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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자산 성지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2. 2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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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자산 성지 전경 (우측 건물뒤 산속에서 정상으로 조성되어있다)

 

치명자산 성지 입구 

 

이 산은 옛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많이 불려지고 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돼 있는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등 7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용지면 남정리)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에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치명자산 성지 

 

선인들이 해발 300미터의 산정에 님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 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님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있다. 순교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 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 받는 한국의 몽마르뜨르(순교자 산)이다.

 

천주교 순교자 묘

 

성지 안내도

 

에수성심상

 

피에타 상, 좌측으로 오르면 십자가의 길과 정상 성당에 이르게되고, 우측으로는 성직자 묘역이다.

 

피에타 상

 

성지자 묘역

 

성직자 묘역 전경

 

성직자 묘역 전경           (출처- http://info.catholic.or.kr/)

 

묘역 십자고상 

 

묘역 야외제대와 십자고상 

 

십자고상 

 

초대교구장 김 스테파노 신부 묘

 

제3대 교구장 김발로도메오 주교의 묘

 

제5대 교구장의 묘

 

박 베네딕토 신부의 묘

 

묘역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광경

 

신부들의 묘와 묘비

 

묘비들

 

신부 묘비

 

제3대 교구장 김발로도메오 주교의 묘비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순교자묘와 성당을 향해 오른다

 

유요안, 이루갈다의 묘

 

유항검 일가족 7인 합동 묘역       

 

이분들은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 여에 걸쳐 전주 남문밖(현 전동성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 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 되었다.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306m) 자락에 있는 '치명자산'(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니,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이 지역이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계기로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5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다. 

 

유항검 일가족 7인 합동 묘역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유항검 일가족 7인 합동 묘역 

 

 유항검 일가족 7인 합동 묘역

 

유항검 일가족 7인 합동 묘역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 괴석과 십자가          (출처- http://info.catholic.or.kr/)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 괴석과 십자가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 괴석과 십자가 사진

 

성지 성당         

 

지방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이 있다.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순교자 서신

 

 순교자 서신

 

 순교자 서신  

 

 성당 내부

 

성당 내부 

 

내부 순교자 모자익

 

제대 

 

제대 

 

감실

 

독서대 

 

순교자 모자익 

 

 성모상 

 

 순교자

 

순교자 서신 

 

순교자 서신  

 

순교자 서신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순교자 유물관>

 

 

  

 

 

  

 

 

 

 

 

 

 

 

<성지 주차장 쪽 사제관>

 

 

사제관, 주차장 건너편에 위치  

 

몽마르트 기도공원, 사제관 아래, 주차장 옆에 있다.

 

몽마르뜨르는 불란서 파리 북동쪽에 있는 표고 130m의 작은 언덕으로 순교의 언덕(mons martyrum)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인 디오니시오가 이산에서 순교하여 「순교자의 산」이란 뜻으로 「몽 데 마르뜨르」 라고 불려 오다가 후에 「몽마르뜨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1870년 독일과의 교전으로 시련을 격게된 프랑스 국민들이 거국적으로 성금을 모아 건립(1910년)한 거대한 백악(白堊)의 아름다운 예수성심 대성당이 정산에 세워져 파리의 명소가 되었지만, 실은 유서깊은 천주교 순교성지요 파리를 지켜주는 축복인 언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명자산」또한 「전주의 몽마르뜨」라 부르는 것이다.  

 

몽마르트 광장

 

몽마르트 광장

 

몽마르트 광장 수도 위 라파엘호

 

<성지 주차장>

 

순교자 상

 

 순교자 유항검 동정 부부 상

 

 

옹기가마

 

야외 십자고상  

 

 십자고상

 

성지 지도와 약도  

 

치명자산 순교자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었다. 그는 권일신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일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 순교자 유문석 요한 (1784-1801년)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柳文碩)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문석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부친 유항검이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그의 형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 부부가 되기를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에서는 요한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문석 요한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이어 전주 관장은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이때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 순교자 유중성 마태오 ( ? -1802년)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과 그 가족들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항검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이어 전주 관장은 마태오와 그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마태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마태오가 사촌 형수 이순이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 순교자 유중철 요한 (1779-1801년)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柳重哲)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중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부친 유항검이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요한은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중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안에서 자기 누이(즉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 (1782-1802년)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루갈다의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그의 학문을 이어오고 있었다. 또 처남인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베드로)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루갈다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자신이 배운 교리를 어린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루갈다는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글도 배웠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루갈다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가면서 오로지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받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보존하고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 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 안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6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신부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 유중철이 머리에 떠올랐으며, 이에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다음해 9월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루갈다가 살던 초남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그들은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을 가장 먼저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하여 전주로 끌고 갔다. 이순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루갈다가 옥중에서 언니들에게 보낸 서한에 들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전주 관장은 루갈다와 그녀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순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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