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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교회 (경북 영천)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13. 1. 7.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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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교회(예장 통합) 전경


주소 : 경북 영천 화북면 자천3리 773번지,  전화번호 : 054-337-2775

소속 :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동노회 영천시찰, 교인 : 은퇴장로 1명(2002년12월31일 은퇴), 시무장로 2명, 안수집사 2명(은퇴 1명 포함), 권사 4명 등 장년 25명, 대학부 3명, 중고등부 5명, 주일학교 10명, 담임교역자 : 신점균 목사 (2001년12월20일 부임)

 

자천교회 (장로교 통합) 

 

2003년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자천교회는 경상북도와 영천시에서 2억4000만원을 지원받고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2006.4.1일 준공감사예배를 드렸다. 자천교회는 1903년 권헌중 장로가 미국인 애덤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의 권유로 세웠으며 현재까지도 나무와 기와로 된 25평의 예배당 기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나무와 기와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됐으며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보수 및 복원공사가 필요했었다. 복원 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예배당을 좌우로 나누는 목재 칸막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던 구한말 시대적 상황에 맞게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리도록 설치한 것이다. 예배당 현판 아래에 있던 판자 출입문도 복원했다. 이 판자문 역시 남녀가 따로 예배당에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오래 전에 없어졌다가 이번에 본 모습을 찾았다. 일제시대 때 유리문으로 바뀌었던 창문들도 본래의 창호지문으로 복원됐다. 창문틀의 크기와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가 조언을 거쳐 옛 모습을 찾았다는 설명이다. 애덤스 선교사가 생활하던 방도 제 모습을 찾았다. 예배당 바닥을 뜯어낸 결과 구들장과 아궁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애덤스 선교사는 예배당 한쪽에 칸막이를 쳐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예배당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 목사는 “교회 내외부를 살펴보면 당시 넉넉지 않은 교회 사정에서 목공들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교회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예장통합 총회 관계자는 “자천교회는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 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며 “올 가을 총회에서 관련 규칙안을 마련해 제1호 총회 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민일보 엄기영 기자, 2006.4.4)  

 

복원된 종탑

 

자천교회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교회

 

종탑

 

영천 자천교회, 경북 문화재 제 452호 

 

예배당 전경

 

정원 기념비

 

종교지도자 성지순례 기념

 

권헌중 장로 기념비와 묘비

 

권헌중 장로 기념비

 

권헌중 장로 기념비

 

권헌중 장로 묘

 

자천교회 1대 권헌중 장로

 

장로 권헌중은 교회를 돌보면서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바쳤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헌신도 겸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장립하기 2년전 1920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채무를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답(沓) 이두락(二斗洛)을 팔아서 연보를 하였다. 하지만 권헌중 장로로서 교회를 향한 헌신은 길다기 보다는 너무 짧았다. 장로로 취임한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1925년 음력 12월 28일 소천 하심으로 그의 사역은 너무나 짧았다. 표면적인 사역의 기간으로 볼때 너무 짧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복음을 모르는 신촌면(지금의 화북면)에 복음의 요람인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감에 있어서 기초를 놓은 것을 생각할 때 전혀 짧지 않은 시간이다.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듯....” 권헌중 장로의 소천으로 날로 든든히 서 가던 교회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것이다. 하지만 시대마다 나름대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일꾼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2대 장로는 권헌중 장로와 함께 영수로 섬기던 서석희 영수가 1936년 11월 23일 경동노회가 조직 된지 1년이 지난 후에 1937년 10월 9일 자천교회 2대 장로로 장립하므로 권헌중 장로의 뒤를 이었으며, 서석희 장로의 뒤를 이어 권헌중 장로의 아들인 권오진이 1948년 12월 8일 3대 장로로 장립 하므로 자천교회 당회를 자천교회 3대 장로인 권오진 장로와 가족들 이끌어 나갔다 

 

권헌중 장로 묘

 

예배당

 

예배당 

 

예배당 중앙문  

 

예배당 현판

 

장로교(퉁합) 한국 기독교 사적2호 

 

우진각 지붕

 

