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 ‘키부츠 라비’에서 모샤브 아르벨까지 15.7km>
셋째 날 : ‘키부츠 라비’에서 모샤브 아르벨까지 15.7km (모든 자료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키부츠 라비에서 모샤브 아르벨로 이어지는 코스는 지저스 트레일 중에서 가장 쾌적한 코스이다. 그리 높지 않는 능선과 계곡을 지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 첫째 날은 대부분 아랍 마을을 지나는 코스이고, 두 번째 날은 산을 넘어 밭길을 따라 걷는 길이라면 셋째 날은 하틴의 뿔 언덕을 넘어 계곡을 지나는 전망이 좋은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하틴의 뿔(Horns of Hattin)
하틴의 뿔은 황소의 뿔을 닮은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쌍둥이 사화산 봉우리이다. 티베리아에서 6km 떨어져 있는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전 여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을 제공해 주고 있다. 맑은 날에는 아르벨 절벽과 갈릴래아 호수 남단과 저 멀리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그리고 나자렛 서쪽 편을 볼 수 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1099년 고드 프레이에 의해 수복된 예루살렘은 십자군에 의하여 라틴왕국이 들어선다. 그러나 겨우 90년이 되지 않는 1187년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다시 무슬림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 비운의 전쟁터가 갈릴래아 서북쪽에 있는 ‘하틴의 뿔 언덕’이다. 하틴의 뿔 언덕에 서면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의 드넓은 평원과 요르단 강, 아르벨 절벽, 갈릴래아 호수와 골란고원 등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틴의 뿔 바로 아래쪽 평야지대에서는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의 살라딘(Saladin)과 십자군이 1187년 7월 결정적인 전투를 치룬 장소이다. 십자군은 아코에 1200명의 기사와 1만 명이 넘는 보병 그리고 다양한 용병들이 모였다. 살라딘은 십자군을 그들의 튼튼한 요새에서 유인해 내기 위해 귀족인 라이문도의 아내가 살고 있는 티베리아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십자군은 올가미에 걸려들었고 그들의 군대를 세포리 동쪽에 주둔시키게 된다. 라이문도(Raymond)와 귀(Guy)가 이끄는 십자군은 세포리를 출발하여 티베리아쪽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상수원이 있는 지금의 골라니 교차로 근처에 있는 투란(Tur’an)을 지나쳐 갔다. 십자군은 물이 있는 이곳에서 야영하지 않고 무리해서 늦게까지 티베리아를 향해서 행군해 나갔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살라딘은 티베리아를 점령한 후 두 개의 여단을 십자군 쪽으로 보내어 그들의 퇴로와 상수원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십자군은 고원지대에 야영하도록 몰렸고 물과 보급로 그리고 지원군이 차단된 채 살라딘 군대에 의해 포위 되었다. 1187년 7월 4일 아침, 십자군들은 야영지 주위로 타오르는 불에 의한 자욱한 연기에 눈이 가려 깨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십자군들은 살라딘에게 투항하거나 도망쳤다. 귀와 라이문도는 살라딘 앞으로 끌려갔고, 귀 왕은 살라딘이 주는 물을 받아 마셨지만 라이문도는 물을 거부하면서 말하기를 전쟁이 다른 식으로 전개 되었다면 살라딘의 목을 벨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살라딘은 가지고 있던 검으로 라이문도를 찌르고 목을 벤 후 그의 목을 다마스커스로 보냈다. 무슬림 군대는 이 결정적인 전투로 제2차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살라딘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된다. 살라딘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언덕위에 돔을 세웠지만 독일의 한 순례자의 증언에 의하면 1217년에 이미 폐허가 된 모습으로 전해진다. 1948년 이전에는 언덕 아래에 아랍 마을이 있었다. 1976년과 1981년에 발굴작업이 있었다.
예언자 슈에입 성지
하틴의 뿔 언덕 아래쪽에는 드루즈파의 예언자 슈에입(Shu’eib) 성지가 있다. 키부츠 라비에서 예언자 슈에입 성지까지는 6.1km이다.
