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Ebla, Aieppo, Tall Mardῑkh (출처- http://lljy3414.blog.me/70087116495)
에블라는 시리아 서북부 알레포 남서쪽 53Km 지점에 위치했던 고대도시이다. 에블라 전성기(주전 2600 ~ 2240)동안 시리아 북부, 레바논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지역 일부를 지배하였으며 이집트, 이란, 수메르 등과 같이 멀리 떨어진 나라들과도 무역 및 외교 관계를 가졌다.이곳에서 현재 발굴되고 있는 토판문서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에블라 왕국의 기원은 아담의 14대손 에벨(Eber: 강을 건너온 자)이 살던 당시는 함의 자손 니므롯이 시날 땅(갈대아 우르 인근)에 바벨탑을 쌓고 있던 때이다(창 10:6-10, 11:2-9). 에벨은 경건한 자손으로서 우상숭배의 진원지가 되어버린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유브라데 강을 건넌 후, 약 1000km 가량을 이동하여 알레포 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나라, ‘에블라 왕국’이라는 큰 도시국가를 세웠다. 에블라 왕국이 있었던 알레포 지역에서 발굴된 토판의 일부를 판독한 결과, 에벨이 에블라 왕국을 세운 인물이자 초대 왕인 것과 에블라 왕국이 당시 그 일대를 정복했던 예술과 학문이 발달된 문명 도시 국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블라에는 왕궁뿐 아니라 몇 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었는데, 그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여느 국가처럼 에블라는 농업과 목축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농민과 목동의 생활은 왕궁의 관료가 관심을 기울이는 농업과 목축업 생산물의 관리에 관련된 경우에만 기록되었다. 기록을 검토해보면 왕국은 사실상 대다수 국민의 노동을 직접 통제했다. 인부의 작업을 지시하고, 노동자와 왕궁의 관리에게 물품과 식량을 배급하며, 가축의 거래 내역을 기록하고, 재고 물량에 관한 서류를 관리하며, 상거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고문서에 기록된 왕실의 주요 업무였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있던 당대의 다른 국가들에서 발견된 왕실 기록도 비슷한 양상이다.에블라는 터키의 오론테스 강 북부에서 동쪽으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초원까지 뻗어 있는 광활한 지대의 나라들과 관계를 가졌다.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사회들은 B.C. 2600년 이후 약 10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었는데, 그 사이 수많은 도시들이 명멸했다. 에블라와 밀접한 상업적, 외교적 관계를 맺었던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가의 마리(오늘날의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에 인접한)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배후지 중 북단에 위치한 키시(현재의 바그다드 인근)였다. 에블라의 고문서는 마리와의 영토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했다고 말해준다. 기록에 따르면 왕실은 값비싼 금속과 정교한 의상을 서로 주고받았으며, 숙련된 장인과 예능인(석수, 대장장이, 목수, 직공, 가수)를 교환했다. 에블라의 학생들은 마리와 키시의 필경(筆耕)학교에 다녔고, 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한 무역을 보장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또 외국 상인이 방문하면 선물을 주었다. 에블라의 문서 기록과 미술품을 살펴보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상당한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에블라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아니며, 에블라는 시종일관 시리아 사회의 전통적인 특징을 간직했다. B.C.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뒤흔들었던 아카드 왕조의 거친 바람을 에블라 왕국 역시 비켜갈 수 없었는데, 이들에 의해 에블라의 모든 것이 불태워지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수많은 점토판 문서가 그 불길에 의해 더욱 단단히 굳어지게 되었고, 반만 년이 지난 지금에도 형태가 유지되어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에벨'의 이름은 '건너다'라는 뜻을 가진 '아바르'에서 유래하여, '건너온 자, 건너편'이란 뜻이다. 에벨은 '히브리'와 그 어원이 동일하다. 이같은 사실은 히브리 민족이 에벨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히브리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에벨과 같은 신앙 노선을 따라 유브라데 강을 건너 죄악의 땅에서 분리하여 이주하였음을 반영한다. 에벨이 건너고 아브라함이 건넜던 강 ‘유브라데’는 ‘천국 곳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어가고 가라지는 유황불에 들어가듯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는 자에게 천국 곳간에 들어가는 축복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3:12에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13:40에서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마태복음 13:30에서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마지막 때 심판도 유브라데에 쏟아진다.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지며(계 9:13-15), 여섯 번째 대접 재앙 역시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진다(계 16:12).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책도 유브라데에 던져졌다(렘 51:61-64). 따라서 세상 마지막 때에도 유브라데를 건너 그 곳에 쏟아지는 마지막 환난에서 벗어나는 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글 출처 고고학 탐정들 폴 반 엮음, 성경보수 2호)
