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모당 입구
대구 성모당 안내석
산상설교
산상설교 예수님
산상설교
대구성모당
1911년 대구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대구교구가 창설되면서 드망즈 주교님이 초대 교구장으로 오셨다. 교구로서 갖추어야 할 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로 조선대목구로부터 가난만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와 새 임지에 며칠을 지낸 드망즈 주교는 1911년 7월 2일 대구대목구를 성모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서원을 드렸다. 성모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께 서원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성모당 건립을 완성한 후 이의 완성과 그 과정에 대한 증거로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배경과 함께 성모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플로리아노 드망즈 아드라스의 명의 주교요, 대구의 감목은 하느님의 은총과 교황 성부의 은혜로, 여기 참석한 분들과 함께 새로 발족한 대구교구 7년의 지난날에 대한 깊은 감사와 앞으로 자녀로서의 신뢰를, 원죄없이 잉태되신 루르드의 성모께 바치며 이를 증거로 남기고자 합니다. 교황 비오 10세께서 이 교구를 설정하시어 우리는 이곳에 왔습니다. 새교구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우리였으나, 작은 집 하나도 지을 수 없이 가난한 형편이었습니다. 1911년 7월 2일 대구에 와서 처음 맞는 주일, 우리는 루르드의 성모를 이 교구의 주보로 모시고, 이 교구의 재정 관리자가 되어 주시기를 겸손되이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원을 하였습니다. 성모께서 교구기금을 사용하지 않고 주교관과 선교사들의 회합과 휴양을 위한 집과 신학교를 짓고, 주교좌 성당답게 루르드의 성모성당을 증축하게 해 주시면 주교관 대지가 될 땅에 루르드 성모동굴을 가장 닮은 성모동굴을 만들겠다고 허원하였습니다. 이 허원 내용을 세 통 마련하여 한 통은 루르드로 발송했고, 다른 한 통은 대구의 루르드 성모성당에 있는 성모상 밑에 두었다가 1918년 5월 20일 증축공사로 회수하였고, 또 한 통은 대구교구문고에 보관하였습니다. 이 허원은 1911년 7월 2일 공문으로 사제들에게 통보되었습니다. 천주의 성모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재정 관리인이 되어 주셨고, 세계 각처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허원의 소청 뿐만 아니라 전쟁 때문에 유지비마저 부족하던 교구의 기금을 쓰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첫째는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한 일이었고, 둘째는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한 일이었습니다.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6년 소세(Saucet) 신부가 중병으로 앓았고,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 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동굴 정지작업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좋으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첫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 달 안으로 주교좌 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습니다. 성모동굴은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가톨릭 청년회관, 그리고 대구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에 만들었습니다. 성모동굴의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따고 성모동굴의 크기는 물론 바위모양까지도 되도록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흡사하게 만들었으며, 외부는 벽돌로, 굴내부는 시멘트로, 기념틀의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으신 루르드의 성모 기념 동굴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성모상은 대구교구의 프랑스인과 한국인 사제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마련되었습니다. 1918년 10월 13일 성령강림 후 21주일 교구내의 사제단과 신학생들이 참석하고 대구와 각처의 남녀 신자들이 광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먼저 성모동굴과 성모상을 축성하였고, 성모동굴 제단에서 대미사,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한국인, 일본인, 신자들, 신학생들, 사제단이 차례로 기도드렸고, 루르드의 아베마리아를 먼저 라틴어, 한국어, 일본어 마지막에는 불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대미사 후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순례를 청하는 성모 동굴 순례에 대한 사목교서를 읽고 공포하였습니다. 이 사목교서는 각 본당 신부에게 배부하여 각각 본당에서 읽게 하고 이날 이후 처음 방문하는 공소마다 읽게 하였습니다." 성모당은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광장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큰 교구적 외부행사의 식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외교인들에게도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대구의 명소가 되어왔다. 또한 역대 교황사절의 내림 환영식과 교구적인 큰 경축에 기념행사의 식장은 의례껏 성모당이 되어 왔다. 1973년부터 5월이 되면 시내의 각 본당별로 성모의 밤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는 대구의 성모당을 더욱 유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모의 밤'이라는 새로운 기도형식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성모신심운동의 불을 붙여 놓았다 할 수 있다. 더욱이 1984년 5월 5일 선교 200주년의 대구 행사를 위하여 내한한 교황 바오로 2세께서는 직접 이 '루르드의 성모동굴'에서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성모께 기도를 바치고 대화를 나눈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이러한 성모당에서는 1997년 2월 18일부터 4월 16일까지 보수공사를 하여 새로이 단장을 하였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출처 : 대구대교구 홈페이지]
성모당 (출처- http://blog.daum.net/leesanggin/4016162)
성모당
성모당 (출처- http://blog.daum.net/leesanggin/4016162)
루르드 성모상 (출처- http://blog.daum.net/leesanggin/4016162)
윗면 글자 의미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윗면 글자 설명도
대구성모당
대구성모당
제대
대주교 상
제7대 대구교구 서정길 요한 대주교
제7대 대구교구 서정길 요한 대주교
대주교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상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상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상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상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 유시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 유시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 유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흉상과 기념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read.asp)
2011년 4월 8일 대구대교구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교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서상돈의 신앙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다.
대구성모당 광장
대구성모당 광장, 광장에는 많은 환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성모당 십자가의 길 14처>
<성직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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