 건물이다.
 

 

 

왕푸징교당(王府井教堂 일명 동당)   (출처- http://cafe.naver.com/chinatour/75) 

 

동당성당 야경

 

동당 건립의 터가 되었던 아담 샬 신부의 비석

 

북당성당     (마리아의 딸 수녀회 게시판)

 

북경의 북당 천주당 외관이다. 서직문 교당 혹은 서십고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명말 청초 베이징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 현재까지도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유일한 가톨릭 성당으로서, 한국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예수회의 그랑몽 신부를 만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북당성당내부

 

북당성당     (카페 > Traditio Aposto.. / 잉쪼우얀님)

 

북당성당

 

북당성당

 

남당성당     (블로그 > on the road)

 

난장교당(南張天主堂 일명 남당)은 서청구(西城區) 전문서대가(前門西大街) 141호에 있다.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교당이다. 명(明) 만력(万歷) 33년(1605)에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웠다. 청 건륭제(乾隆) 40년(1775)에 불탔으나 다음에 중건됐다. 1900년 의화단 운동때 다시 훼손됐는데 청 광서제 30년(1904년)에 다시 건축됐다. 건축 면적은 1300평방미터이고 부속 건물은 400평방미터다. 안에는 석비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청 세조(世祖)가 하사한 천주교당 비문인데, 지금은 판독하기 어려운데 그 원형이 대당 양벽에 새겨져 있다. 대당 서쪽 벽에는 철십자가가 있는데 이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마태오 리치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다.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관계로 조선 사신들과 예수회 소속 서양 신부들과 잦은 접촉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남당성당

 

남당성당

 

남당성당

 

남당성당 내부

 

남당성당 내부

 

남당내부

 

남당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마태오리치 신부와 아담 샬 신부

 

마태오리치 신부의 무덤        (마리아의 딸 수녀회 게시판)

 

북당 남당 동당 서당 성당

 

북경에 있던 4개 성당 중 2개로서 북당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인 퐁트니라 청 성조의 학질을 고친 공로로 서안문 밖의 땅을 하사받아 1701년 건축을 시작, 1703년에 완공하였다. 1601년 마테오릿치의 북경 선교 이후 이곳에는 4개의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각 성당들은 건립된 위치에 따라 동당, 서당, 남당, 북당등로 불렸다. 그 중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남당으로 1601년 마테오릿치가 명의 신종에게 선무문 안의 땅을 하사받아 건립한 후 1644년 아담 샬이 이를 개축하였다. 남당 다음으로는 1628년 아담 샬이 거쳐하던 동안문밖에 동당이 건립되었고 1703년에는 북당이 건립되었으며, 이어 1723년에는 라자리스트회원 페들리니에 의해 서직문 대로에 서당이 건립되었다. 이들 4개의 성당은 북경의 명소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데 특히 남 동당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을 가져 서구 문명을 배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에는 서학이 전래되었다. 1644년 아담 샬과 만난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1631년 정두원, 1720년 이명, 서학 등을 �래한 인물들이다. 남당과 동당이 조선 사신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접촉한 곳이었음에 비해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직접적 계기가 된 곳으로 1784년 이승훈이 이곳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귀국 교회 창설을 주도함으로써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와 매우 밀접한 곳이 되었고, 이후 조선교회의 밀사들은 북당을 통해 조선교회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북당을 제외한 3개의 성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파괴되었다가 남당과 동당은 새로 건립되었다. 현재는 북당만 남아있다

 

