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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신전(Temple of Apo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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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톤 신전 유적지 (레토, 아폴론, 아르테미스 신전)      (출처- http://blog.naver.com/bss2079/60166454466)

 

크산토스에서 남서쪽으로 10km 떨어진 레톤은 그리스 여신 레토를 비롯한 3위의 신을 모신 리키아의 종교적 성소였다. 도시의 이름 '레톤'도 레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Letoon이라는 로마 알파벳을 영어식으로 읽어 '레툰'이라고 한글표기한 경우가 많으나 이 글자는 그리스 문자 'Λητῶον'을 그대로 로마자로 옮긴 것으로 고전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레툰이 아니라 '레토온'에 가까운 발음이다. 라틴어로는 Letoum. 본래는 리키아의 토착 지모신(地母神)을 모시던 성소였는데 리키아가 그리스 문명권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화하면서 그 지모신이 그리스 여신 레토(Leto)로 대체되었고, 그에 더하여 레토가 낳은 쌍둥이 남매, 아폴론(Apollon)과 아르테미스(Artemis)까지 함께 모시게 되었다. 제우스가 레토를 범하여 임신하자, 그것을 질투한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모든 나라의 왕들에게 레토가 아이를 낳을 곳을 제공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여기저기로 피해다니던 레토는 델로스(Delos) 섬에서 결국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쌍둥이가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었으며, 이후 그 쌍둥이를 데리고 이곳 리키아로 와서 정착했는데, 레토는 이곳 레톤을, 아르테미스는 크산토스를, 아폴론은 파타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크산토스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자세한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며 195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거의 모든 유물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레톤의 아폴론 신전터

 

아폴론의 고향 파라타에서 레툰(Letoon)은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레툰도 파타라처럼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리키아의 고대도시였다. 레툰은 아폴로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인 레토의 영광을 위해 세워진 도시이다. 레토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다. 레토는 신중의 신 제우스의 애인이다. 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제우스의 부인 헤라의 방해로 애를 낳을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델로스섬의 도움으로 애를 낳았다. 또 다른 이야기는 리키아의 파라타에서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아이를 씻을 곳을 찾아 지금의 에쉔강으로 왔다. 여기서 레토를 방해하는 목동들을 만나게 되자 그녀는 목동들을 개구리로 변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레툰의 신전터에서 돌아다니는 개구리들이 바로 그 목동들이라고 한다. 파타라의 아폴론과 레툰의 레토, 이들은 아나톨리아의 토속신들이다

 

레톤의 아폴론 신전터 뒤쪽

 

레톤의 아폴론 신전터 전면

 

레톤의 아폴론 신전터 전면

 

레톤의 아폴론 신전터 전면

 

아폴론 신전 안내비        (출처- http://blog.naver.com/bss2079/60166454466)

 

아폴론 신전 뒤쪽 주랑의 모습. 헬레니즘 시대의 것으로 기원전 4~2세기 정도의 것이다.

 


델로스섬의 아폴로신전 전경            
 


델로스섬의 아폴로신전, 

 

아폴로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다. 여신 아르테미스와는 쌍둥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섬으로 도망쳐 이곳에서 아폴론을 낳았다. 그리스계(系)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아 동방의 소(小)아시아나 북방민족으로부터 이입(移入)된 신이며, 본래는 목자(牧者)의 수호신으로 생각되나 나중에는 그리스적 성격과 문명의 대표적 신이 되어 국가에 있어 중요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하여, 특히 살인죄를 벌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 주는 힘을 갖고 있다. 예언의 신이기도 하여 델포이를 중심으로 그의 신전(神殿)이 세워져, 무녀(巫女)를 통해 신탁(神託)을 받는 일이 성행하였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라고도 하나 이것은 비교적 나중의 일이다. 사랑의 신화도 많아, 다프네는 아폴론의 구애(求愛)를 피하여 월계수가 되었고, 카산드라는 그의 사랑을 받아 예언의 힘을 얻었으며, 하천신(河川神) 페네이오스의 손녀 귀레네를 사랑하여 아리스타이오스를 낳았고, 테사리아의 왕녀 코로니스와의 사이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얻었으며, 미소년 히아킨토스도 아폴론의 사랑을 받았다.

