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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우라천주당 (나가사키)

성지순례/필리핀,중국,아시아,일본 등

by baesungsoo 2007. 4. 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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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라 천주당           (출처- http://paxkorea.co.kr)


일본의 고딕양식 건축물 1호인 오우라 천주당은 평화공원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성당으로 숱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켜왔던 장소다. 오우라 천주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고딕식 건축물로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1865년에 세워졌다. 193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아쉽게도 원폭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1959년에 새로 지어졌다. 정식 명칭이 '일본 26성인 순교성당'으로 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에서 파견된 프티잔(Bernard thadee Petitjean)과 퓌레(Louis Theodore Furet)라는 두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때문에 정면은 니시자카(西坂) 언덕을 향하고 있다.  또한 이 성당은 나치에 의해 순교한 콜베 신부가 시무한 곳이기도 하다. 이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약 100년 전의 프랑스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되어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원폭에 의해 크게 파손되었으며, 현재는 당시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새로 복원된 것이 혼재해 있다. 일년 내내 관광객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 본당 옆에는 1875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옛 신학교가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일본 26성인 순교지는 나가사키 역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의 니시자카 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천주교 성지다.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주교도 추방령에 의해 일본인 신자 20명과 외국인 신자 6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이들 순교자는 성인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고, 성인이 된 지 100주년이 되는 1962년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기념관 벽면에는 26성인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이들이 순교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2월 5일에 추모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오우라천주당

 

입구   http://blog.naver.com/nanobot )  

 

성당 내부    (출처- http://blog.paran.com/theeast)

 

성당 내부 

 

성당 내부          (http://blog.naver.com/kcjlucky)

 

제대  

 

 성당 정원과 내부      (출처- http://paxkorea.co.kr)


중앙의 사진은 1864년 2월에 축성식을 봉헌하였는데, 3월에 세 여인이 프티잔신부를 찾아와서 여기 저희들도 신부님과 같은 신앙입니다 하며 은밀히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 뒤 우라까미등에 잠복해 있던 신자 약 1만명이 교회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비이다.

 

정원입구 (출처- http://blog.naver.com/redeye07)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정원, 저 뒤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과 교황 흉상이 보인다
 

구 라틴 신학교

 

지금은 여러가지 자료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이다. 천주교 탄압을 피하기 위해 만든 관음마리아상도 여기에 있다. 마리아상인데 얼굴은 관음상이다. 등뒤에 십자가를 숨기고 있어서 거울로 보여주고 있다. 

 

라틴 신학교 내부

 

신학교 내부 창문을 통해 본 본당 옆 건물 

 

신오우라성당         (출처- http://paxkorea.co.kr)

 

26 성인 순교자 기념비  (나가사키)  (http://blog.naver.com/joensuu )

 

158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 때 오사카와 교토에서 체포된 스페인 신부 6명과 일본인 신자 20명이 이 언덕에서 순교했다. 기독교 신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코와 귀가 잘린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뾰족한 창에 찔려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기념비를 자세히 보면 키가 작은 3명의 소년이 보이는데  처형 당시 그들의 나이는 14살, 13살, 12살에 불과했다.특히 오른쪽 맨끝의 12살 소년은 "내 십자가는 어디있죠"라고 말해 많은 이의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1862년 로마 교황에 의해 성인 명단에 올려졌고 1962년 100주년 되는 해에 이들을 기념하는 필리포교회와 26성인 순교 기념비가 세워졌다. 

 

히로시마 오우라천주당, 1945년 원폭 피해 그대로 남겨두었다

 

 나가이 박사 및 콜베 신부 유품전시기념관    (출처- http://paxkorea.co.kr) 

 

십자고상        (출처- http://blog.paran.com/theeast)       

 

나가이 박사 및 콜베 신부 유품전시기념관    (http://blog.naver.com/kcjlucky)

 

나가이 박사 및 콜베 신부 유품전시기념관  

 

나가이 박사 및 콜베 신부 유품전시기념관

 


나가이 박사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자기 몸은 오랫동안 방사선과 조교로, 의사로, 교수로 일하면서 너무 많은 방사선을 쬐였고, 게다가 원폭의 피해도 함께 입어서 백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폐허가 된 나가사키를 재건하고, 방사능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나가이 박사는 자신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백혈병이란 불치병을 갖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가족을 잃고 인생을 포기하려는 수많은 시민들, 불치병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며 삶에 의미를 갖게 해주는 일을 잘 감당해 왔다. 백혈병으로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계속 집필활동을 하며, 그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고아가 될 두 자녀를 위해 쓴 글이 있다. 핵폭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나가이 박사는 자신은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사람임을 발견했다. 바로 자기 곁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동행하면, 사막 한가운데서도 에덴 동산의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콜베 신부


라이문도 콜베는 1894년 1월 8일에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줄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브스카의 둘째 아들로 탄생한다. 1910년 16세에 라부프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하고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는다. 1912년에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공부를 시작하고, 1914년 11월 1일 세라피꿈(프라치스코회 국제신학대학)에서 종신서원을 한다.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비밀 결사단인 프리메이슨에 맞서 싸울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군대’를 생각하고 1917년 10월 16일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한다. 1918년 4월 28일 사제로 서품되고 그 다음 날에 기적의 메달 성모님이 유대인인 알퐁소 라티스본네에게 발현하신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로마)에서 첫미사를 봉헌한다. 신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19년에는 조국에서 성모기사회를 창설하지만 폐결핵으로 두 번 휴양기간을 가진다. 1922년에 최초로 「성모기사」가 창간되고 1927년 10월에는 바르샤바 근처에서 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한다. 니에포칼라누프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온전히 봉헌된 프란치스코회 공동체로 1939년에는 15채의 목조건물과 1채의 블록 건물로 성장하면서「성모기사」의 발행부수는 백만 부에 이른다. 더 놀라운 일은 700명이 넘는 수사들이 이루어내는 기도와 침묵의 삶이다. 기계들도 하느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곳, 모든 것이 전례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니에포칼라누프이다. 1930년, 니에포칼라누프가 발전하기 시작할 때 콜베 신부는 아시아 선교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나가사키에 도착한지 한 달 만에 일본어「성모기사」를 일만 부 발행하고 이어서 소신학교를 세우며 무젠자이노 소노를 이룬다. 1936년에 폴란드 관구는 콜베 신부에게 니에포칼라누프의 원장직을 다시 맡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1939년 9월 19일에 1차로 독일 나치 헌병에게 체포되고, 1941년 2월 17일에 2차로 체포되어 5월 28일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된다. 1941년 7월 말경에 아우슈비츠의 소장인 프리치는 14A 블록의 죄수 한 명이 탈출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아사 감방에서 죽을 10명을 뽑는데 콜베 신부는 그 중의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를 대신하여 죽기를 원한다. 13블록의 지하 아사 감방의 죄수 아홉 명은 착한 목자의 보살핌으로 평화롭게 하늘나라로 간다. 마지막에 남은 콜베 신부는 그들이 놓은 독약 주사를 맞고 8월 14일에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다음 날인 성모 승천 대축일에 화장된다. 1971년 10월 17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복자로 선포한다. 1982년 10월 10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한다. 콜베 신부가 생명을 구해준 가조브니체크는 시성식에서 마치 콜베 성인을 뵙듯이 교황님의 품에 안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이 돌아가신 아사 감방에서 ‘어려운 우리 세기의 수호자’께 사랑의 꽃을 봉헌한다. 

(출처- http://pax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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