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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순교자 기념 경당 (나주성당)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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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순교자 기념 경당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공주출신 이춘화(베드로, 33세), 1866년 병인년에 흥선 대원군에 의해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령이 내려진 시기의 막바지에 이른 해인 1871년 나주에 잡혀와 그 다음해인 1872년 피로써 신앙을 지킨 소위 나주 무학당의 세 순교자, 전북 용담 출신 강영원(바오로, 51세), 경상도 출신인 전북 무장 암틔 사람 유치성(안드레아, 48세), 그리고 전남 장성 삭벌리 사람 유문보(바오로, 60세)의 위대한 믿음과 삶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빈 무덤 형태의 경당이다. 입구를 이루는 거석은 60톤의 돌로 순교자들의 석침사(石針死)를 의미하며, 내부는 검은 돌로 장식 없이 벽을 이루고, 반쪽은 사방이 닫혀있으나 하늘만 뚫려있는 공간으로 그 당시 탈출구 없는 박해의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 바쳐 천주를 증거하던 숭고한 신앙을 보여준다. 

(글 참조- http://www.njcatholic.or.kr/ 홈피)  

 

무학당 순교 성지 기념경당             (이하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나주는 천년의 고도요 전남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발전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지금의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35년 5월 나주본당의 첫 본당신부로서 고 하롤드 현대주교님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실제 나주에 천주교 신앙의 씨가 뿌려진 역사는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병인대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병인박해의 와중인 1871년 나주에는 천주교 신자 세 분이 잡혀와 모진 고문 끝에 조선군 병영의 정문인 무학당(武學堂) 앞에서 1872년 순교하셨다는 사실과 그분들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 교회의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물인 <치명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참혹한 박해시기에 그 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이 곳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렬하게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수가 정확히 얼마인 지 내용은 알 길이 없고 오직 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을 뿐이다. 자랑스런 무학당의 세 순교자들의 이름은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안드레아)이다. 그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알려진 무학당 원래의 터였다고 전해지는 자리는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교정으로 추정하며 그 곳에는 무상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아무런 흔적이 없고 오직 무학당의 주춧돌 10개만이 일렬 종대로 남아있어 역사의 자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비록 단편적으로 전해진 세 분의 순교자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훌륭하여 오늘날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귀감이 된다. 그들은 참아 견디기 어려운 혹형 속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천주신앙의 당위성을 용감히 증언했으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온 몸으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된 혹독한 고문으로 땀과 피가 범벅이 된 지친 몸의 상태에서도 서로 형제애를 발휘하여 세락의 유혹을 극복하자고 격려해 주었으며 조석으로 신공을 통성으로 바친 기도의 삶을 사신 분들이었다. 모두가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박해를 잘 견디어 내며 옥살이 중에 모범을 보이고 심지어 사형집행일을 남기고 남에게 진 빚을 걱정하신 분들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순창묵상 사람 최성화(안드레아)와 장성수도 사람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기념경당

 

순교자 강영원 바오로(치명일기791번)


전북 용담인으로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하옥되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포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당시 함께 갇힌 유치성과 유문보에게 유감에 빠지지 말자고 격려하며 굳굳이 참아 견디었다. 마침내 나주 무학당 앞마당에서 영장의 지휘아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덧씌워 질식시키는 백지(白紙)사형을 받아 1872년 3월 9일에 치명하셨는데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순교자 유치성 안드레아(치명일기792번)


경상도 사람으로 부모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유치성(안드레아)은 전라북도 무장 암틔에서 포졸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갇히게 된다. '만 번을 죽어도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자 형리들은 발등을 불로지지고, 급기야 돌무더기에 묻혀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다 강영원과 함께 백지사형을 당해 치명하신다. (1872년 3월 9일, 48세)

 

순교자 유문보 바오로(치명일기793번)


병인박해 세 분 순교자 가운데 가장 먼저 돌아가신 유문보 순교자는 장성 삭벌리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오게 된다. 유문보는 혹독한 고문에 병까지 얻어 옥사하는데,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신 분이다.  (1871년 말경, 50세)

 

순교자 이춘화 베드로


나주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이른 기해 박해(1839년) 때 나주 읍내 옥에서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춘화에 대한 기록은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짤막하게 기록된 기사가 전부로 많은 아쉬움이 있다. 이춘화는 공주 태생으로 나주에 와서 산지 얼마 안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체포되어 천주 신앙을 지키다가 고문으로 읍내 옥에서 33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기해박해 때 청주 고산에서 순교한 박 발바라는 이춘화의 처제로 알려진 것으로 미루어 집안이 모두 신심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된다. 

 

광주대교구 나주 무학당 순교터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나주 무학당 순교터로 추정되는 나주 초등학교 정문 안쪽 화단 모습이다. 이곳에 나주 성당 무학당 순교자 현양회에서 세운 순교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나주 무학당(武學堂)은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로 조선군 병영의 정문이었다. 병인박해의 와중에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세 순교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 곳으로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고 단지 나주 초등학교 교정으로 무학당 터를 추정할 뿐이다. 광주대교구에서는 무학당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나주 성당을 중심으로 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나주 초등학교 정문 옆 화단에 이곳이 무학당 순교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광주대교구 나주 무학당 순교터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광주대교구 나주 무학당 순교터 나주 초등학교 정문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기념경당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기념경당

 

경당내부 봉헌함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경당내부 봉헌함 

 

경당내부 봉헌함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예수성심상과 십자가의 길

 

예수성심상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이하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십자가의 길 14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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