 


델로스섬 사자상

 

프랑스의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1873년부터 행해진 델로스 섬 발굴 조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유적을 발굴했는데, 이것은 그리스 전역에서 발굴된 것 중 규모가 가장 큰 고고 유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아폴론 신전은 힘이 넘치는 도리아식 신전 건축 뮤물이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의 아르테미스 신전터나 주택터, 극장터 등도 발견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실시된 발굴 조사로도 델로스 섬에서 탄생한 과거의 거대한 유산의 전체 규모를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다. 델로스 섬이 번영하던 시대, 성지로서 수많은 참배객을 모았던 아폴론 신역은 현재 벽과 도리아식 원주만이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항구가 있던 섬 북서쪽에서 아폴론 신역으로 통하는 성스러운 길 오른쪽에는 아폴론이 태어난 ‘성스러운 호수’로 가는 길을 따라 기원전 7세기 말에 낙소스인이 바친 사자석상이 10개가 넘게 세워져 있었지만, 지금은 5개만 남아 있다. 낙소스 섬에서 나는 대리석으로 만든 이 상은 받침대와 사자상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운찬 모습과 강직한 표정이 마치 ‘성스러운 호수’의 파수꾼과 같다. ‘성스러운 호수’는 1924년 당시 이 지방에 유행하던 말라리아를 예방하기 위해 메워졌다.

 


델로스섬 아폴론신전 

 

에게 해의 작은 섬 델로스가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 신화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애인 레토가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과 아폴론의 여동생이자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낳은 곳이 바로 이 섬으로, 덕분에 아폴론 섬으로 숭배받게 되었다고 한다. 델로스 섬에서 사람이 살기 사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소아시아 방면의 카리아인이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델로스 섬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대륙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찾아온 이오니아인들이 이 섬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델로스 섬에 아폴론 신앙을 확립하고 해마다 이 신에게 바치는 장엄한 제의를 거행했다. ‘델리아’라고 불리는 이 제의 때 봉납하려는 이오니아인이 모여들게 되자, 델로스 섬은 서서히 에게 해 중앙부의 다른 섬들에 사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델로스섬   

 

고린도 아폴로신전

 

이 신전은 주전 6세기경에 세워진 그리스의 신전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으로 전통적인 도리스식 기둥이며 기둥이 하나로 된 통기둥이다. 건축 당시에는 38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현재는 7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고린도 아폴로신전       (출처- http://attic.or.kr/board.php?board=photo1&command=body&no=2672)

 


 델피 아폴로신전, 델피 중심은 아폴로 신전

 

38개의 도리스식 돌기둥으로 된 지금의  신전은 기원전 366~329년에 세번째로 지은 것이다, 제우스가 레토 여신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낳았는데,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이다.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레토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퓌톤'이라는 뱀을 보내 괴롭혔었는데, '아폴론'이 이 '퓌톤'을 죽이고, '델포이'에 자신의 신전을 세웁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신탁은 잘 맞기로 유명합니다.  아폴론신전은 폐허가 된 채 주춧돌과 몇 개의 계단, 기둥만 남아 있지만 그 터로 보아 거대한 신전의 규모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신전 앞에는 히오스인이 페르시아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봉납한 높이 3m의 커다란 제단이 있다. 신탁을 받을 때 이계단 위에 희생물을 바쳤다고 한다. 신전은 길이가 60m, 폭이 23m 크기로 38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는데, 현재는 부분적으로 복원된 6개의 기둥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 있는 신전의 유적은 BC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신탁소는 신전 뒤의 작은 방에 있었다고 한다(현재 옴파로스는 델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옴파로스 옆에는 아폴론의 좌대가 있고 퓨티아(신탁을 전하는 여사제)는 삼각대에 앉아 신탁을 받고 예언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신전의 벽면에는 "너 자신을 알라. 무엇이든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는 격언이 적혀 있는데 원래 피티코스가 레스보스 주민들에게 한 말이었다. 후에 이 말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델피 아폴로 신전 복원도

 


로마 폼페이의 아폴로신전

 


로마 폼페이의 아폴로신전

 

