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날: 모샤브 아르벨에서 참행복 선언 성당을 거쳐 카파르나움까지 18.8km>
마지막 여정은 모샤브 아르벨에서 탑가와 진복팔단을 거쳐 마지막 목적지인 카파르나움에 이르는 여정이다. 소개책자에서는 아르벨 산에서 빵의 기적 성당까지 과수원 길을 지나가는 코스로 안내하고 있는데 두 지점 사이에 있는 중요한 장소를 놓치는 것 같아 아쉽다. 과수원 길을 따라 걷게 되면 어느 정도 한적한 길을 걷는 이점은 있으나 마리아 막달레나의 유적지인 ‘미그달’과 예수님 시대의 고기잡이배를 복원해 놓은 키부츠 기노사르(Kibbutz Ginosar)를 놓치게 된다.
아르벨 산(Mt. Arbel) (모든 자료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가장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 아르벨 국립공원은 기원전 759년에 지진으로 갈라지면서 생긴 절벽이다. 아르벨 산은 1967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181m, 절벽은 지표면에서 380m 높이에 있다. 아르벨산은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도중 미그달 근처에서 왼쪽으로 바라보이는 깎아 지르는 높은 절벽이다. 절벽 위에 서면 갈릴래아 호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며 맑은 날에는 갈릴리 호수를 포함하여 티베리아, 사페드(Safed),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 해안에서 골란고원 쪽 그리고 헤르몬산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 특별히 마리아 막달레나(막달레나 마을의 마리아란 뜻)가 살았던 현재 발굴 중에 있는 ‘미그달’ 유적지가 지척에 내려다보이고 호수 해안선을 따라 저 멀리 진복팔단 산과 탑가 그리고 카파르나움 성지가 굽어보인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여정의 종착지인 예수님의 공생활의 주요 무대인 카파르나움이 한 눈에 펼쳐 보이는 전망대이다. 절벽에는 동굴요새가 있으며 인근모샤브 근처에는 4세기의 시나고가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아르벨 낭떠러지와 모샤브 사이에 있는 고대 아르벨 시나고가는 고대 아르벨 정착촌의 일부로서 4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고대 도시 아르벨에는 기원전 2세기부터 8세기까지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였으며 유대 현인인 니타이(Nitai)의 고향이었다. 하트모양의 이중 기둥의 기록에는 출입구와 예루살렘을 향한 계약의 궤와 토라 두루마리가 놓여 있던 벽감이 새겨져 있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유대인들이 정결례 예식에 사용하던 미크베 시설과 물 저장소 등 수많은 동굴들을 볼 수 있다.
아르벨 절벽의 동굴 집
이 동굴들에서는 16-17세기에 드루즈파 사람들이 왕궁처럼 사용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유대 전쟁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헤로데 대왕과 관련해서 극적인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문헌에 의하면 아르벨 절벽의 동굴 집들은 2차성전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요셉푸스는 아르벨산 절벽의 동굴 집에는 로마의 정복자들에게 대항하는 반란군들이 살았다고 한다. 헤로데는 동굴 안에 숨어 있는 하스모니안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커다란 바구니에 병사들을 담아 내려서 반란군들을 끌어내 떨어트려 죽였다. 그리고는 동굴들을 불태워버렸다.
4세기 회당
아르벨 낭떠러지와 모샤브 사이에 있는 고대 아르벨 시나고가는 고대 아르벨 정착촌의 일부로서 4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고대 도시 아르벨에는 기원전 2세기부터 8세기까지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였으며 유대 현인인 니타이(Nitai)의 고향이었다. 하트모양의 이중 기둥의 기록에는 출입구와 예루살렘을 향한 계약의 궤와 토라 두루마리가 놓여 있던 벽감이 새겨져 있다.
아르벨 계곡 아래에 있는 마을은 ‘비둘기들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베두인 마을 와디 하맘(Wadi Hamam)이다. 아르벨 국립공원은 여름에는 8am-5pm, 겨울에는 8am-4pm까지 개방한다.
아래 사진 중 왼쪽에 쭉 뻗어 있는 도로를 따라가면 '카파르나움'으로 이어진다.
발굴 작업중에 있는 '막달라' 유적지
티베리아 시내에서 90번 도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약 6km 가다보면 ‘미그달’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미그달에서 해안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왼쪽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이 나온다. 고고학 발굴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12번 언급되고 있는데(마태 27,56; 27,61; 28,1; 마르 15,40; 15,47; 16,1; 16,9; 루카 8,2; 24,10; 요한 19,25; 20,1; 20,18) 이것은 ‘막달라’ 마을 출신의 마리아란 뜻이다. 막달라는 그리스어 지명이며 히브리어로는 ‘미그달’(migdal)로 ‘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염색자의 탑에서 유래하는 도시로 호숫가에 있었기 때문에 염색업, 어업 그리고 특별히 생선을 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나서 소금에 절인 생선을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멀리 알렉산드리아, 로마에까지도 수출하였다고 한다. 유대 독립 전쟁 때 67년 티투스(Titus)에게 점령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의 여러 도시와 시골을 두루 다니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일곱 마귀’를 쫓아내준 치유를 받고(루카 8,1-3)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를 따르며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들었으며(마르 15,40-41),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수난 여정의 마지막에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임종과 장례를 지켜보았으며(마르 15,40-47) 안식일 다음날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은 여인이었다(마르 16,1-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첫 증인이요 증거자로 언급하고 있다. 요한 20:1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마르 16:9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는 예수께서 일찍이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사도들에게 알린 ‘사도들 중의 사도’로 초세기부터 공경되었다.