Ebla, Aieppo, Tall Mardῑkh. Tell Mardikh
시리아 Ebla, Aieppo, Tall Mardῑkh (출처- http://lljy3414.blog.me/70087116495)
시리아 Ebla, Aieppo, Tall Mardῑkh (출처- http://lljy3414.blog.me/70087116495)
시리아 Ebla 왕국 상상도 (출처- http://lljy3414.blog.me/70087116495)
시리아 Ebla, Aieppo, Tall Mardῑkh 점토판 (출처- http://lljy3414.blog.me/70087116495)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이 시리아의 텔 마르딕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한것은 1964년으로 발굴은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텔 마르딕 아래 중요한 도시가 숨어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 지역을 둘러싸는 높은 구릉은 고대 도시의 도시 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지역 주민이 중앙 부분에서 조각된 돌을 발견하였고 고고학자들은 그 발굴을 통해 큰 성전을 장식했을 돌 기초들을 발견했다.이때 발굴된 모든 건물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2000-1600 BCE)에 속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누구도 그 도시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1968년, 마침내 그도시의 이름이 밝혀졌다. 페르시아 시대(500-400 BCE)의 건축가들이 오래된 조각의 일부를 발견하고 그 돌은 자신의 건축에 사용하였다. 그 조각 위에는 천년 전에 그것의 제작을 지시한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왕은 그 조각을 사랑과 전쟁의 신인 이시타르(바벨론의 비너스)에게 봉헌하였었다. 왕의 이름 옆에서는 그의 타이틀은 "에블라의 왕"이 새겨져 있었다. 에블라는 바벨론의 강력한 두 왕 사르곤과 나람-신이 2300년과 2250년 사이에 정복했다고 주장한 고대 도시의 이름이었다. 학자들은 그 도시를 오랫동안 찾았으나 보통 텔 마르딕에서 북쪽으로 160km 지점을 유력한 후보지로 생각하였다. 물론 에블라의 왕이 텔 마리딕까지 여행하여 그곳에 조각을 세웠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조각 하나만으로는 텔 마르딕이 고대 에블라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75년 텔 마르딕이 고대 에블라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나왔다. 텔 마르딕의 성전 아래에서 수천점의 쐐기 문자 토판들이 발굴되어 그것이 고대도시 에블라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 토판들은 성전 뜰의 한 쪽에 있던 작은 방의 바닥에 쌓여 있었다. 이 토판들은 수 세대동안 번성해 불타 없어진 그 왕국의 궁전 문서였다. 궁전이 불탈 때 토판이 구워졌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성을 멸망시킨 군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르곤과 나람-신의 정복 기록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둘 중 하나가 에블라의 궁전을 멸망시켰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성을 멸망시킨뒤 급하게 떠나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유물들을 그대로 놓고 같다. 예를 들어 바벨론의 스타일을 따라 제작된 돌신상이라든지 금 세공품,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 조각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에블라 문서가 발견되었때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다른 유품들도 중요했지만 그 문서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매우 생생하게 증언해 주기 때문이다. 날짜, 이름, 그리고 인물들이 부서진 벽, 유품들에 생생함을 더해주었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쐐기 문자 토판은 기원전 2300년 전의 시대에 전쟁 발발 시 어떻게 에블라에서 주변 아군 도시들로 무기가 공급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 토판이 묘사하는 전쟁은 에블라와 마리와의 전쟁이었을 것으로 마띠에 교수는 추정한다. 당시 마리는 에블리의 정치적 상업적 라이벌이었다. 마띠에 교수에 따르며 에블라가 마리를 침공한 것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아카드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 전쟁 후 에블라는 아카드에 의해 멸망당한다. 앞서 말한 토판에는 에블라가 화살촉을 주변국에게 공급한 내용이 실려있다. 마띠에 교수는 이런 무기 수출이 아카드의 사르곤 왕으로 하여금 에블라에 대한 "선제 방어적" (preemptive) 공격을 감행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시리아 Ebla, Aieppo, Tall Mardῑkh 점토판 (출처- http://lljy3414.blog.me/70087116495)
에블라 점토판 발굴과 성경의 진실 (출처- http://blog.naver.com/kth710902)
