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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팔가자 성당 김대건 기념관 (장춘)

성지순례/필리핀,중국,아시아,일본 등

by baesungsoo 2007. 9. 2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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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팔가자 성당 (장춘 소팔가자 김대건성지 김대건기념관)   (출처- http://cafe.daum.net/Coreansanctus)


소팔가자는 1796년 천주교우촌이 형성되면서부터, 1838년에는 요동 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초대 교구장 베롤주교는 많은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짓고 포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형성되게 하였으므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장춘 소팔가자 성당은 김대건 신부님이 1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성당 제대와 연결이 되어있는 성당 뒤에는 성모동굴이 있고 맞은 편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있는 성당 뒷마당이다. 이 곳 중국에서는 김대건 신부님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최양업 신부님은 알지 못했다. 김대건 신부님은 성격이 활달하시어서 이 곳 소팔가자에 일 년을 조금 계셨는데 사람들과 많이 사귀시었다. 당시에 이 소팔가자 근처에 사는 장씨 가문과 깊이 사귀었고 이 처럼 사귀던 그 가문에서 계속 김대건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해져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양업 신부님은 거의 육 년을 계시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뒷편 마당에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께서 머물렀던 장소가 있다. 소팔가자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지만 90%가 카톨릭 신자라고 한다.

 

중국 소팔가자 성당 

 

김대건 신부 기념 동상


184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함대가 이권을 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에 입항하게 되자, 김대건은 2월 15일에 스승이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몸을 싣게 되었다. 이어 최양업도 7월 17일에는 만주 선교사인 브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 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이 때 프랑스 함대에서는 통역이 필요했고, 조선 신학생들과 매스트르 신부는 이 기회에 조선에 입국하는 길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8월 말에 양자강 하구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장 세실(Cecille)이 더 이상의 북상을 꺼려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10월 23일에는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이곳에서 체포될 위험을 가까스로 면한 그들 일행은 이웃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으로 가서 그곳 회장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후 최양업은 먼저 요동반도 북단의 개주 인근 '양관'(陽關) 교우촌을 거쳐 11월에는 길림성의 장춘(長春)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중에서 양관 교우촌을 그후 1843년 12월 31일에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개최된 곳이다. 한편 백가점에 남아있던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해 홀로 봉황성 책문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 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4)를 만난 뒤 12월 2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땅을 밟게 되었으나, 신분이 노출되자 곧 바로 백가점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런 다음 1843년 3월에는 다시 책문으로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가서 최양업과 합류하였다. '소팔가자' 교우촌은 본래 만주의 한 작은 교우촌일 뿐이었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르(Verolles, 方) 주교가 1841년에 이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고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매스트르 신부, 그리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곳 성당은 훗날 폐허가 되었다가 유명한 의화단 사건을 겪은 뒤인 1908년에 재건되었다. 페레올 주교 아래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던 김대건은 1844년 초에 북방 입국로를 탐색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2개월 동안 훈춘을 거쳐 조선 동북방 국경에 있는 경원까지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그런 다음 그해 12월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1월에는 책문에서 조선의 밀사를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김대건 부제가 서울에 잠입하여 매입한 집이 바로 '돌우물골'(石井洞)의 초가집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소공동에 있는 조선 호텔 옆으로, 기록에는 "돌우물골의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집"으로 나온다.5) 훗날 페레올 주교도 조선에 입국한 뒤 이 집을 주교관으로 삼아 거처하였다. 돌우물골에서 약 3개월을 지낸 그는 4월 30일에 마포를 떠나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8월 17일에는 그곳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약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현재 이곳 금가항과 횡당 성당에서는 정기적으로 김대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한국인 신자들도 자주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글- http://fr.catholic.or.kr/jhs/holyplace/martyr3.htm)

 

성당내부           (출처- http://cafe.daum.net/Coreansanctus)

 

성당 내 김대건 기념관           (출처- http://cafe.daum.net/drkhu)

 

장춘 소팔가자 김대건 성지 김대건기념관은 5층건물에 2500평의 현대식 건물로 소팔가자 김대건 성인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지도신부:최선웅야고보, 회장 김현욱돈보스코)가 1997.7-2005.4 추진한 사업의 일환으로 완성한 건물이다. 기념관은 중국 돈으로 2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2003년에 준공을 하였다. 김대건 기념관은 과거에 김대건 신부가 머무셨던 작은 방위에 세워졌다. 

 

2005.8 김대건 기념관 개관 기념으로 기념행사가 열렸다.

 

김대건 기념관내 김대건 박물관에서는 개관 기념으로 제1차 성령세미나를 개최(동북삼성 조선족 본당 공소회장단및 지도자 80여명 전원초청, 8월5일-8월9일까지 숙식 제공)하였고 김대건 성인 현양, 최양업신부 시복을 위한 제1회 국제심포지움을 개최 (2005.8.8)하였다.  

 

기념관 개관 미사        (출처- http://cafe.daum.net/drkhu)

 

기념관 개관 미사 

 

김대건 로


김대건 성지로 가는 길은 김현욱 회장의 모금활동으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고 모금으로 건립한 ‘김대건로’라는 도로명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있다.

 

김대건 로 삼덕성당 성지순례    (출처- http://cafe.daum.net/SD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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