예언자 슈에입 성지
드루즈(Druze)파
‘네비 슈에입’은 하틴의 뿔 언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드루즈파의 사원이다. 드루즈파는 ‘하킴’(Hakim, 996-1021 재위)을 성스러운 화신으로 믿고 있는 중동지역의 군소종파이다. 하킴은 996년 칼리프의 칭호를 받은 이슬람 시아파인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6대 통치자로 괴이하고 잔인한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뿐만 아니라 수니파 이슬람까지 박해를 하였다. 하킴의 통치에 고통을 받고 있던 이들이 봉기하자 정권은 몰락하게 되지만 그를 따르던 이들이 카이로를 탈출하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로 가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이 드루즈 교도들이다. 드루즈파 신앙은 시아파 내의 급진 세력인 이스마일파의 가르침에서 발전했는데 유대교,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들이 결합해 엄격한 일신교의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를 ‘유일신’이라는 의미를 가진 ‘무와히둔’(muwahhind)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절충적인 신앙 체계는 하킴을 구세주로 믿는 교의로 체계화 되었고 1017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킴은 밤중에 산책하다가 사라졌는데 이들은 하킴이 죽지 않고 사라졌으며 어느 날 성스러운 화신으로서 돌아와 황금시대를 개창할 것이라고 믿는다. 교단의 이름은 부하인 ‘다라지’(Darazi)에서 따 온 것이다. 이슬람의 시아파에서 갈라져나온 이단적 분파이지만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으며 소수 지도자들 간의 결속과 충성이 특징적이다. 1000년의 역사 속에서도 긴밀한 동질성과 독특한 신앙을 유지해 올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종교체계가 외부 세계는 물론 자신들 교도들 사이에서도 부분적으로 비밀을 유지하는 은폐적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종교에 관한 어떤 지식들은 신앙심 깊은 특정한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전수된다. 이렇게 드루즈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전통과 풍습을 철저히 베일에 가려 보존해 왔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하여 드루즈파의 종교와 관습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드루즈파는 이슬람과 같은 언어인 아랍어를 사용하고 코란을 읽으며 생활방식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다섯 번의 기도와 자선, 단식, 성지순례 등 예식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드루즈파는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믿기 때문에 타 종교로의 개종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종파로의 개종도 인정하지 않는다. 드루즈교로 태어난 사람만이 드루즈교 신도가 될 수 있으며 다른 종족과 결혼하지도 않는다. 또한 박해 상황에서 생명이 위태롭게 되면 겉으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 교리적으로 허용된 것도 오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드루즈파에서는 이슬람의 무함마드를 마지막 예언자로 보지 않으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을 중요한 예언자로 섬긴다. 그 중에서도 모세의 장인인 ‘이트로’(탈출 3,1)를 매우 중요한 예언자로 섬기고 있다. 드루즈파에서는 이트로가 정의와 공정 그리고 모세에게 일신교를 전해주었다고 믿는다. 하틴의 뿔 아래에 있는 ‘네비 슈에입’ 사원은 전승에 의하면 ‘이트로’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거대한 복합건물은 드루즈파의 회합을 위한 장소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4월 25일은 이들에게 특별한 순례일로서 함께 모이며 모든 사람들을 환대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무덤에 있는 비명에는 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행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장소는 11세기부터 거룩한 성지로 언급되고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1880년에 지어진 것들인데 최근 대대적인 재건축을 하였다. 인상 깊은 샹들리에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순례자가 가져온 것이 있다. 드루즈파는 시리아(40-50%)와 레바논(30-40%), 이스라엘(6-7%)과 요르단(1-2%)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드루즈파는 대부분이 갈릴래아 지역(81%), 하이파(19%)와 골란고원 지역에서 약 2만 정도가 살고 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드루즈파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전쟁에서 이스라엘 편에서 싸워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으로 받아들여졌고 오늘날 이들은 이스라엘 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리아 지역에서 살고 있던 드루즈파 사람들의 상황은 다르다. 196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1981년에 이스라엘 법에 따라 정식으로 합병되면서 이곳에 살던 드루즈인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젠가는 시리아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스라엘 군에 입대하지도, 투표에 참여하지도 않고 있다. 특별히 헤르몬산의 중턱에 있는 마을인 아랍어로 ‘태양의 탑’을 의미하는 ‘마그달 알-샴스’(Majdal al-Shams)에 살고 있는 이들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분단의 아픔이 살아 있는 독특한 드루즈 마을이다. 산악 마을인 이 마을은 시리아의 드루즈인들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6일 전쟁 때 시리아 쪽과 이스라엘 쪽으로 마을이 나뉘어 졌다. 이들은 장벽 너머에 있는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언덕에 올라 서로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고함의 언덕’이라고도 한다. 드루즈 사람들은 외모에서 구분을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하얀 터번을 쓰고 크고 부풀어 오른 오트만 시대의 바지를 입고 있다. 여자들은 하얀 천으로 머리를 가린다.
모스크
‘네비 슈에입’ 아래쪽에는 외롭게 홀로 서 있는 거의 쓰러져 가고 있는 모스크의 탑이 서 있어 오래전에 아랍 마을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전쟁이 있었던 1948년까지만 해도 400여 가구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이슬람 사원의 흔적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이슬람 사원 자락에는 지금도 시원하게 흘러 나오는 샘이 있어 풍요로웠던 마을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폐허가 된 하틴(hittin)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상속 재산으로 분배하면서 납탈리 지파에게 분배한 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 시대의 요새가 있었던 성읍 ‘치띰’(Zittim)일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3세기부터 ‘크파르 하팀(Kfar Hattim)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호 19,35 (납탈리 지파의 영토) 그리고 요새 성읍은 치띰, 체르, 함맛, 라캇, 킨네렛, 이곳은 이슬람 시대에는 탁월한 무슬림 지도자들을 배출한 고장이라고 무슬림 작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오트만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하틴은 와디 함만으로부터 흐르는 샘으로 물이 풍부하여 올리브나무와 무화과, 감귤류 등이 풍부한 매우 기름진 땅이라고 알려졌다. 그리고 이 마을은 네비 슈에입으로 오는 순례자들이 머무는 유명한 장소였다. ‘네비 슈에입’에서 전원 풍경이 어우러지는 계곡을 따라 2.8km 정도 내려가다가 폐허가 된 건물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급경사 길을 오르면 포장도로가 나온다. 아르벨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에 이르기 조금전 오른쪽에 옛 시나고그 유적지가 나오고 근처 아르벨 모샤브에 순례자 숙소가 있어 여장을 풀 수 있다. 네비 슈에입에서부터 아르벨까지는 약 9.6km이다.
아르벨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다시 절벽 옆으로 난 언덕을 오르면 큰 길이 나오고 농경지 안에 아담한 아르벨 모샤브에서 여정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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