현재까지 메소포타미아를 고대 히브리인의 문화적 발상지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잊혀진 시리아 제국의 잿더미에서 발굴된,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셈 어(語) 점토판들이 그보다 천년 전에 있었던 고대 세계를 하나하나 벗겨 주고 있다. 필시 에블라 족이 히브리인의 조상이라면, 당연히 에블라 문화는 히브리인의 모(母) 문화가 된다. 이것은 성경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끼칠 영향도 엄청날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1964년 로마 대학에서 근동 지역 고고학 교수로 있던 파울로 마티에가 일단의 고고학 팀과 함께 시리아에 도착하여 고고학적 전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역, 곧 시리아의 북서 지역의 언덕(텔)을 탐사하고 있었다. 이 텔은 폐허가 된 고대의 마을을 의미한다. 동료들은 그에게 이 북서 지역의 '초승달의 옥토'에 관심을 쏟도록 자극하였다. 반면 당시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지역은 흔히 고대의 궁벽했던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24세였던 마티에는 오늘날의 알레포시 남방 30마일 지점에 위치한 가장 큰 텔을 파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텔 마르딕(Tall Mardῑkh. Tell Mardikh)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시리아의 평지보다 50피트 정도로 위로 돌출되어 있는, 그 넓이가 140에이커나 되는 거대한 텔이었다. 이곳은 일찌기 4000년전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에 이르는, 아니 그 이상의 지역을 지배했던 전설적 대 제국 에블라의 수도였다. 이 젊은 이탈리아 고고학자는 이곳을 파내면서도 이곳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텔 마르딕은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발굴한 지 4년째 되는 해, 고고학자들은 에블라 시의 한 왕이 세운 비문을 발견하였다. 마침내 텔 마르딕은 고대 에블라였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에블라가 고대 역사가들에게 숨김 없이 드러났다. 가장 초기의 메소포타미야 제국을 이룬 아카드인들은 쐐기 문자 점토판의 입을 빌어 그들이 에블라라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수많은 타 지역들이 우연한 주목을 받고 있는 동안 에블라는 큰 마을 이상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탈리아인은 마침내 불굴의 정신과 인내력의 댓가를 받았다. 텔 마르딕을 10년 팠을 때, 마티에와 그의 팀은 도자기와 도구, 그리고 보석 장신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발굴하였다. 1974년,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42개의 쐐기 문자 점토판을 캐내었다. 같은 해 그들은 두 개의 방을 발굴했는데, 그 속에는 놀랍게도 16,000개의 점토판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왕실 문서 보관소였다. 이 점토판들을 완전히 조사하고 해득하고 조사하려면 족히 몇 십년은 걸릴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곧 번역에 착수하였다. 마티에 교수는 로마 대학의 언어 학자인 그의 동료 기오바니 페티나토를 불렀다. 그는 점토판에 난해하게 그려진 쐐기 문자들을 판독하기 시작하였다. 1세기 이전 것을 해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언어에 대한 지식은 꽤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페티나토는 곧 수메르어를 읽어 나갔다. 에블라는 수메르의 성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메르는 유프라테스 최 남단 500마일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페티나토는 약 20퍼센트의 달하는 점토판을 읽고 난 후 수메르어와는 전혀 다른 쐐기 문자를 발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 북서 지역의 셈어를 '고대 가나안어'라고 명명했다. 에블라의 서기들은 그들의 언어의 전달 매체로서 수메르에서 발달된 쐐기 문자 형식을 빌어 썼음이 틀림없다. 예를 들면 알파벳이 영어는 물론 불어와 독일어의 바탕이 되었듯이 말이다. 이 발견을 그토록 중요하게 한 것은 상실된 고대 언어의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고대성에 있다. 아탈리아 팀은 그들이 발견한 고고학적 지층과 점토판에서 얻어 낸 자료를 근거로 이 언어를 기원전 2400~2250년대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 성경의 최초 기록을 1000년 정도 앞서 잡았다. 더우기 그것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에블라에서 발견된 이름과 지명과 제도는 최초로 기록된 구약 성경의 몇 책들과 중요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티에와 페티나토는 시리아의 북부 지역 일대와 텔 마르딕의 나머지 부분을 탐사하고, 모든 자료들을 분석하려면 2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왕실 기록물들을 번역하여 분류하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경제와 행정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다. 에블라에서 출토된 점토판들은 식량 배급과 재고 명세서, 세금 명부, 곡물과 가축 문서들이었으며, 어떤 것은 에블라의 수출 특산물인 금속과 섬유류에 대한 국제 무역 명세서였다. 이러한 것들은 에블라의 상업과 정치 영역을 보여 준다. 그 영역은 놀랍게도 시나이와 남서부의 이집트 국경으로부터 동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의 티그리스강 상류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에블라 점토판 (출처- http://blog.daum.net/koowon/5670963)