자천교회 예배당 내부의 특징이 중앙에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이라면, 외부의 특징은 ‘우진각’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지붕에서 그 아름다움과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우진각 지붕은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다. 그리고 귀마루(내림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형태이다. 이는 일자형 평면의 지붕 형태로 초가지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추녀가 네 귀에 구성된 처마에 의하여 구조되며, 지붕 좌우에 합각이 없는 형태이다. 이 지붕의 구성을 위해서는 앞뒤에 장·단연(長短椽) 설치와 함께 측면에서 종도리까지 높이로 서까래를 치받아 설치한다. 거기에 쓰이는 특별한 서까래의 긴 몸을 지붕 각도에 따라 휘어 깍아 쓰는 데에서 ‘우진각’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우진각 지붕의 형태는 예배당 중앙의 네 기둥의 특징과 동일하게 실내의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실내의 넓은 공간의 더불어 지붕위도 넓고 평평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6.25와 관련하여 넓고 평평한 우진각 지붕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미군 비행기의 공중 폭격이 심해지자 성도들은 지붕에 올라가 흰 횟가루로 ‘CHURCH(교회)’라고 영어로 표시하여 폭격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집을 지을 때 상량문이 기록되어 있다. 김제 금산교회당 경우 건물 천장에 상량문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자반 경우는 한문으로, 여자반 경우는 한글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 사람을 멸시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상량문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진각 지붕인 자천교회 예배당에는 상량문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천교회 측면

 

창문

 

2006년 복원된 예배당 내부 (남녀석이 구분되었다)

 

남자석에서 본 제단

 

내부 앞면

 

강단

 

강단

 

강단

 

강단 

 

강단 십자가

 

강단 의자

 

강단에서 본 남녀석 구분

 

2006년 복원된 예배당 내부 (남녀석이 구분되었다)

 

남자석

 

남지석

 

남자석

 

남자석 뒤 온돌방

 

여자석

 

여자석

 

여자석

 

여자석 앞면

 

여자석

 

여자석

 

2006년 복원 전 내부 기둥과 천장

 

2006년 복원 후 천장과 기둥

 

2006년 복원 후 천장과 기둥

 

2006년 복원 후 천장과 기둥

 

2006년 복원 후 천장과 기둥 

 

자천교회 주보 

 

 

<자천교회의 역사> 

 

1948년 수리한 예배당 모습    (이하 사진 글 출처- 자천교회 홈피  http://www.jacheon.net/)


교회가 점점 부흥하므로 안의와선교사는 권헌중에게 초가집 예배당 대신 더 넓은 공간의 예배당을 건립하도록 권유를 했다. 이에 권헌중은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심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권헌중의 계획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는 ‘유교 국가에 웬 서양 종교인 기독교인가?’ 라는 지역주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결국 새로운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계획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권헌중은 주재소(지금의 지서)와 신촌 면사무소를 건축해주는 조건으로 새로운 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따라서 6개월 동안 이 모든 일을 마친 이후에 지금의 자천교회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우여곡절 끝에 자천교회는 헌당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 성전의 헌당식을 언제 했는지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 현재 자천교회가 창립일로 지키고 있는 날은 1903년 4월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미 훨씬 이전에 교회가 세워져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목조 기와 건물은 1904년 건물이 완성되어 이미 면사무소에 종교 건물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와 유교적 토양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성된 자천교회 목조 기와 건물인 일자형 교회는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투박한 시골의 성도들과 100년 신앙 요람지를 지켜오고 있다. <권혁동 진술>    경북 문화재자료 제452호

 

1948년 수리한 교회 내부

 

1947년 재건된 교회 종

 

