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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성지순례/남유럽(스페인)

by baesungsoo 2013. 1. 1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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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1985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스페인 북서부의 유명한 순례 유적지로 이슬람교에 대한 스페인 그리스도교의 항전의 상징이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건물이 혼재해 있는 건축물의 寶庫이기도 하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대성당의 파사드가 건설된 뒤부터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  순례 열기가 식었다고는 하지만 중세에 사람들이 감탄했던,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그 매력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길고 험난한 순례길을 걸어서 일주하려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옛날에는 단지 죄의 사면 하나만 바라고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가 한결같이 목표로 한 최종 목적지는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시가 전체가 1985년에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대성당에는 에스파냐 수호성인 성야고보의 무덤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성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발견된 뒤, 아스투리아스 왕 알폰소 2세는 이 곳에 예배당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돌과 진흙으로 지은 예배당이 사도 성야고보에게 봉헌되었다. 이 허술한 건물은 872년에 알폰소 3세가 개축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1078년에 착공해 1128년 무렵에 완성했는데, 외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둥근 지붕은 15세기에 만든 것이며, 16세기에는 회랑이 완성되었다. 대성당이 세워진 뒤 그 둘레에는 차츰 집과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다. 갈리시아 지방은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습한 땅’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 지방의 문화와 종교 중심지였으며 거리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여인숙과 환전상이 늘어서 있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있는 산헤로니모 수도원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파사드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중세에는 가난한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건물이다. 한편, 부유한 학생들이 기숙사로 이용하던 곳은 폰세카 궁으로, 지금은 약대 건물로 쓰고 있다. 그 밖에도 대학 관계 기숙사로 수도원을 이용하기도 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서 그 다음으로 순례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크 양식의 왕립 병원이다. 이 왕립 병원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왕비인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가 기증한 것이다. 옛날에는 이 곳에서 순례자한테 뜨거운 스프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건물 일부를 호화로운 파라도르(국영호텔)로 쓰고 있는데, 지금도 순례자란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지난 순례자는 대성당 앞에 다다른다.  대성당에서 가장 장엄하고 화려한 부분은 기념비적인 추리게라 양식의 파사드이다. 이 파사드는 페르난도 데 카사스 이 노보아가 1750년에 완성한 것으로, 그 양옆을 똑같이 생긴 바로크 양식의 탑 2기가 받치고 있다. 대체로 이 파사드가 갈리시아 지방의 모든 건축과 종교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지방 특유의 가랑비가 이따금 멈추면, 이 파사드는 갑자기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선명한 색으로 빛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성야고보(산티아고)의 거리는 작은 도시이며, 규모가 중간쯤 되는데, 결코 크지는 않다.”  이것은 작센의 설교사 요한 테첼이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까지 기나긴 순례길을 지나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과 그 거리를 보게 되었을 때 쓴 글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이라 불리던 이 도시를, ‘모든 죄사함의 해’인 1993년에, 루터와 사이가 좋지 않던 테첼이 다시 찾았다면 너무나 변한 모습에 틀림없이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사도 야고보의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지칠대로 지친 순례자들 앞에 가혹하게도 몬테데라알레그리아 산(희열의 산)이 버티고 있다. 오늘날에는 많은 순례자를 위해 이 마지막 난관에도 임시 오두막집에 근대적인 설비를 갖추어 놓았고, 순례길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다. 1993년에는 ‘성야고보의 날’인 7월 25일이 일요일인데다 로마 교황에게 특권도 인정받았다. 그 덕택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또다시 ‘모든 죄사함의 해’를 축하하면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행사들을 기획해 ‘성야고보의 말’을 축하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은 클래식 음악팬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밥 딜런이나 에릭 크랩튼 같은 지난날의 록스타들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게다가 정부 고위 관료들도 ‘성야고보의 날’에 순례길을 따라 산티아고를 참배했으며,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에스파냐 수호성인에게 비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왜냐하면 ‘모든 죄사함의 해’에는 특별 면죄까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순례 계율에는 교통 수단에 관한 엄격한 규정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방문객 대부분이 쾌적한 관광버스로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11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가 해질녁의 저녁놀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있는 사도의 무덤 앞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도보 순례는 이미 지난날의 유산이 되고 말았다. 대성당에는 둥근 지붕에 쇠사슬로 달아맨 거대한 향로인 ‘보타후메이로’가 있다. 지금은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데, 여러 명의 사내가 이 향로를 끌고 익랑을 지나다닌다. 옛날에는 순례자들 상당수가 일단 대성당에 자리를 잡으면 대성당에서 그대로 숙박했던 데에서 이런 습관이 생겼다. 대성당에는 언제나 향을 피워 놓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향로를 움직여 환기를 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순례자가 목표로 하는 사도 성야고보의 유해는 주제단 아래에 있는 지하 제실에 안치되어 있다. 주제단에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야고보 상이 있고, 그 양옆에는 사도와 행동을 같이한 성아타나시우스와 성테오도시우스 상이 있다. 중세 후기에 이상하게도 사도 성야고보의 유해가 흩어져 없어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1879년 무렵에 수수께끼처럼 재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프랑스 툴루즈에 있는 생세르냉 대성당에도 성야고보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졌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것은 과연 진짜 사도 성야고보의 유해일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후에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그 진위를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자는 순식간에 ‘미친 개처럼’ 이상해질 것이라고, 1498년에 라인란트 출신의 기사 아놀드 폰 하프에게 은으로 된 성유물 상자를 지키는 사람이 경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tourbloger/Rv40/)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영광의 문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장인 마테오가 20년 이상 걸려 1188년에 완성한 ‘영광의 문’은 현관 복도에 있는 3짝의 문으로, 한가운데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창에 찔린 상처를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위대한 예술가는 시대의 양식을 초월하는데, 마테오 또한 당시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초월했다. ‘영광의 문’은 위엄 있는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영광을 얻는 장면을 그렸으며, 구 둘레를 12사도, 천사,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장식했다. 성야고보는 순례 지팡이를 들고 정문 입구 중앙 기둥에 앉아 있다. 완벽한 도상학에 따라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와 수많은 상징 인물들을 배치해 이 경이로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영광의 문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조개표지를 붙이고 배낭을 맨체 지팡이를 든 맨발의 순례자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조개표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anseounggolf/RZ37/)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파이프오르간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유리화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FbqL/7434)

