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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로스킬드 대성당 (로스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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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킬드 대성당(Roskilde Cathedral) -덴마크 

 

12-13세기경 벽돌로 만든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초의 고딕식 성당으로 북유럽의 건축양식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15세기 이후에는 덴마크 왕가의 능묘가 되었으며 유럽 종교 건축 발달의 가시적 단면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15세기 코펜하겐으로 수도를 옮긴 후 로스킬드는 한 지방도시가 되였으나

15세기 이후 4대에 걸쳐 마그렛트1세 여왕을 비롯 20명 국왕, 17명의 여왕의 영묘가 되어 덴마크 왕국의 상징적인 교회가 되었다

 

 

로스킬드 성당은 1170년경 바이킹시대 Harald Bluetooth 왕 시대 Absalom 감독에 의해 건설 된 벽돌로 지은 최초의 고딕식 교회이다. (사진출처- Photographs by Hanne Svensmark )

 

 

구리 지붕의 첨탑은 1636년 크리스티앙4세에 의해 추가로 설치 되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pjh5101/80036117071

 

 

 

 

 

 

성당 내부

 

벽돌과 화강암 돌로 지어졌으며 성당 바닥은 비문이 새겨져있는 비석들로 되어있다

 

입구 쪽에서 내려다본 신랑의 내부


오른쪽이 파이프오르간과 설교단이다. 내진의 금빛 찬란한 제단 장식벽은 플랑드르파의 예술가들이 1560년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제작한 것이다. 제단 장식벽 뒤에 마르그레테 1세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사암과 아라바스타, 대리석으로 지어진 설교단은 1610년쯤에 제작된 것이다. 파이프오르간은 1554년에 제작되었는데, 1654년에 다시 대형 오르간으로 교체되었다. 역대 왕족이 이 곳에 안장되고,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대성당 전체가 덴마크 왕실의 거대한 사당이 되었다.  이 사실은 로스킬레의 대성당에 대해 본래의 역할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덴마크인들은 모두 그것을 국가의 상징, 다시 말하면 국민의 마음을 이어 주는 건조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중앙 제단

 

1560년 플랑드르파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제작된 것이다. 제다벽 뒤에는 마르그레테1세의 석관이 있다. 

 

마가레트 여왕1세의 석관

 

크리스티앙3세의 영묘와 동상, 1539-1559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와으로 재임 하였다.

 

크리스티앙 4세의 영묘 예배실, 대성당 북쪽 중앙에 있다

http://blog.naver.com/unesco114?Redirect=Log&logNo=110006195241

 

대성당의 북쪽 중앙에는 크리스티안 4세의 사당인 예배실이 있다. 크리스티안 4세의 관을 사이에 두고 왼쪽 끝에 안나 카랄리나, 오른쪽에 후계자인 크리스티안 왕자의 관이 놓여 있다. 안쪽에 놋쇠로 장식된 동제 관은 오른쪽이 프리드리히 3세, 왼쪽이 소피 아말리아의 것이다

 

크리스티앙 4세의 영묘

 

크리스티앙 4세의 영묘

 

크리스티앙 5세의 영묘, 1699

 

 

 

 

 

로스킬드의 대성당


아침 햇살이 바다에 끼어 있는 연무를 관통할 때 로스킬레의 대성당 구리 지붕의 첨탑이나 둥근 지붕은 종종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한 면을 떼어 낸 것처럼 보인다. 옛날 덴마크의 수도 로스킬레는 15세기에 코펜하겐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후, 일개 지방 도시의 자리에 만족해 왔다. 그러나 여왕 마르그레테 1세를 비롯한 20명의 국왕과 17명의 여왕이 잠든 로스킬레의 대성당은 덴마크 왕국의 상징이자, 국민들의 마음을 이어 주는 소중한 건조물 중 하나이다


바이킹이 기초를 닦은 중세의 고도


셸란 섬의 북부에서 남쪽으로 깊게 들어간 만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로스킬레는 지형적으로 바이킹에게 유리한 장소였다. 고도 로스킬레의 기초를 닦은 것은 바이킹이라고 한다. 10세기에 덴마크 왕이 이 곳에 왕국을 건설한 이후 도시는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국왕과 함께 로스킬레로 이주해 온 수많은 성직자들은 도시에 큰 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로스킬레의 주교령이었던 코펜하겐이 1416년에 왕령이 되어, 1419년 그 곳에 왕의 궁성이 축조되고 발전하게 됨에 따라 로스킬레는 점차 쇠퇴해 갔다. 종교 개혁의 시대가되자 더욱 쇠퇴하게 되어, 주교좌까지 코펜하겐으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교구 성당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교구 성당과 수도원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1747년에는 제1회 국민 의회의 개최지가 되었다. 천도 후 로스킬레가 이처럼 각광을 받은 것은 드문 일이었다. 도시가 경제 부흥을 향해 완만한 걸음을 내딛은 것은 1847년에 코펜하겐으로 통하는 철도가 부설된 이후이다.


덴마크 왕실의 거대한 사당


로스킬드의 대성당에는 내진에 안치된 마르그레테 1세의 석관을 비롯해 15세기 이후 덴마크의 역대 국왕이 안장되어 왔다. 로스킬레의 대성당은 오랜 기간 동안 지켜져 온 사당으로서는 드문 경우인데, 이를 통해 사당을 수놓은 예술의 역사를 빠짐없이 설펴볼 수 있다. 로스킬레의 대성당은 1179년경 주교 압살론의 지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설 장소는 10세기 말에 목조 성당이 세워졌다가 11세기에 두 차례 트래버틴 구조로 재건된 성당의 유적지였다. 이렇게 완성된 대성당은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대성당이 되었다. 벽돌 구조로 된 로스킬레의 대성당의 중후함은 의심할 여지 없이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종적인 요소 덕분에 가벼운 느낌도 가미되었다. 또한, 주보랑을 동반한 플랜, 트리뷴, 3층 구조의 벽면, 3기의 탑 등을 볼 때 프랑스 초기 고딕 양식의 대건축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스킬레의 대성당 기본 구조는 이처럼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 전체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다. 대성당이 독특한 외관을 갖게 하는 것은 구리로 이은 지붕의 첨탑인데, 이는 1636년에 추가로 설치된 것이다. 신랑의 좌우로 늘어선,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진 예배실도 주목할 만하다. 왕족의 사당인 예배실의 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익랑의 증축 계획은 빠른 단계에서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예배실은 대성당의 플랜을 변칙적인 것이 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체가 하나하나 독자적인 건축 요소와 장식을 곁들이고 있다. 건물 내부는 삼랑식으로,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2쌍의 주열은 팔각형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한편, 아프시스의 벽면을 지탱하는 2층의 아케이드는 원주로 되어 있다. 아프시스 정면에 있는 3줄로 된 반원 아치의 높은 창은, 중앙 창의 높이가 양옆의 창에 비해 훨씬 높다. 이들 창문을 통해 바깥 햇살이 성당 내부로 비쳐 든다. 건물 내부에서는 중세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것으로는, 크리스티안 1세의 예배실에 늘어선 아름다운 조각상, 내진 성가대석의 의자 위쪽에 조각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릴리프, 내진 중앙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금빛 찬란한 제단 장식벽 등이 눈길을 끈다 (글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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