김영대씨의 모친이 교회에 풍금을 헌납하므로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민족을 생각을 할 수 있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찬송 소리가 풍금 소리와 성도들의 소리가 어울려 울려 퍼질 수 있었다. 한편 김영대씨의 풍금 헌납에 감동을 받은 공덕동에 사는 당시 서석희 영수의 친척인 서학수 면장의 부인(당시 권사였음)이 헌금을 하여 종을 사고 종각을 높이 지어 새벽기도회부터 낮예배와 저녁 예배 시간에 맞추어 울렸다. 당시 시계가 보급되어 있지 않은 탓에 교회 교인들의 출석에는 물론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시간을 아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교회 종소리가 울리므로 자천교회가 서 있는 온 지역에 울리는 구원의 소리가 되었다. 하지만 구원의 소리를 내는 자천교회 종소리도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가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조선의 놋 재품을 강제로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많은 교회의 종들이 일제에 의해서 없어졌던 것이다. 자천교회의 경우도 시대의 조류를 피하지 못하고 서학수씨 부인의 헌금으로 세워졌던 종탑이 철거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얼마간 종 탑이 없다가 자천교회는 해방을 맞이하고 몇 년 후인 1948년 새로운 종탑을 교회 마당에 세우게 된다

 

1937년 경동노회, 일제 하 수난시대

 

 

양재황 두 부부가 자천 교회에 오기전에는 풍금이 없었다. 이들이 자천교회에 오던 시기와 비슷하게 풍금이 교회에 생기게 되었다. 자천교회 풍금은 영천군에서 세 번째 부자인 김영대(金英大)씨의 자당이 당시 돈 70원을 드린 헌금으로 일본에서 생산하는 ‘야마하’ 대형 풍금을 사게 되었다. 이 풍금을 가지고 양재황의 아내인 이복조 집사는 교회에서 반주를 하면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당시 찬송가가 잘 보급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붓글씨로 한자에 크게 써 놓고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자천교회 담장을 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당시 독립을 염원하던 성도들의 찬송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찬송 소리기 더 크게 흘러나왔다. 자천교회의 담장을 넘어 흘러나온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찬송소리는 일제에게는 ‘민족운동’으로 간주받게 되었다. 당시 집사로 자천교회에서 봉사하던 양재황의 일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1935년 5월 양재황은 금융조합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주재소에 나오라는 명령을 받고 갔다. 그런데 당시 순사 부장인 ‘다까야마’가 호주머니에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찬송가 가사가 빽빽이 적힌 종이 쪽지를 내밀면서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물었다. 그리고 다까야마는 양재황에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찬송을 부르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부르는 불온한 노래라고 인정하면서 부를 것을 금하였다. 양재황은 다가야마 순사 부장에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찬송의 ‘일하러가세’라는 가사는 ‘독립운동을 하러가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천리 강산에 있는 불신자에게 예수교를 전하러가자는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까야마 순사부장을 이 찬송을 부르지 말 것을 강력하게 명령했다. 지방에서 일어나 작은 일화이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교회와 성도들의 작은 몸부림이 자천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다. 결국 1년이 지난 뒤 조선 총독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하여금 각지교회에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만왕의 왕’등 10여 곡을 금지곡으로 정하고 찬송가에 ×표를 표시하여 부르지 말라고 공문을 보내어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 될 때까지 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1957년 반사, 교회자료 소실

 

노고재’에서 뿌려진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온갖 역경 가운데 싹이 나고, 자라면서 100년의 세월을 신앙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는 지금까지 지켜왔다. 하지만 100년의 발자취를 찾아내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무엇보다 1946년 10.1 사건과 1950년에 겪은 6.25는 초기 자천교회의 역사를 허공 속에 묻어버렸다. 특히 6.25당시 인민군이 자천교회 건물을 사용하므로 초기 교회에 대한 자료는 거의 소실되어버렸다. 6.25를 기점으로 해서 먼 거리에서 오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분립되는 계기가 있었다. 그 첫 교회가 1950년 상송 교회가 1979년 입석교회가 자천교회에 출석하던 성도들을 통해서 분립하여 설립하게 된다. 이처럼 거리상의 문제로 먼 지역에 새롭게 교회가 서는 일도 있었지만 같은 지역 안에서 신앙적 갈등으로 1974년 자천교회에서 화북교회가 분리되는 아픔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 교회의 역사들의 소실과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 가운데도 자천지역에 떨어진 한 알의 밀 알은 땅 속에 묻혀만 있지 않았다. 작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자천 지역에에 복음의 요람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1959년 여름성경학교