점토판의 증언 학자들은 역사의 초기에 이와 같이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더우기 2년 전만 해도 이곳은 유목민들을 위한 초지라고만 단정했던 지역이 아닌가. 한 점토판에서는 당시 에블라의 인구가 260,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에블라 시는 크게 두 지역, 즉 윗 도시와 아랫 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윗 도시에는 정부 관리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아랫 도시에는 그 외의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사전에 관한 자료를 보면 수메리아어를 에블라어로 번역해 놓은 32개의 어휘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것들이 페티나토로 하여금 신속하게 번역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동일한 어원에 속해 있지 않은 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왕'은 수메리어로는 '엔(en)'이지만 에블라어로는 '말릭(melek)'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멜렉(melek)'과 매우 흡사하다. (에블라어는 히브리어를 파생시킨 가장 중요한 북부 셈어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말들은 동일한 어원에 속한다. 엄마는 수메리아어로 '아마-무(ama-mu)'이며 에블라어로는 '우-무-무(u-mu-mu)'이다. 성경의 첫 책들이 이같은 점토판보다 수 세기가 지나서야 기록되었기 때문에, 혹자는 이 언어가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그것이 기록될 당시보다 훨씬 이전의 사건들을 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에블라가 붕괴된 직후인 3, 4세기 경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가나안으로 이주했었다. 참으로 이 에블라 점토판들은 성경과의 있을 법한 또는 실제적인 연관물들을 수도 없이 제공해 준다. 그들의 신 가운데는 '일', 또는 '엘'이라고 불리운 신이 있었다. 물론 그 이름은 어떤 신에게도 붙일 수 있는 그들의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엘'은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부른 말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이스라(과 겨룬 자)' '엘(하나님)'을 뜻한다. 한편 '미카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를 뜻한다. 이와 똑같은 이름들, 즉 '이스-라-엘'과 '미카-엘'이 에블라 점토판에 나와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위한 가장 엄위한 말은 '야훼(Yahweh)'이다. 틀림없이 이 말의 어원에 해당되는 말이 에블라 점토판에 나와 있다. 에블라의 정복 군주 에브렘이 통치할 때 '야(Ya)'가 신의 이름으로서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가엘과 같은 이름이 그 때부터 '이스-라-웨'와 '미가-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야'라는 말은 고대 이스라엘 외에서 알려진 바가 없었다고 간주되어 왔었다. 또한 이 점토판에는 성경 외에는 전혀 발견치 못했던 에블라 시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담, 아브라함, 이스마엘, 에서, 사울, 그리고 다윗, 이외 앞서 언급했지만 이스라엘과 미가엘이라는 이름이 나와 있다. 물론 이들이 성경의 인물과 동일 인물은 결코 아니다. 동명이인이다. 에브럼(Ebrum) 왕의 이름을 살펴보자. 에블라어로는 그의 이름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로 읽힌다. 만일 에브-루-움(Eb-ru-um)이 옳다면, 이 이름은 창세기 10장과 11장에 나오는 히브리인의 조상이요 아브라함의 6대조가 되는 성경의 인물 에벨(Ebel)과 똑같은 이름이다. 만일 에브-리-움(Eb-ri-um)으로 읽혔다면 이 말은 '헤브류'(Heb-rew)로 번역이 된다. 더욱 더 우리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이 신화적이라고 주장해 온 성경의 지명들이 나와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에블라 점토판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기록되어 있다. 이 지명은 성경 외의 다른 것에서는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파멸되자, 롯은 소알(창세기 19장)이라는 도시로 피하였다. 그런데 소알 역시 점토판에 나와 있다. 또한 살렘(멜기세덱의 성), 라기스, 므깃도, 비블로스, 시돈, 악고, 하솔, 가사, 돌, 시내, 아스다롯, 그리고 욥바도 나와 있다. '우루 사리마'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과 같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발굴할 때 잘 알려지게 된 우르는 그 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 때 소수의 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이 북부의 어느 지역이라고 했었다. 고대에는 우르라는 도시가 둘이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왜냐하면 에블라의 한 점토판에 의하면 '초생달 형의 옥토'인 북부 지역, 즉 하란에 우르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갈 때 에블라 근처에 있는 하란에 머물렀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고향은 아마도 남부의 우르가 아니라 북동부의 우르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구약 성경과 유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에블라의 창조 기사를 보면 하늘과 땅과 태양과 달이 차례대로, 즉 말하자면 창세기와 비슷한 순서대로 창조되었다. 다른 점토판에는 폭풍의 신 엔린이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증언이 있다. 에블라의 발굴은 성경학자들에게 특히 연대학 분야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자료들을 틀림 없이 제공해 줄 것이다. 부조들은 물론 소돔과 고모라는 연대를 더 이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얼브라이트 협회 회장인 데이비드 노엘 프리드만 교수는 이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우리는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에 대하여 학자들이 기원전 1,000년 또는 2,000년으로 추산한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에 속한 것이다. 또한 부조들, 특히 아브라함은 같은 연대로 추정되어야 한다"(신계훈, 조대연, 고고학과 성서배경, 275-277 발췌함). <해석 번복 주장>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 팀이 그 문서의 연구를 맡게 되면서 이전의 주장들이 번복되기 시작하였다. 