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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린디스판 섬, 린디스판 복음서

성지순례/서유럽(영국)

by baesungsoo 2007. 9. 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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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디스판 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cc1989) 

 

패트릭과 켈틱 선교 운동

 

5세기 이후 영국과 유럽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과 운동은 웨일즈 지방 출신인 패트릭과 그가 일으킨 켈틱(Celtic)선교 운동이었다. 켈틱 선교 운동은 패트릭을 통해 아일랜드를 복음화시켰고, 콜럼바를 통해 스코틀랜드를 복음화시켰으며, 아이단을 통해 노덤브리아와 영국 전역을 복음화시켰다. 영국 동부에 위치한 노덤브리아(Northumbria) 왕국(앵글로 색슨족으로 구성된)에 처음 기독교가 소개된 것은 625년 에드윈(Edwin)왕이 영국 동남부 켄트(Kent)왕국의 공주 에델버가(Ethelberga)를 왕비로 맞아들인 때였다. 에델버가는 노덤브리아에 와서 그곳에 로마 기독교를 소개했다. 한편 에드윈 왕이 그 세력을 웨일즈(Wales)로 확장해 나가던 중 웨일즈의 왕 카드월론(Cadwallon)에 의해 크게 패했다. 카드월론 왕이 노덤브리아를 침공하니 왕국은 분열되고 왕자들은 서부 아길쉬어 지역의 달리아다 왕국으로 피신했다. 이때 왕자들(에안푸리드와 오스왈드)이 스콧트 족들과 함께 지내며 콜럼바 수도원의 감화를 받아 그 곳에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정세가 유리하게 되어 에안푸리드 왕자가 노덤브리아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고 다시 오스왈드(Oswald) 왕자가 그를 계승하여 즉위했는데 그는 곧 카드월론을 패배시켰다. 카드월론과의 전쟁 중 오스왈드 왕자는 꿈 속에서 콜럼바가 그에게 승리를 약속하는 것을 보았다. 오스왈드는 십자가를 세우고 기도한 후 나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왈드는 전쟁으로 침체된 노덤브리아의 기독교 신앙을 부흥시키기 위해 아이오나(Iona) 섬으로 사람을 보내어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오나에서 노덤브리아로 파송한 첫 선교사는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사람인 것 같다. 선교에 실패한 그는 아이오나로 돌아가서 “노덤브리아 사람들은 도무지 길 들일 수 없는 완고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하여 아이오나 수도원에 있던 아이단(Aidan)은 노덤브리아 선교의 실패는 그들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 자신의 잘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선교사는 모름지기 노덤브리아 사람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선교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오나 수도원은 아이단을 적임자로 인정하여 그를 노덤브리아의 감독으로 임명한 후 635년 노덤브리아로 파송했다. 오스왈드는 그를 환영하여 동해안의 조그만 섬 린디스판(Lindisfarne) 을 주어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 삼게 했다. 썰물 때는 걸어서도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던 해안 가까운 곳에 있는 섬이었다. 아이단은 린디스판과 노덤브리아 사이를 수없이 왕래하여 ‘걸어다니며’(peregrini) 노덤브리아 선교에 종사했다. 아이단이 소유했던 인자한 성품과 엄격한 신앙 생활의 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의 선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했으며 노예들을 구속해 주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종사했다. 그 결과, 노덤브리아 사람들이 길들일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함께 모여 아이단의 설교 듣기를 즐겼다. 한편 아이단의 선교가 크게 성과를 거두게 된 이면에는 오스왈드 왕의 협조가 있었다. 오스왈드 왕 자신이 때로 아이단의 스코트 말 설교를 앵글로색슨 말로 통역하기도 했다고 베다가 기록했다. 복음이 점점 노덤브리아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어 아이단은 아이오나와 아일랜드에까지 선교사 파송을 더 요청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아이단에게 협력하게 되었고 린디스판은 더욱 크게 발전하여 제 2의 아이오나로서 선교사 훈련과 파송의 과업을 수행해 나갔다. 아이단은 린디스판에서 엄격한 생활, 학문 연구 그리고 선교사 훈련에 종사하다가 651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린디스판은 노덤브리아 복음화뿐 아니라 영국 복음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에섹쓰(Essex)(영국 동남부 지역)는 본래 로마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았으나 참된 의미에서 에섹쓰의 복음화는 역시 린디스판의 피난(Finan)(아이단의 후계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머시아(Mercia)(영국 중부 지역)의 복음화 역시 린디스판에 의해 추진되었다. 서섹쓰(Sussex)(영국 남부 지역)의 이교적 색슨족들을 개종시킨 데 크게 공헌한 윌프리드(Wilfrid) 감독(634-709)은 노덤브리아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린디스판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라토렛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영국의 복음화는 주로 두 곳으로부터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로마요, 둘째는 아이오나에서 비롯했다. 아이오나에 의해서 노덤브리아의 개종이 완성되었고 에섹쓰가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부 영국이 복음의 감화를 입게 되었고 마지막 남았던 이교적인 앵글로색슨족(서쌕스와 위트섬에 거주하던)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두 기원 즉 로마와 아이오나 중 후자가 영국 복음화에 더 큰 공헌을 했다고 하겠다. 실로 로마 선교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었다고 가정할지라도 영국민의 개종은 아마 스콧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켈틱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Latourette, Thousand Years, p.72).  (글- http://cafe.naver.com/holyspiritgod , 김명혁 목사)

 

린디스판  성당

 

더럼의 대성당은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최고의 모범적 건물로서, 성커스버트와 존자 비드의 유해를 보존하고 있다. 잉글랜드 북동부 지방에서 가장 추앙받는 성커스버트는 685년에 린디스판의 주교가 되었고, 2년 뒤 팬 섬에서 죽어, 린디스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뒤에 데인족이 침략해 오자, 린디스판의 수사들은 나무관에 넣어둔 커스버트의 유해를 가지고 유랑길에 올랐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10세기 말에 위어 강으로 둘러싸인 더럼에 다다랐고, 커스버트의 유해를 화이트처치 성당에 안치했다.  (글- http://cafe.naver.com/eurostation)

 

린디스판 성당

 

<Liber Generationis>,린디스판 복음서에 수록된 <마태오의 복음> 첫번째 페이지(700경), 34ⅹ24.5cm

By courtesy of the British Museum, London   (출처- http://blog.daum.net/av119)

 

 

린디스판 복음서 (Lindisfarne Gospels)


7~8세기 아일랜드-색슨식으로 채색한 필사본(코턴 네로 D. 4 필사본,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로마인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브리튼에 전파했으나 앵글로색슨족이 침입하자 웨일스 지방으로 쫓겨났다. 597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에서 켄트로 선교단을 이끌고 오면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전파되기 시작했다.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공로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잉글랜드인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에 상륙한 지 1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잉글랜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첨단 중심지가 되었다. 캔터베리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으며, 거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을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했다. 신학이 가장 발달한 중심지는 노섬브리아였다. 이곳에서는 켈트의 영향과 그리스·로마의 영향이 함께 융화되었다. 이 시기에 배출된 유명한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비드(672경~735)는 노섬브리아 동쪽 해안의 재로 수도원에서 살았다. 고대 잉글랜드의 서사시 〈베오울프 Beowulf〉는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앵글로아일랜드 양식의 장식 글자 필사본이 발달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인데, 그 가장 뛰어난 보기는 린디스판 복음서들이다. 이 필사본은 698~721년 린디스판의 주교였던 에드프리스를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노섬브리아 학파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린디스판 복음서의 채식(彩飾)무늬에는 아일랜드 양식과 고전 양식 및 비잔틴 양식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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