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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세르낭 성당 (Basilica of St. Sernin, Toulouse)

성지순례/서유럽(프랑스)

by baesungsoo 2014. 1. 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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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세르낭 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881957)

 

생 세르냉의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순례 교회로 스페인 북서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내부는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확장을 반영하듯 중세 문화에 대한 찬미 그 자체다. 외관에는 대부분 이 지방에서 생산하는 복숭앗빛 오렌지색 벽돌을, 구조물에는 석재를 사용했으며, 파고다와 유사한 높이 65미터의 팔각형 종탑이 딸린 십자형 건물이다. 길이 115미터, 높이 64미터, 너비 21미터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는 영성적 기품을 상기시키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거대하고, 고요하고, 그러면서도 간소한 내부에 놀라게 될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가 기증한 성유물은 셰베(chevet, 프랑스어로 '베개'라는 뜻)라 불리는 교회의 동쪽 끝의 성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셰베라는 이름은 성당의 십자형 설계와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에 제단이 위치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 성소는 교회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 아홉 개의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다섯 개는 앱스에, 네 개는 트랜셉트에 위치한다. 이 찬란한 예배당들은 종교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천사들, 사도들을 묘사한 일곱 개의 대형 부조 판이 걸린 앰뷸러토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네이브 주위의 통로는 순례객들로 하여금 가능한한 가까이에서 악령과 흑사병, 자연재해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성유물의 신비한 힘을 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생 세르냉 내부는 그 벽화와, 13세기 말에서 16세기 사이에 조각한 260개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머리 장식으로 유명하다. 교회 남쪽, 외부 통로 위로는 로마네스크 부조 조각이 서 있다. 백작의 문(Porte des Comte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부조에는 라자로와 부자가 등장한다. 반면 미주빌 문(Porte Miegeville)의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인물들은 사도들과 부활한 그리스도인데 마치 고대의 석관과 흡사하다.  가장 절정을 이루는 것은 꼭대기에 후추통같이 생긴 작은 포탑과 첨탑이 달린 벽돌로 된 아치가 있는 팔각형의 벽돌 종루이다. 회랑에는 베르나르 질뒤앵이 대리석으로 만든 11세기의 얕은 부조의 그리스도와 복음 전도자들의 상징이 있다. 1228년에서 1274년까지 살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묘지는 쟈코뱅 성당에 있었으나 1368년 그의 묘지는 생 세르낭 성당으로 옮겨졌다.

 

 생 세르낭 성당                    (출처- ttp://blog.naver.com/rhetorician/30009174054)

 

생 세르낭 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881957)

 

 생 세르낭 성당                    (출처- ttp://blog.naver.com/rhetorician/30009174054)

 

생 세르낭 성당  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881957)

 

생 세르낭 성당  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cdw5358/90174881957)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http://blog.naver.com/nkkh4254/50010992097)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3.7]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그는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을 양립시켰다.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신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을 확립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 출생. 성주(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會)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司祭)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명제집(命題集)》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12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1259년 이후 약 10년 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1268∼12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1274년 리옹 공의회(公議會)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그 종류는 그가 대학교수 및 수도회원으로서 행한 각종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선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1266∼1273)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1259∼1264) 등의 교과서적 ·체계적 저작을 꼽을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그가 교수로서 지도한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그리고 프로클로스, 가짜 디오니시오스, 보에티우스 등의 저작 주해 및 신학과 철학의 갖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한 소논집(小論集) 등이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고,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또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그는 《대이교도대전》의 권두에서 예지(叡智)의 탐구는 모든 인간의 영위(營爲) 중에서도 가장 완전 ·고귀 ·유익하여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찬미하였지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고른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 ·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相對的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 ·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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