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여사울 성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구)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2. 27. 17:11

본문

 

성지 입구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성지 전경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태어난 곳이고,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당시 여사울은 아래 지방(청양, 홍주, 홍산, 대홍, 보령 등)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너야 하는 통행로였다. 이 마을은 옛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 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 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이 되었다고 한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여사울 성지  

 

성지 안내문  

 

성지 안내문  

 

성지 안내문         (출처- http://blog.naver.com/acepd/150094718341)

 

생가터  

 

이존창 루도비코 생가터 

 

여사울  이존창 루도비코 생가터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야외제대와 성모상

 

야외제대 

 

성모상

 

십자가의 길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십자가의 길을 돌아 위로 올라가면 유적비와 예수성심상이 있다.

 

이존창 루도비코 유적비

 

이존창 루도비코 유적비

 

야외제대와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제대 조각

 

예수성심상과 십자고상 

 

새 성당 전 성지 사무실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2010.10.16 봉헌>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봉헌식이 2010년 10월 16일(토) 거행되었다. (cnfcj- http://cafe.daum.net/sansungri/dvH/142)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봉헌식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봉헌식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이하 출처- http://cafe.daum.net/DeColores332/f0Mk/1)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내부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내부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제대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제대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십자고상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내부 성모상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감실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독서대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내부 뒷면

 

여사울성지 이존창(루도비꼬) 기념성당 2층

 

<여사울 공소>

 

여사울 공소,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이며 주민의 80 % 이상이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여사울 공소         (출처- http://blog.daum.net/cheolmo/15859327)

 

여사울 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여사울 공소 후면

 

여사울 공소 측면

 

여사울 공소    (출처- http://cafe.daum.net/DeColores332/f0Mk/1)

 

여사울 공소  

 

여사울 공소 성모상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여사울 공소               

 

 

여사울 성지 약도 

 

 

순교자


◆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


이존창(李存昌)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진산 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주 소각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년)때 공주 감영에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취조관으로부터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운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진 고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멀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곧 후회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열심히 전교하였다.가족에게 환난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보좌하여 사목을 돕다가 다시 잡혀 결국1801년에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순교자 김광옥 안드레아 ( ? -1801년)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본래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로 인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웃들은 이때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이후 안드레아는 드러나게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매일 교우들과 한 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절마다 금식재를 지키고 갖가지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전의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 양과 같이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예산 현감은 김광옥 안드레아가 체포되어 오자 즉시 공범자들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용맹함을 드러냈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감은 안드레아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시켰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안드레아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안드레아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 동안의 형벌로 인해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튿날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또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 가량이었다.


◆ 순교자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년)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왔으나,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이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이후에도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