권헌중 장로의 별세 이후 잠깐 침체해 있던 교회는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나름대로 활기를 찾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중의 한가지 이유를 말하자면 양재황과 이복조 두 부부의 자천교회 전입이다. 양재황(洋在晃)은 1933년 3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영천군 신령금융조합 자천지소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아내 이복조(李福祖)는 대구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자천 국민학교 강사로 2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934년 두 부부가 자천교회와 인연을 맺고 집사의 직분으로 2여년간 교회를 섬기면서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믿음의 선배인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시 양재황 집사는 주일학교 책임과 예배인도 및 설교를 맡았다. 또 아내 이복조 집사는 풍금 반주와 주일학교와 교인들에게 찬송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아 교회를 섬겼다. 이들 두 부부를 중심으로 여름이 되면 하계 아동 여름 성경학교를 3주간 개최를 했다. 약120여명의 아동들이 모였으며, 이들에게 주로 성경과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성경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사람은 양제황의 처재인 신명 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은조(李恩粗)와 신명 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종현 조사의 딸이 봉사했다. 이처럼 아동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서 교회에 점점 활기가 띠기 시작했다

 

2006년 복원 전 모습

 

2006년 복원 전 모습

 

자천교회 100주년 기념예배 (2003년)

 

복원 전 교회 내 4개 기둥

 

100년을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온 자천교회의 첫 문을 열고 들어서면 네 개의 기둥이 예배당 중앙에 버티고 서 있다. 예배당 중앙에 왠 네 개의 기둥인가? 네 개의 기둥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일자형’ 교회를 지을 때 내부 공간을 더 넓게 쓰기 위한 방편으로 기둥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라 이야기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구한말의 사회상을 잘 드러내어주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의 시대적 사고를 반영해주는 것이다.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사고는 초기 우리 교회들의 건축물들이 ‘一자형’과 ‘ㄱ자’형으로 지어서 남녀가 구분지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 ㄱ자 교회의 특징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금산교회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ㄱ자로 지어진 금산교회는 한쪽 날개는 여자석이고, 다른 한쪽은 남자석이다. 설교대인 강대상은 그 모서리에 위치하여 남녀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설교하도록 되어 있었다. 반면 ‘一자형’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실내 중앙에 기둥이 네 개 버티고 있다. 기둥을 이용하여 중간에 칸막이를 함으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내외하여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100년 동안 보존되어 오는 자천교회 예배당 내부에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에는 유교적 사고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잘 나타내어 준다. 하지만 유교적 사고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유교국가에 웬 기독교 교회인가?’ 라는 동네 주민들의 반대로 교회 건립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남녀가 함께 혼석을 해서 예배를 드렸다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겠는가? 유교 문화를 전혀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하므로 교회가 그 지역에서 든든히 서가고 지역을 섬김에 있어서 더 수월하지 않았나 싶다.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사고는 예배당 중앙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교회 출입문에서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갈 때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좌우 남녀의 문을 구분하였다. 하지만 1948년경 교회가 부흥하면서 좌우 남녀 구분하는 문을 없애고 예배당 뒤편에 출입문을 새롭게 만들었다. 예전에 있던 문에는 현재 걸려 있는 ‘예배당(禮排當)’이라 쓰여진 현판을 걸었다

 

자천교회 103주년 기념예배 및 예배당 복원예배 (2006년)

 