아폴로는 48개의 칼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 사원의 가장신성한 부분은 그 성상 안치소로 1미터높이의 플래폼으로 만들어져있다. 성상안치소 그 자체는 30개의 칼럼들에 의하여 둘러싸여있고 그칼럼에는 신과 각종 의례에 대한 모습을 담은 조각상들이새겨 있다.그 제단은 성상 안치소입구 밖에서 있었습니다. 첫번째 신전은 BC 6 세기경에 지워졌으며 화재 이후에 BC 530 - 10년에 석조 신전으로 대체되었다. 이 신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인 높게 쌓아올린 재단을 첼라라고 하고 신전에서는 화살을 쏘는 모습으로 서 있는 아폴로 신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를 모신다. 예전에는 머큐리 신에게도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도시의 의원들에의해 이름붙혀진 이오니아 칼럼은 성상 안치소에옆에 있었다.또한 해시계는 이 기둥의 꼭대기에 있었다. 2개의 청동제 조각상들 이사원에 있다이것은 아폴로와 그의 자매를 조각한것으로 옆의 사진들에서볼 수 있다.  

 


로마 폼페이 아폴론신전 아폴론 상

 


공사중인 밧사이 아폴로 에피큐리우스 신전

 

BC 420년 무렵 고대도시 피갈리아 시민들이 도시가 페스트의 위험에서 벗어나자, 이를 감사히 여기는 뜻에서 수호신 아폴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신전이다. 그 뒤 지진이 발생하여 무너졌으나 1765년 발견되어 거의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신전은 밧사이산의 해발 1,600m 되는 곳에 푸른빛을 띤 방해석으로 세웠으며, 방위는 다른 신전들의 정면이 보통 동쪽을 향한 것과 달리 북쪽을 향했다.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고 정면 16m, 옆면 40m의 직사각형 평면이다. 천장은 없어졌고 높이 6m의 원기둥이 정면에 6개, 옆면에 15개 늘어서 있는데, 20세기 초에 복원된 것들을 합하여 모두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밧새의 아폴로 에피큐리우스 신전  (출처- http://blog.naver.com/pjh5101/80036117071)


B.C 5세기 중엽 아카디안 산 정상에 세운 태양과 의술의 신 아폴로를 모신 사원으로 고전양식, 도릭, 코린트 양식을 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음

 

내부 상상도

 

 아폴론신

 

  


밧사이 아폴로 에피큐리우스 신전 내부

 

B.C 5세기 중엽 아카디안 산 정상에 세운 태양과 의술의 신 아폴론를 모신 사원으로 고전양식, 도리아 양식, 코린트 양식을 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폴론 에피클리오스 신전은 거의 남북 방향으로 지어졌는데, 건물의 길이가 일반적인 신전보다 기둥 2개를 더 세울 수 있을 만큼 길며,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돌기둥이 있다. 프리즈 장식이 내진 안쪽에만 있는 점을 비롯해 일반적인 신전 건축과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을 지녔다. 현재 신전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터키 히에라볼리

 

고대 히에라폴리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은 Apollo신에 대한 숭배였다.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곳은 A.D.3세기경에 건축되어졌으며, 신전의 몇몇 기념물들은 헬레니즘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25 m 규모의 이 건물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밀레토스의 외항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      (출처-http://blog.naver.com/kimjoojin1/40051902253)

 

셀죽에서 남쪽으로 약 60 km 내려가서 서쪽으로 7 km 가면 디딤이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에서 정착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이 디딤의 아폴로신전이나 지성소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통치하고 왕래했지만 디딤이란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어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디딤은 이 자체가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고 밀레도의 영토에 속했으며 성직자들과 신전을 지키고 관리하는 종들이 살았던 곳 이었다. 디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8세기 말이었다. B.C 494년에 이오니아가 Lade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게 패했을 때 디딤의 아폴로신상은 끌려갔고 신전의 재물도 약탈당했다. 그 때 아폴로신전의 성직자들은 비겁하여 재산을 지키려 하지않고 정복자에게 아무 저항없이 모든 걸 바치고 난 후 밀레도인들의 분노를 살 것을 두려워하여 페르시아군에게 사정하여 자기들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페르시아왕은 그들을 데려가 살게 했는데 약 1세기 반 후에 페르시아군을 무찌르고 진군한 알렉산더 대왕이 밀레도인들로부터 성직자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대노하여 그들이 살았던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으며 아폴로신상을 디딤으로 복원시켰다. 페르시아인들은 아폴로신전을 파괴한 후 약 150년간 방치하였다가 알렉산더대왕이 이오니아에 도착했을 때 디딤에 새로운 신전을 짓도록 명령하여, 그후 약 500년동안 건축이 계속되었으나 결국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건축이 중단되고, 신전의 중요성은 퇴색되어 갔으며,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A.D 380년) 왕은 신전에 대한 참배를 일체 금했다. 1,500년대의 지진에 의해 파괴된 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신전의 모습이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모두 기둥이 105개가 있었던 웅장한 신전이었다. 신전을 돌아보면서 그 규모에 다시한번 놀랐다. 곳곳에 지붕에 조각되어있던 메두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둥중에 몇몇은 다른것과 다르게 톱니바퀴가 아니라 평범한 둥근 기둥이었는데 그것이 세계최초의 노동자들의 태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30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완성된 적은 없었다. 고대 세계의 신전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다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

