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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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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전경, 요새 수도원이다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불가리아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라의 수도원은 마을에서 떨어진 산 속에 있는 불가리아 최대의 수도원이다. 중세에는 역대 군주들로부터 아낌없는 기부를 받았다. 14세기 말 불가리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그 시대에도 이 곳만은 각별한 특권이 인정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자, 릴라의 수도원은 불가리아 민족의식의 각성과 함께 문화, 정치 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운동의 정신적 성채가 되었다. 그리고 비잔틴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불가리아의 독자적인 종교 예술을 꽃피웠다. 불가리아 민족주의의 상징-  “불가리아인은 모두 함께 성스러운 릴라의 수도원을 지켜야 하고, 또 기부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불가리아인 전체에게 가져다 주는 이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가리아의 수사 파이시 히렌다르스키는 [슬라브 불가리아사]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당시는 불가리아인들 사이에 反오스만투르크의 기운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불가리아는 100년에 이르는 투쟁의 결과, 러시아의 지원으로 1878년 공국으로 독립했다. 파이시의 호소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도 수도원의 성채와 같이 두꺼운 벽 안쪽에는 불가리아의 문화재가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것은 [쿠르프니크 복음서], [스카보 복음서]와 같은 종교적 용도의 필사본을 비롯한 도서이자, 문서였다. 19세기에 릴라의 수도원은 불가리아어로 공부하는 학교를 가장 먼저 설치했으며, 해방 운동을 하는 투사들도 모여 불가리아 민족 각성에 앞장섰다. 릴라의 수도원은 발칸 제국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교회와 민족 사이의 일체감과 거기에 바탕으로 둔 민족 독립의 여정을 강렬하게 상징한다. 깊은 산 속의 은둔 수도지에서 대수도원으로-  릴라 산 속의 릴스키마나스틸에 위치해, 어수선한 현대 사회와는 동떨어져 있는 릴라의 수도원은 붉게 빛나는 지붕을 얹은 건물이 주위의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수도원의 기원은 이반 릴스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반은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 퇴폐에 환멸을 느끼고 릴라 산 속의 동굴에서 숨어 지내는 수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에 대한 존경심이 사람들 사이에 점차 퍼져 나갔다. 그를 따르는 신자와 순례자들이 그의 은신처 주변에 모여, 지금의 수도원에서 몇 km 떨어진 장소에 정착해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성인으로 추대받은 이반의 유골은 발칸 제국 곳곳에 모셔졌다. 세르디카(현 소피아)에서 헝가리의 에스테르곰으로, 다시 세르디카로 돌아왔다가 그 후 타르노보로 그리고 1469년에는 마지막으로 릴라의 수도원에 모셔졌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융성과 함께 릴라의 수도원의 권위와 세력은 강해졌지만, 14세기 초 대지진으로 당시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건물을 재건한 사람은 이 지방의 귀족 프레리요 드라고보라였다. 그는 이 성지에 외적의 공격이나 자연 재해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한 성채를 건설했다. 당시의 건물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1335년에 건설된 프레리요 탑뿐인데, 이 탑은 높이가 25m나 되고 옥상이 흉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많은 공벽(벽돌벽이나 돌벽 등을 안정시키기 위해 벽에서 돌출시켜 기둥 모양으로 만든 벽체의 일부)을 갖추고 있어서 지금도 외관에 위엄이 서려 있다. 중세에 불가리아 군주들은 릴라의 수도원에 특권을 많이 부여했다. 14세기 말부터는 오스만투르크의 군주가 불가리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들 역시 특권을 인정해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17~18세기에 걸쳐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란의 여파로, 수도원은 여러 차례 습격과 약탈을 당했으며, 1833년에는 큰 화재로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1년 뒤에는 돌과 목재, 회반죽 등의 재료가 운반되고 재건의 망치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32,000㎡의 부지에 수사용 독방 300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예배실 4개, 도서관, 손님용 방, 수도원 관리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입구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성모성당 내 프레스코화, 정면입구 둥근 천장 예수상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릴라의 수도원에 딸린 성모 성당에는 옥외 회랑이나 옥내의 벽이 선명한 색깔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약 1,200개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19세기에 제작되었으며, 작가는 반스코파나 사모코프파 화가들이었다. 반스코파는 피린 산맥에 있는 학교를 거점으로 활약한 일파이며, 사모코프파는 18세기 초 종교화 이외의 분야에 새로운 화풍을 불어넣은 일파였다. 두 파 모두 독자적인 화법을 대대로 계승했다.  18~19세기 불가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두 파의 화가들은 작가 정신에 눈떠, 좀더 예술성 높은 작품을 지향하게 되었다. 작품에 날짜를 적어넣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처럼 이름 없는 직인에서 이름 있는 예술가로 발걸음을 내디딘 그들이 자신들로서는 기념비적인 작품인 성모 성당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불가리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로, 그 이후 수도원의 벽화는 정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초기 그림에는 인물의 자세나 표정, 풍경, 색깔 등에 뚜렷한 정형이 있었으며, 모범대로 그리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화가는 지상과 천상의 중개자로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신앙의 실천이라고 여겨졌다. 마침내 그 시대가 끝이 나고, 불가리아의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다. 17세기로 접어들자, 전통적인 양식과의 결별이 뚜렷이 드러났다. 판에 박힌 수사들 대신 전사가 자주 묘사되었는데, 용을 퇴치하는 성게오르기우스나 이교도와 싸우는 데메트리오스 등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 대항하고 민족의 자립을 촉구하는 상징으로 그려졌다. 또 사모코프파의 그림에는 바로크 양식이나 로코코 양식의 영향이 보인다. 이바노보의 암굴 성당에서 볼 수 있는 황금빛 바탕색은 점차 불가리아의 경치로 대치되었다. 인물 역시 불가리아의 민족 의상을 입고, 불가리아 특유의 상징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민족의식이 고양되었다는 증거이다.

 

 

릴라 수도원 성모성당 내 프레스코화, 정면입구 둥근 천장 예수상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아이코노스타시스

 

성모성당의 프레즈비테리움과 신랑을 구분하는 아이코노스타시스 장식, 19세기초 불가리아 예술의 정수로 일컬어지고있다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발코니, 안뜰을 바라보고 세워진 발코니는 19세기 수도원 건축의 돋특한 면이 잘 나타나있다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발코니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릴스키마나스틸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불가리아 종교화의 대표작-  널찍한 손님용 방 10곳은 한결같이 목조각이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지만, 각각 다른 느낌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것은 불가리아 각지에서 모여든 직인들의 작품이다. 또 수도원 관리실에는 높이가 22m나 되는 굴뚝이 달린 인상적인 부엌이 있다. 수도원 중앙에 있는 삼랑식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건물인데, 그리스 십자형 평면에 둥근 지붕 24개를 얹고 있다. 이 성당에서는 유럽과 아시아 양쪽 문화를 수용한 다채로운 장식을 볼 수 있다. 회랑의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19세기 불가리아의 종교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중세에 건설된 성당은 재건 과정에서 철거되었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이 조각된 나무 문이나 수도원장의 의자, 그리고 프레스코화도 부분적을 남아 있어, 현재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출처- http://blog.naver.com/notredam)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출처- http://kr.blog.yahoo.com/lee1004gg)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릴라 수도원 회랑 프레스코화

 

문 장식

 

문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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