2003년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자천교회는 경상북도와 영천시에서 2억4000만원을 지원받고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2006.4.1일 준공감사예배를 드렸다. 자천교회는 1903년 권헌중 장로가 미국인 애덤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의 권유로 세웠으며 현재까지도 나무와 기와로 된 25평의 예배당 기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나무와 기와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됐으며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보수 및 복원공사가 필요했었다. 복원 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예배당을 좌우로 나누는 목재 칸막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던 구한말 시대적 상황에 맞게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리도록 설치한 것이다. 예배당 현판 아래에 있던 판자 출입문도 복원했다. 이 판자문 역시 남녀가 따로 예배당에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오래 전에 없어졌다가 이번에 본 모습을 찾았다. 일제시대 때 유리문으로 바뀌었던 창문들도 본래의 창호지문으로 복원됐다. 창문틀의 크기와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가 조언을 거쳐 옛 모습을 찾았다는 설명이다. 애덤스 선교사가 생활하던 방도 제 모습을 찾았다. 예배당 바닥을 뜯어낸 결과 구들장과 아궁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애덤스 선교사는 예배당 한쪽에 칸막이를 쳐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예배당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 목사는 “교회 내외부를 살펴보면 당시 넉넉지 않은 교회 사정에서 목공들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교회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예장통합 총회 관계자는 “자천교회는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 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며 “올 가을 총회에서 관련 규칙안을 마련해 제1호 총회 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민일보 엄기영 기자, 2006.4.4)  

 

2006년 복원된 교회 (남녀 출입문 복원), 교회 직원

 

 1대 배위량 선교사


한국 땅에 개신교 복음이 전해지 것은 1884년 이전의 일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한국 땅과 접촉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성경과 접촉도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복음의 첫 발의 기준을 1884년 9월 20일로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 북 장로교 소속 배위량(裵褘良, W. M. Baird)의 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 한국 선교를 목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알렌과 더불어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셀러(H. G. Appenzeller), 그리고 스크랜튼(M. F. Scranton)과 같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선교사들에 관하여 한국 교회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많이 다룬다. 하지만 각 지방 교회사 이야기를 위해서는 지역에서 활동한 묻혀져 있는 선교사들에 관해서 언급 해야한다. 영남지역 교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배위량(裵褘良, W. M. Baird) 선교사에 관해서 이야기 해야할 것이다. 물론 자천교회의 이야기의 출발점도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출발해야 옳을 것이다. 영남지방과 관계한 배위량 선교사의 이야기는 1891년 2월 2일 두 부부가 부산으로 온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에 입국하던 9월부터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배위량 선교사는 주로 개인 전도와 지역 순례를 통해 신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방을 개방하여 사랑방으로 활용하고 전도를 위한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배위량 자신의 방을 ‘동네 사랑방(omnibus house)'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위량은 부산 영선현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끝에 주 3회로 모이는 정기 모임과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1891년 11월 7일 영남 지방의 어머니 교회인 오늘의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초량 교회가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구와 경북 지방의 장로교회 전래에 관한 이야기는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며 초량교회를 출발하게 했던 배위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1893년 4월 17월부터 5월 20일까지 1,240리의 대구와 경북지역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전도 여행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 지방의 선교를 위한 최초의 시도로써 경북지방 선교의 시작이 되는 중요한 선교 여행이다. 1893년 4월 22일 배위량은 서경조 조사와 조랑말을 타고 마부인 박재룡 소년을 데리고 밀양 청도를 지나 팔조령을 넘어 가창을 경유하여 대구에 들어간다. 이 날은 대구 땅에 개신교 복음의 사자가 처음 도착한 감격의 날이었다. 이들은 대구에 3일간 머물고 25일 동명을 지나 상주, 안동, 의성, 신령, 배위량 선교사의 선교여행 경로 영천, 경주, 울산을 경유하여 다시 동래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선교 여행을 마치게 되었다. 그가 대구를 방문하여 어떤 형태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신의 일기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기문에서 “전도할 틈은 없었으나 많은 서적을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배위량 선교사의 일기문의 기록을 볼 때 대구 지방의 개신교 복음의 접촉은 1893년 4월 22일 책자를 통한 복음전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94년 배위량은 다시 대구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대구가 선교의 전략적 기지로서 매우 적당한 위치라는 점을 확신한다. 그리고 ‘대구는 경상도 북부지방의 중심지며, 인구가 많고, 교통상 서울과 부산이 연결되며, 경상감영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약령시가 열리는 행정의 중심요, 부동산을 구입하는데 관청의 반대가 없다’는 긍정적인 사실을 미국 해외 선교부에 보고하게 된다. 배위량의 보고 결과 1895년 11월 부산 내륙지부의 감독을 받는 내륙지회로서 대구 선교부의 승인 받고 그 해 12월 대구에 올라와 선교지를 물색하게 된다. 그리고 1896년 1월 남문 안에 위치한 정완식 씨의 대지 420평 초가 5동 20여간과 와가 1동 6간의 큰집을 구입했다. 이를 약간 수리하여 1896년 4월에 부인과 아들을 데이고 이사를 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해외선교사 연차총회에서 배위량을 서울 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발령을 내었다. 이로써 배위량의 가족은 6개월의 짧은 대구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가고 대구의 선교 업무는 그의 처남 안의와 (安義渦, E. Adams)가 맡아보게 된다.