 

 디디마 아폴로신전의 아폴로 두상

 


파르미라의 아폴론신전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출처- http://cafe.daum.net/goodfountain41/CsNu/)

 

아나톨리아 서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시데는 항구도시이다. 시데에서는 항구도시의 특징인 경제적 특징이 나타난다. 이 경제적 특징에는 무역의 교두고의 역활인 상업 활동이 활발한 성격이다. 따라서 그 유물들은 화려함과 개방성이 더욱 나타날 것이고 그 상업을 도와줬다는 신들의 신전이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시데(Side)는 고대에 밤빌리아의 최대 항구도시였다. 이로써 앞의 전제는 설명이 될수 있다. 또한 ,바다를 향해 남북방향으로 뻗어있는 작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이도시의 성격을 말해주며 현재에도 상업과 휴양의 도시로 그 성격이 남아 있는 것으로 논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유물로써 이 시데의 성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주전 5세기 경의 주화가 발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시데가 페르시아의 지배아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주화를 주조하였는 점에서 그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황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도시의 경제 및 문화활동의 중심지였던 아고라는, 아케이드화된(arcaded, 공랑(公廊)) 거리를 따라 펼쳐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 아고라를 지나서 반대편에 있는 박물관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정방형의 공간은 사면이 주랑(portico)들로 싸여져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북동쪽과 북서쪽 주랑들 뒤편으로 줄지어 서있는 상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원형극장과 가까운, 아고라의 남서쪽 모퉁이에는 아주 독특한 아치형 지붕을 가진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라트리움(latrium)‘, 즉 공중화장실로 사용된 것으로,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다. 하수도는 이곳으로부터 오물을 멀리 운반해 가는 역할을 하였는데, 24개의 화장실의 처리가 가능했다. 반면, 건물의 정면에 있는 수도관은 깨끗한 물만을 운반하였다. 아고라의 정중앙에는 원형의 사원이 있는데, 이는 티케, 즉 행운의 여신에게 헌정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구조물의 토대(podium) 밖에 남지 않았지만, 본래는 12개의 원주들이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고 피라미드 형식의 지붕으로 덮여있었다. 이 아고라는, 남쪽 모서리를 따라 이어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제2 아고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아고라 역시, 정방형의 구조를 하고 있었고, 주랑(protico)에 의해 감싸져 있었다. 아고라 중앙에 있던 높은 단상은 노예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장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의 주랑 뒤편에는 큰 규모로 장식되어 있는 건물이 있었고 거기에는 세 개의 방이 있었다. 그 건축학적 특색으로 볼 때, 아마도 황제의 궁전이었거나, 아니면 도서관으로 쓰이지 않았겠나 생각된다. 현존하는 유물들을 근거로 할 때, 이 건물은 본래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석상들로써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던 게 확실하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고라의 목욕탕은,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비잔틴 양식의 건물로서, 그 년대는 주후 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아치형의 현관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첫 번째 방은 즉 작은 냉욕탕을 보유하고 있는 프리기다리움이다. 이곳을 지나면, 석조 돔(stone-dome)으로 되어 있는 한증막(sweating room), 즉 로코니쿰(lokonicum)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방은 제일 큰 방으로서, 뜨거운 방 즉, 칼다리움(caldarium)이다. 목욕실의 대리석 바닥 아래에는 열기를 유지하기 위한 보온시스템이 연결되어 있었다. 칼다리움을 지나서 좁은 문을 통과하면, 두 개의 방으로 되어있는 테피다리움, 즉 샤워구역이 나온다. 목욕탕 정면에는 ‘팔라에스트라(체육관)’가 있는데, 이곳은 주랑의 형태로 감싸져있는 안뜰이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목욕하기 전에 운동을 즐겼다. 