남당의 성당 건축과 풍격


前門을 지나 前門大街를 서쪽으로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멀리 서양식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주위와 부자연스러운 듯 지나는 사람을 낯설게 한다. 이 건물이 바로 宣武門 天主堂으로 북경 宣武門內 北順城의 천주교 성당이다.  宣武門大街 南側에 접해 있으며 북경 사람들은 北京城의 남부에 위치하고 北堂과 상대적 위치이기에 습관적으로 南堂이라 부른다. 남당이라는 칭호는 明末淸初 북당과 동당이 세워진 이후부터 남당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남당은 중국식 불교사원의 山門형식과 유럽식의 건축양식이 융합되어진 성당이다. 남당의 주요 구성은 동쪽 정원의 주요 건축물인 성당과 서쪽 정원의 성모산과 성모마리아 상으로 되어 있고 성모산 뒤에 대주교와 신부숙소가 있으며 직원사무실은 대문의 동서 양쪽에 있고 부속으로 천주교 "天光"잡지 편집부와 天愛진료소도 교당 내에 있다. 남당의 큰문을 들어서면 성모산과 꽃에 둘러싸인 성모마리아 상을 만나게 된다. 자혜의 성모마리아 상이 교우를 마냥 축복해 해주는 듯하다. 성모상을 뒤로 동으로 난 달문을 지나면 바로 성당과 마주하게 된다. 이 대성당은 건축양식이 쉽사리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미술사에 있어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의 시기) 양식의 건축물임을 발견하게 된다. (참고로 북당은 프랑스 노틀담 대성당과 같은 고딕양식이다.)  이 대성당은 남북으로 길게 놓여져 있으며 건물 전체를 암회색의 전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단지 성당 대문만을 붉은 색으로 처리하고 창문마저 회색으로 칠해 조금은 중후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정면의 삼각형 벽면을 율동적인 선으로 처리하고 몇 가지의 행운을 상징하는 상감 문양들을 부조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여 고아한 느낌을 더하였다. 성당의 앞뜰에는 푸른 잔디와 커다란 고목의 그늘이 드리워져 십자형의 작은 길을 둘이서 걷기에 적당한 은혜의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성당의 좌우에 비석이 남아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사료에 의하면 동쪽 비는 淸 順治14年(1657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청 세조, 順治 황제가 친히 남당을 위해 내린 <御制天主堂碑記> 이다. 주요내용은 순치 황제의 역법의 중시와 아담 샤알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 종교신앙을 찬양하였으며 관직(卿秩,曆三品)과 칭호(通玄敎師,通美敎師)를 주어 고무하였다. 서쪽 비의 비문은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샤알의 사적과 성당 건립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성당의 남쪽에는 서양식 건축의 門樓가 있으며 위에 십자가를 두고 있다. 이 문은 평소에는 열지 않으며 중대한 종교의식이나 미사가 있을 때 비로소 연다. 이 대문 한쪽에 성경 등의 서적과 성물을 파는 판매소가 있으며, 문루를 통해 이어진 긴 소로는 성당으로 바로 이어진다. 먼저 성당을 들어서면 찾는 이에게 주는 첫 인상은 북당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으나 매우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의 건축공간은 매우 넓으며 장방형의 십자가형이다. 주행랑과 횡단행랑이 교차하는 부분은 교차궁정이 사용되어지고 천정에는 커다란 원형의 돔을 얹었으며, 석조천정의 무거운 중량을 지탱하기 위해 벽체를 두껍게 하고 거기에 걸리는 경사진 하중을 횡단 아치와 떠받치는 벽, 기둥 등에 의해 내외로부터 보강하는 수단이 취해졌다. 로마네스크 건축에 창과 열린 문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내부를 남북으로 길게 이어주는 아치형 주랑이 성당을 자연스럽게 독립적인 공간으로 나누어주면서도 나란히 연이어져 통일성을 이루기도 한다. 측랑과 현관사이에는 이층 계단을 통해 작은 樂樓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건축구상은 많은 예배자들이 성당 내를 쉽게 순회할 수 있도록 배려된 것이다. 초기 건축과 달라진 것은 단지 성당내부의 14개 나무기둥이 이미 벽돌형식으로 바뀐 것일 뿐 사면에 水磨石으로 상감을 하고 위에는 아직 목각 부조의 花紋이 남아 있다. 성당의 북면 중앙에는 도금한 화문장식의 讀經臺가 놓여져 있으며 그 뒤로 커다란 "원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상"의 유화가 자리하고 좌우로 對聯 " 瑪利亞無原罪之始胎", "我等奔爾台前爲我等祈", -그 의미상 성마리아 이외 우리인류는 모두 원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단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加護로서 미래에 영혼이 비로소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모화상 옆에는 두 폭의 천사상이, 그리고 앞 성대 위에는 봉헌을 위한 촛대 등의 제기가 놓여져 있으며, 그 서쪽 성대에는 예수의 성심을 표현한 예수의 화상이 있고, 그 양편에 "耶 聖心", "矜怜我等"의 문구와, 동쪽 성대에는 요셉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큰 폭의 유화가 있고, 그 양쪽에 "大聖若瑟", "爲我等祈"의 여덟 글자가 눈에 띈다. 주성대의 위쪽에는 고딕양식의 한 특징인 오색찬연한 유리상감의 스테인드그라스 창이 있고 이 창을 통해 들어온 광선이 어두운 성당 내부를 엄숙하며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게 한다. 성당 중앙에는 나무의자가 배열되어 있는데 이 은혜 충만한 공간에서 사오천명이 동시에 미사를 올릴 수 있다