 

2대 안의와 선교사

 

배위량 선교사의 처남인 안의와 선교사는 대구에 오기 이전인 1895년 9월29일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대기 중에 있었다. 그는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대구 선교업무를 인계 받은 후 즉시 대구에 부임하지 않고 한국어를 공부할 목적으로 1년 간 더 부산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1897년 11월 1일 부인(Nellie Dick)과 아들(Edward), 곧 해산할 부인을 도울 임시 보모 췌이스(Miss Marie Chase)와 그의 어학 선생인 김재수와 함께 대구 성안으로 들어왔다. 안의와 선교사는 호주선교부와 사무 연락관계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는 1월 21일 까지는 줄곧 대구에서 지냈으며 다시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하고 또 사랑방 전도를 하면서 4월 27일까지 대구에 머물렀다. 후에 그는 2개월간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두 사람의 신자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전도 여행 동안 지방 관리를 찾아보고 자신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도 이야기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문 서적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선물로 주었다. 이들 중에 이미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안의와는 여행 중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달 동안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고 대구로 돌아오게 된다

 

 

1대 권헌중 장로

 

장로 권헌중은 교회를 돌보면서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바쳤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헌신도 겸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장립하기 2년전 1920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채무를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답(沓) 이두락(二斗洛)을 팔아서 연보를 하였다. 하지만 권헌중 장로로서 교회를 향한 헌신은 길다기 보다는 너무 짧았다. 장로로 취임한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1925년 음력 12월 28일 소천 하심으로 그의 사역은 너무나 짧았다. 표면적인 사역의 기간으로 볼때 너무 짧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복음을 모르는 신촌면(지금의 화북면)에 복음의 요람인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감에 있어서 기초를 놓은 것을 생각할 때 전혀 짧지 않은 시간이다.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듯....” 권헌중 장로의 소천으로 날로 든든히 서 가던 교회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것이다. 하지만 시대마다 나름대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일꾼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2대 장로는 권헌중 장로와 함께 영수로 섬기던 서석희 영수가 1936년 11월 23일 경동노회가 조직 된지 1년이 지난 후에 1937년 10월 9일 자천교회 2대 장로로 장립하므로 권헌중 장로의 뒤를 이었으며, 서석희 장로의 뒤를 이어 권헌중 장로의 아들인 권오진이 1948년 12월 8일 3대 장로로 장립 하므로 자천교회 당회를 자천교회 3대 장로인 권오진 장로와 가족들 이끌어 나갔다  

 

 

 

 

권헌중 장로 아들 권오진 장로 가족

 

권헌중 장로 증손자,  신점균 목사, 권순극(권헌중 증손자), 박태수 장로, 이상록 장로

 

권헌중 장로 친필 편지, 딸 권기수에게

 

권헌중 장로가 1915년 구입 사용한 성경

 

1908년 상해에서 제작된 성경

 