주전 1세기 무렵, 시데에는 실리시아(Cilicia) 해적들이 쳐들어와서, 이 도시를 해적의 본거지와 노예시장으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시데 사람들은 해적들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로 인한 교역으로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데의 주도로는 이 북동쪽의 성문으로부터 시작되며, 반도의 서부 끝지점에 이르기까지 거의 직선으로 계속해서 뻗어있다. 이 도로를 따라서 도시의 주요 관공서들과 그 구획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의 발굴조사 결과를 볼 때, 시데는 완벽하게 계획된 수도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수도시설은 지하수도관(Vault)으로 감싸져 있었고, 주도로 밑과 기타 소도로 밑에 매설되어 있었다. 성벽 바깥 정문 반대편에는 님파에움, 즉 기념 분수대가 있었는데, 이는 세 개의 닌치로써 전면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앞에 분수샘(fountain)이 있었다. 파이프관을 통해서 흘러들어온 물은, 니치들의 정중앙에 있는 분출구(spout)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이렇듯 시데는 그 유물들로 경제적인 성격의 도시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격의 도시에는 사원이 많이 있다. 이는 경제적 활동을 주관하는 것은 신이라 생각했던 고대사람들의 종교성과 신들의 짖꿎은 경제활동의 방해를 방치 하지 않기위해서 더욱 더 종교가 발달했다. 밤빌리아에서 가장 다채롭고도 아름다운 사원들은 대부분 시데에 있다. 반도(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쪽 끝 부분에는 두개의 웅장한 사원이 있는데, 바로 오른편에는 바다와 항구가 맞닿아있다. 이들 사원들은 주후 2세기 중엽에 건설되었다. 전체가 대리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페리프테로스(peripteros, 2줄의 열주(列柱)를 세운 것)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고린도식의 배열을 가지고 있다. 짧은 쪽에는 6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으며, 긴 쪽에는 11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다. 주후 5세기 경에는 이들 사원 정면에 커다란 바실리카가 세워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안뜰(atrium)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들 사원들은 아주 많이 손상되어 있긴 하지만, 본래의 형태는 거의 정확하게 추정 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시 이 항구지역의 뱃사람들 가운데서 수호신으로 탁월하게 숭앙받던 신이 바로 아데나(Athena)였기 때문에, 이들 두 사원 중 하나는 아데나 신에게 헌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원은 아폴로에게 헌정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아폴로 신전의 복구 작업은 현재 계속되고 있다. 아케이드(지붕덮인 아치형 거리) 거리와 극장 사이에는 초기 로마시대 사원의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사원들은 가원형태(pseudo-peripteral, 원형과 유사한 열주형태..?)의 양식을 보여주는데, 오늘날은 그 토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토대는 북쪽에서부터 경사가 올라가며, 전체가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전의 성상안치소(cella) 정면에는 기둥이 네 개가 있는데, 이들은 고린도 양식을 갖추고 있다. 원형극장의 형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디오니소스를 위한 신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자신만의 언어로 “석류”인 시데는 그 이름처럼 경제적 활동에서 가장 활발하며 종교가 난무했고 아름다움으로 치장된 도시였다. 하지만 노예시장이었다는 악명을 가진 도시였다. 경제제일의 가치관을 가진 시데는 인격이 경제에 의해 훼파되는 아름답지만 너무나 셔 씁습함이 남는 석류 그 자체였다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1716488)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출처- http://cafe.daum.net/7770navy)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출처- http://cafe.daum.net/7770navy)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출처- http://cafe.daum.net/migigaja/Fx2J/20)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지붕을 받들고 있는 부조는 메두사의 조각들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기둥을 세울 때 미끄럼을 방지하고, 고정시키는 효과를 둔 주춧돌

 

터키 시데의 아폴론신전

 

이탈리아 시라쿠사(수라구사) 아폴론신전 , 오르티자 구역       블로그 > geo의 작은 방

 

이탈리아 시라쿠사(수라구사) 아폴론신전 , 오르티자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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