 2. 남당의 탄생과 역정


南堂은 明代에 최초로 세워졌는데, 명 萬曆 29년(1601년) 新宗의 허락에 의해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 이 남당이 바로 그의 거주지였다. 1605년(만력33년) 마테오 리치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宣武門 內에 땅을 사서 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종교 활동을 위해 집 부근의 首善書院을 사서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선교를 시작한 이후 신자 수가 많지 않았기에 처음의 성당의 규모 또한 매우 작았다. 당시 그는 성당 내에 서양에서 가져온 성모마리아와 예수그림을 안치하였으며 십자가를 성대 중앙에 놓았다. 당시 이 성당의 특이한 외관과 서양식 내부 장식은 중국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어 잦은 외부인의 방문이 있었다.  그는 방문객을 거절하지 않고 환대하였으며 자주 담소를 나누었기에 많은 친구가 생겨 천주교의 전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에 중국에 온 이후 중국문화의 이해와 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 중문이름(利瑪竇)도 얻었다. 심지어 중국인의 성당 방문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성당을 사찰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교칙마저 중국실정에 맞게 변통하였다. 또한 많은 사대부와 상층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문물과 과학지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신자모임인 天主母會도 창립하였으며 신자 수도 점점 증가하여 1610년(만력38년)에 다시 아름다운 성당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宣武門 남당이다. 마테오 리치가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1616년 南京敎案이 발생하였는데 이로인해 명 정부는 중국인 신자를 엄격히 금지하였고 북경에 거주하는 예수회 사람들을 마카오로 돌려보냈으며 남당을 관부로 귀속시켜 폐쇄하였다. 그러나 1629년(명 崇禎2년) 曆法을 새로 고치면서 천문역법에 정통한 게르만계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샤알 등을 참여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남당은 다시금 선교사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종교활동도 가능케 되었다. 명 왕조가 청 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변동 없이 남당을 지켰으며 새로운 왕조의 역법 개정사업에도 참여하였고 천문 역법기구도 세워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북경의 신자 수는 만오천명에 달했다. 1650년(淸 順治7년)황제로부터 선무문 내 성당부근 땅 일부와 건립기금을 하사받아 새로이 성당을 중건하였다. 아담 샤알은 직접 성당의 초도를 그리고 구체적 시공계획을 세웠으며 성당은 1652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당시 이 성당은 천정에 돔을 두었으며 내부에 3칸의 거실과 5개의 성단을 두었다. 길이는 8丈 너비는 4丈4尺이며 정식 성당 이외에 동서로 천문대, 장서루, 儀器室, 사택을 두었다. 성당 준공 이후 아담 샤알은 비를 세워 이 일을 기록하였는데, 萬曆 때 서양선교사 마테오 리치 등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며 경전을 번역하고 서적을 집필하였고 특히 荷蒙은 청 왕조 때 서양의 과학을 이용하여 새로운 역법을 완성하였으며, 성내 선무문에 성당을 세웠는데 그 때가 天主降生 1650년, 大淸 順治7년, 庚寅년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당 낙성이후 순치 황제가 친필로 쓴 '欽崇天道'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1657년에 다시 어필 '通微佳境'이라는 문액과 천주당 비명을 내리며 아담 샤알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당 건립이후 順治황제는 1656-1657년간에 24차례나 남당을 방문하였는데 아담 샤알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다. 順治는 친히 아담 샤알을 '瑪法'(만주어로 尊師의 칭호)으로 칭하기도 했다. 황제의 은덕으로 남당은 북경의 주목받는 성지가 되었으나 1664년(康熙3년) 順治 서거 이후 아담 샤알은 투옥되는 변을 당했으며 남당 또한 훼손되었다. 아담 샤알은 출옥이후 1666년 동당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康熙황제 집정이후 점용 당했던 성당, 묘지부지가 천주교에 반환되었으며 順治황제가 준 아담 샤알의 관직과 칭호도 회복되었다. 1670년 康熙의 은혜로 남당과 동당이 새로 수리되었으며 종교활동도 다시금 허락되었다. 아담샤알 이후 벨기에 예수회의 베르비에스트가 강희의 은총을 받아 남당에 거하게되었다. 1675년에는 '萬有眞原'과 '敬天'의 편액을 받아 성당중앙에 걸었다. 1690년 북경을 주교구로 두었으며 康和之를 주교로 임명하고 남당을 주교구당으로 하였다. 그후 두 번의 지진으로 붕괴되었으나 1703년에 황제의 명으로 은 10만냥의 국고를 성당건립에 사용하였다. 남당 중건이후 강희는 대련과 편액을 내렸는데 '密合天行, 盡善盡美', '聲淸氣和'와 '云從高處望, 琴向靜中彈'이다. 그 후 로마교황이 중국천주교 신자의 제사와 공자의 숭상 등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강희는 종교활동을 금하였는데 嘉慶년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 정부가 금교령을 내렸으나 결코 천주교의 의미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남당에는 선교사가 거주하였다. 1775년 3월 선교사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순치와 강희가 내린 편액과 대련이 모두 소실하였는데 강희는 다시 국고를 내어 천주당을 중건하고 편액과 대련을 완전히 회복케 하였다. 道光년간에는 남당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관리하였는데 당시 남당에 거주하는 일부 선교사들이 몰래 아편을 판매하였기에 남당을 조사하고 사택을 헐고 일부는 팔아버려 단지 빈 성당만 남게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中法 黃 條約(1844년)이후 천주교 금령이 해제, 1860년 (咸豊10년) 中法 北京條約이후 성당이 반환되어지며 선교를 위한 성당건립이 허락되어지고 먼저 남당이 반환되어진다. 영국과 프랑스의 중국침략이후 파괴된 성당이 그들에 의해 다시금 보수되어 사망자 위령을 위한 미사가 거행되기도 한다. 1900년(光緖26년) 의화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당은 다시 한차례의 비운을 맞게되나 곧 辛丑條約으로 인해 다시 중건되었는데, 당시 개축되어진 건축물이 현재의 남당으로 남아 있다.       ■ 조정래 / 북경대학연구생, 중국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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