자천교회 이야기는 1898년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2개월 전도여행에서 시작한다. 그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는 경주의 작은 마을의 선비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가 서당 훈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헌병들이 각 군 소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은 일본 헌병들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탓에 낮에는 일본 헌병의 천국이요. 밤은 의병 천지였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반과 천민들이나 할 것 없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제의 고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신들의 새로운 복음 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권헌중에게 있어서도 고통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경주에 있는 한적한 곳의 선비로서 서당 훈장의 생활을 접고 청송군 현서면 수락이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된다. 하지만 수락에서의 생활도 길지 않았다. 그곳의 생활도 접고 또 다른 복음 자리를 찾아 현서면 수락에서 대구를 향하고 있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영천을 거처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권헌중은 새로운 복음자리를 찾아서 대구로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들의 만남은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를 잇는 ‘노고재’라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휴식을 하던 중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권헌중은 당시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이었고, 모양새도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키와 눈과 코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서툴게 한 탓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헌중과 함께 동행하던 가족들과 노비, 머슴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한바탕 웃는 일도 벌어졌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와 첫 만남을 가지므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되었다.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하여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주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그곳에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국 초기 교회들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자천교회 역시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권헌중은 자기가 살고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서당으로 사용하며 한문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된 자천 교회의 당시 교인은 서당에 다니는 문동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므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을 받아 들이므로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사도 덩달아 신이 나서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 상황을 뒷전으로 하고 자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초가집 사랑방의 자천교회의 모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협소하였다. 따라서 초가집 사랑방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지방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희도 학교가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서 대구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1900년 11월 11일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10월 23일에는 신명학교가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하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교를 개교한 후 안의와 선교사는 1902-1910년 사이에 경북 각처 교회들에게 400원씩 보조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현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천지방에 있는 교회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이 밝혀진 학교는 평천교회의 기독양덕학교, 신령교회의 흥화학교, 우천교회의 기독진도학교와 더불어 권헌중은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2년제 학교인 신성소학교의 설립을 하였다. 하지만 자천교회가 설립한 신성소학교의 설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서 ‘1913년 남학교를 설립하여 생도(生徒) 50명을 교육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교회사’에서는 ‘1914년 자천교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생도 50여명을 교육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를 학교의 설립 연대로 볼 수 없다. 이는 학교가 설립한 후에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노회 보고 연대를 기준과 2년 재 학교라는 것을 고려하고, 초가지 집 교회에서 목조건물 교회 건립을 고려해 볼 때 신성소학교 설립 연대는 대략 자천교회 목조 건물을 헌당 하던 때와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세운 신성소학교는 처음 남자 반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여자반도 모집할 것을 권헌중 권유했다. 그는 권유를 받아들여 여학생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의 딸인 권기수씨를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되었다. 후에 권기수씨는 신명 여교에 입학하여 제 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헌중은 딸 권기수씨를 신명 여학교에 입학시킨 후에 1925년 20일과 10월에 친필로 딸의 안부를 묻는 편지와 엽서를 보내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으나,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바빠서 쓰지 못했다’ 라고 했다. 대략 교회를 돌보는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었음을 추측을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권헌중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쓴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소천 하였다. 권헌중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므로 복음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뿐만 아니라 교육의 요람으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용한 시골에서 글을 가르치던 선비 권헌중은 안의와로부터 받은 복음에서 출발하여 자천이라는 시골 동네에 초가집 예배당과 서당, 그리고 목조 기와의 ‘一子’형 예배당을 건립하여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어 왔다. 권헌중은 새롭게 건립된 예배당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영수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다. 1915년 당시 권헌중과 더불어 서석희와 정해민이 자천교회 영수로 섬기고 있었다. 세 명의 영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가던 중 첫 번째 장로를 장립 할 수 있는 시기가 자천 교회에 찾아왔다. 교회는 권헌중을 장로로 세워줄 것을 결정하고 1920년 6월 11일 제8회 경북 노회에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공부하였다. 노회의 절차를 밟아 권헌중은 장로 청원이 있은 후 1년 반이 조금 넘은 1922년 2월 26일 오전 11시 새롭게 건립된 본교회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주례로 장로 장립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 설립이후 첫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천교회는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권헌중 장로가 임직하던 해인 1922년 5월 13-18일까지 자천교회는 새롭게 건립된 목조 예배당에서 김성로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은 본 교회 성도들 50여명과 각처 교회에서 온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또 저녁에는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말씀을 청강하는 동시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60여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가 40여명이 되었다.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를 보수하기 위해서 헌금 5백 10여원이 드려지므로 더 풍성한 은혜와 결실이 있었다. 권헌중은 장로 장립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활동도 왕성할 뿐만 아니라 경북노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신문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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