에블라 문서에 발견된다고 여겨졌던 가나안 도시들은 문서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에블라는 사해 지역의 도시들과 협정맺지 않았다. "야"로 끝나는 이름들은 신의 이름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긴이름의 �은 형태(피터를 핏이라고 부르거나 사무엘을 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였다. 에블라에는 야라고 불리는 신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에브리움이라는 인물은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왕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에베르와 같은 이름일 수 있지만 그 두 인물을 연결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 "히브리"라는 말과의 연상은 근거없다. 당초 히브리어에 가깝다고 알려진 에블라어도 실은 바빌론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에블라 시민들이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어와 같이 서-셈어에 속한 언어였다. 수천점의 토판은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오랜 세월이 걸려 그 내용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 토판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바벨론의 문자가 기원전 2300년 이전에 북부 시리아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이다. 에블라에서 발견된 후대의 유물이 오히려 성경과 보다 관련있다. 그곳에서 발견된 성전은 솔로문의 성전 양식과 유사하였다. 에블라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번성하였던 도시였다. 큰 발견이 때때로 근거없는 희망과 소문을 퍼뜨린다. 좀 시간이 지나야 냉정한 판단이 가능해지고 제대로된 평가가 가능해지는데 에블라는 그것에 대한 좋은 예를 제공한다. 첫번째 발굴 보고가 일으킨 먼지들이 가라앉은 후 에블라는 족장들의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리아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도시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에블라 토판은 초기 셈어에 대한 지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으며 히브리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켜 줄 것이다. (출처: Nelson's Ilustrated wonders and Discoveries) 에블라 점토판 에블라 여신, Royal Goddesses & Queens of Ebla (출처- http://blog.daum.net/koowon/5670963) 파올로 마띠에가 이끄는 발굴팀은 에블라에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두 점의 여신상을 발견했다. 이 여신상은 이미 쐐기문자 토판의 해독으로 알려진 "죽은 조상 숭배" 관습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에블라가 아카드의 사르곤 왕에 의해 함락될 때 정치적 상황을 재구성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별한 토판도 발견되었다. 발견된 두 조각은 여자의 모습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의 고대근동에서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그 중하나는 동석과 나무로 되어있으며 기도하는 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컵을 들고 금으로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다. 이 두 조각은 에블라의 여왕들이 죽은 후 여신이 되어 후손들에게 숭배된다는 에블라 쐐기 문서의 내용을 확인해주며, 그 조각들이 실제로 예배 의식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띠에 교수는 동석으로 된 조각이 생존한 여왕의 조각일 가능성을 일축하며, 여신이 된 죽은 여왕의 조각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http://www.archaeology.org/0801/trenches/goddesses.html) 에블라(Ebla, Tall Mardῑkh. Tell Mardikh) 유적지 설명도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Ebla, Aieppo, Tell Mardikh (이하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sipazigaltumu/3170488829/in/photostream/)
Ebla, Aieppo, Tell Mardikh (이하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sipazigaltumu/3170488829/in/photostream/)
Ebla, Aieppo, Tell Mardikh (이하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sipazigaltumu/3170488829/in/photostream/)
Ebla, Aieppo, Tell Mardikh (이하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sipazigaltumu/3170488829/in/photostream/)
에블라 유적 문서보관실 (이하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sipazigaltumu/3170488829/in/photost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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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라 유적 (출처- http://fi.wikipedia.org/wiki/Eb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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