 

라스플라테리아스 문

 

대성당 남쪽에 있는 ‘시계탑’ 근처에는 ‘라스플라테리아스 문(은세공인의 문)’이 있는데, 조각이나 돋을새김 장식이 풍부하게 새겨져 있다. 옛날에 문 둘레에 은세공인의 공방이 있었던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야고보의 생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3대 성지의 하나로 로마, 예루살렘과 견줄 수 있게 되자, 한때는 산티아고 순례가 열광적으로 성행하기도 했다. 9세기 초 수도사 페라요가 사도 성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 교황 칼릭스투스 2세가 집필했다는 옛 문서에 따르면, 어느날 밤 카를 대제의 꿈에 성야고보가 나타나 “사도의 무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군을 이끄는 카를 대제를 빛나는 하늘의 강이 까마득히 먼 갈리시아로 인도하리라. 그것은 바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도 성야고보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에 묻혔다는 설은 이런 전설에 근거한 것이다. 성야고보는 로마 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에서 포교하려고 애썼으나 성과가 없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명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몇 명의 신도들이 사도의 유해가 담긴 돌널을 해변까지 나르자, 천사가 양옆을 붙잡고 있는 배가 나타나 그 널을 실었다고 한다. 그 배는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까지 나아갔고, 로마 시대에 갈리시아 지방의 수도였던 이리아프라비아에 닿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동안에도 성야고보는 연어떼를 향해 설교했다고 한다. 성마르코가 베네치아에 부를 주고, 성안드레아가 비잔틴의 위엄을 상징하듯이, 성야고보는 당시 이슬람 세계와 접하고 있던 변경 지방 갈리시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당시 갈리시아는 레콩키스타의 열기가 고양되던 곳이기도 해서, 이 수호성인은 언제나 싸움터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크라비오 전투에서 사도 성야고보가 백마 탄 전사 모습으로 나타나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으며, 공격해오는 이슬람교도 앞을 막았다고 한다. 그러자 사기가 오른 그리스도교도 군대는 죽음도 아랑곳없이 “산티아고! 돌격! 에스파냐!”라고 외치며 적극적으로 돌격해 승리했다고 한다. 이런 고사 때문에 성야고보에게는 ‘마타모로스(무어인을 죽이는 자란 뜻)’라는 별명이 붙었고,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시청으로 쓰고 있는 라호이 궁전에 성야고보의 기마상이 놓이게 되었다

 

대성당 광장      출처 블로그 > 모방베드로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 세례대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

 

소성당 내부    출처 블로그 > 모방베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산티아고 방문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     블로그 > 인용引用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인구는 9만 188명(2001)이다. 12사도(使徒)의 한 사람인 성(聖)야곱(야고보 = James = 에스파냐어로 산티아고)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다. 9세기에 에스파냐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그리스도교를 포교한 사도 야곱의 유체(遺體)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별이 나타났다고 믿은 알폰소 2세에 의해 이 곳에 성당이 건설되었으며, 아울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시(市)가 형성되었다. 이후 예루살렘·로마에 이은 유럽 3대 순례지의 하나로서 번영했다. 갈리시아지방 중심도시의 하나로, 옥수수·포도 등을 집산하며, 은세공(銀細工)·칠기 공예·양조· 주조(鑄造)·섬유·가구 등의 수공업이 성하다. 12세기에 건설된 성(聖)야곱을 모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비롯하여 성(聖)프란체스코회(會)·성아우구스티누스회(會)수도원, 성당·교회·대학 등 중세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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