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배마실 성지 (출처- http://blog.daum.net/sys1954/18349105)
경기도 용인시 일대에는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성지가 많다. 미리내 성지를 비롯하여 한덕골, 은이공소, 골배마실까지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가 이곳 용인시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옛날부터 신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김대건 신부의 집터가 있던 장소로 알려져 왔던 이곳은 1961년 양지 본당 5대 정원진 루가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글 출처 - http://www.paxkorea.co.kr)
골배마실 성지 (출처- http://blog.daum.net/sys1954/18349105)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가 살던 집터만이 골프장(양지 컨트리 클럽) 한쪽에 보존돼 그의 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씨의 모습을 새긴 부조(浮彫)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대건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골배마실은 양지 골프장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골배마실 성지를 들어가려면 먼저 은이 성지의 사무실에 들러 성지의 열쇠번호(88990)를 알고 가거나 골배마실 성지 입구에 표시되어 있는 은이 성지 전화번호로 연락하여 열쇠번호를 확인한다. 은이 성지와 골배마실 성지는 은이 성지에 상주하는 전담신부가 함께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성지 순례자들의 미사는 은이 성지에서만 봉헌한다. (글 출처 - http://www.paxkorea.co.kr)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야외 제대 (출처- http://blog.daum.net/sys1954/18349105)
골배마실 성지 (출처-http://blog.daum.net/hgi815515/324)
김대건 신부상 (출처-http://blog.daum.net/mikala999/31)
김대건 신부 생가 터 (출처-http://blog.daum.net/mikala999/31)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그는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택현, 부친 김제준,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김진후의 둘째 아들이자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아편 전쟁 때에는 마닐라로 피했다가 또다시 중국 땅 요동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한만(韓滿) 국경을 전전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 9년 만인 1845년이다. 그는 겨우 5개월을 머문 후 상해로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돼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글 출처 - http://www.pax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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