발굴 작업중에 있는 '막달라' 유적지
갈릴리 호수
기노사르 키부츠
아르벨 절벽에서 내려 온 후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 여정길을 ‘미그달’에서 벗어나 카파르나움 방향으로 90번 도로를 따라 파란색 트렉킹 길을 약 2km 걸으면 ‘기노사르’(Ginosar) 키부츠에 이른다. 기노사르 키부츠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서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갈릴래아 호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겐네사렛(Gennesaret)으로도 불러졌다(1마카 11,67; 마태 14,34; 마르 6,53; 루카 5,1). 루카 5,1-3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를 에워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대어둔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시몬의 배였는데 예수께서는 그 배에 올라 시몬에게 배를 땅에서 조금 떼어놓게 하신 다음 배에 앉아 군중을 가르치셨다. 기노사르 키부츠는 1937년 푸림절 전야에 젊은이들이 주축이된 사회주의 단체가 인근 미그달의 정착촌을 임대하면서 설립되었다. 이곳은 이갈 알론(Yigal Allo, 1818-80, 팔마군 사령관. 정치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기노사르 키부츠는 원래 농사를 짓는 키부츠였지만 ‘예수님의 배’(Jesus Boat)라고 불리는 ‘갈릴래아 호수의 배’가 발견되면서 지금은 관광수입이 주 수입원이 되었다. 기노사르 키부츠에 사는 모세(Moshe)와 유발 루판(Yuval Lufan) 형제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고기잡이를 하면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언젠가는 고대에 사용했던 배의 유물을 발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6년 심한 가뭄으로 호수의 수위가 한참 줄어들었을 때 물이 빠진 호숫가를 걷다가 드러난 배의 유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을 당국에 보고하였고, 탐사를 위하여 고고학자들이 파견되었다. 발굴 작업은 이스라엘 고대유물을 담당하는 기관과 기노사르 키부츠 사람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배 안에는 금이 가득 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밤낮으로 보초를 서야 했으며, 배를 파손하지 않고 진흙 속에서 물이 다시 차오르기 전에 발굴해 내는 작업은 12일이 걸리는 힘든 작업이었다. 발굴 작업을 하면서 유물이 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 위에 특별한 구조물을 만들었고, 진흙을 제거한 후 배는 폴리우레탄 거품으로 감싼 후 조립 시설로 옮겨졌다.
예수님의 배(갈릴래아 호수의 배)
발굴된 배는 기노사르 키부츠에 있는 이갈 알론 박물관(Yigal Allon)에 전시되기 전에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 7년간 화학용액 통에 담겨 있었다. 방사능 원소 측정에 의하면 배는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 후 70년경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기원전 50년에서 기원후 50년경 사이의 요리용 항아리나 등잔 등의 도자기류들과 배를 건조하면서 사용되었던 못이 배 안에서 발견되었다. 배는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기간에 지중해 지역에서 만든 배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배는 삼나무 널빤지를 서로 결합하는 식으로 만들어졌고 고기잡이를 하는 동안 물이 얕은 해안가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배의 아래쪽은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배는 4명이 각기 다른 노를 저을 수 있고 항해할 때 돛대를 달 수 있는 구조이다. 배의 크기는 8.2m 길이, 2.3m 폭 그리고 1.2m의 높이를 하고 있다. 배는 12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낡은 배를 반복적으로 수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기잡이와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배는 반복적으로 수리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한 세기가 넘는 동안 사용되다가 더 이상 수리하여 사용할 수 없는 때가 되자 사용할 수 있는 나무들을 떼어낸 후 배를 호수에 가라앉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배는 진흙 속에 묻혀 있던 덕분에 부식되지 않고 약 2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발굴된 배는 1세기에 호수를 가로지르고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배의 유형을 알게 해주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배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오로지 성경과 문헌에서 언급하는 것이 전부였고 고고학 발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에 의한 것으로 배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배가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증거는 없지만 갈릴래아 호수의 ‘배’는 복음서에서 50여 번 언급될 정도로 예수님의 생애와 공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 시대의 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하다. 갈릴래아 호수의 배는 기노사르 키부츠 안에 있는 이갈 알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토요일에서 목요일까지는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리고 금요일은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참행복 선언 성당과 빵의 기적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
팔복성당
빵의 기적 성당
빵의 기적 성당
빵의 기적 성당
빵의 기적 성당
베드로수위권 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카파르나움 베드로 성당
카파르나움 베드로 성당
카파르나움 베드로 성당
카파르나움 베드로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그리스 정교회 카파르나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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