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kāwir 라고 표시된 곳이 마케루스 요새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1.마다바 2.느보산 3.예수님 세례터 4. 마사다 요새
마케루스 유적지 입구
마케루스 유적지 입구
마케루스 유적지 입구
세례요한의 순교지 마케루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마케루스는 이스라엘의 고대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 ~ 76)'에 의해 건설된 별궁으로, 헤롯 대왕(BC 37~AD 4)에 의해 재건되어 그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반쪽 유대인(이두매아 출신) 출신으로 유대의 왕위에 오른 헤롯 대왕은 늘 신변의 위협을 걱정하였으며, 왕위찬탈자들의 음모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베들레헴의 헤로디움을 비롯해, 여러곳에 유사시에 피신할 수 있는 요새이자 별궁들을 건축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도 하는데, 그가 남긴 많은 건축물들이 이스라엘과 요르단 곳곳에 남아있어, 건축의 천재이자 광인으로 불렸던 그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으며, 마캐루스 요새가 위치한 요단강의 동편지역(베뢰아)과, 갈릴리 지역을 헤롯 안티파스(AD 4~39)가 차지하게 된다.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불륜적인 결혼행위로 인하여 요단강 동편에 속한 그의 영토에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하던, 세례 요한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그는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으로 인정할 수 없는 그의 배다른 형(헤롯 필립)의 아내(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함으로써, 죄에서 떠나 율법의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올것을 강론하던 세례 요한에게 비난을 받게 되고, 결국 세례 요한을 잡아다가 마캐루스 요새에서 약 2년 간 감금한 후, 어느 해 자신의 생일을 맞아 아름답고, 매혹적인 춤으로 하객을 사로 잡았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의 댓가로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세례요한의 머리를 베게 되는데, 이런한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곳이 바로 마케루스 요새 지역이다(마 14, 막 6, 눅3) 애석하게도 이 요새위에는 유적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제 1 차 유대인 반란(AD 66~73) 이후, 각지로 흩어졌던 반란군들이 로마에 의해 진압되고, 반란군의 은신처중 하나였던 마케루스 요새도 진압의 과정에서 초토화 됨에 따라, 지금은 헤롯의 왕궁을 장식했던 일부 복원된 돌기둥들과 건물의 기초들만이 남아있다.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로마군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하여 요새를 포위하고 비교적 낮은 동쪽에 있는 언덕으로 제방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로마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요새는 예상치 못하게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유대 독립군 중에는 출전할 때마다 로마군을 곤혹스럽게 하는 용맹함과 대담성을 보여준 엘르아살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전투가 종결된 어느 날 양측 모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 후 엘르아살은 혼자 요새 아래 성문 앞에 남아 성벽 위에 있던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로마 병사들이 급습하여 그를 체포해 버렸다. 로마군은 마케루스 요새에서 잘 보이는 곳에서 엘르아살을 발가벗겨 채찍질 하면서 심리전을 전개 하였는데 엘르아살을 곧 처형할 것처럼 하면서 요새에 남아 투항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므로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해 줄 것이라고 설득 하도록 했다. 결국 요새에 남아 있던 이들은 투항하게 되고 로마군은 약속대로 엘르아살과 함께 안전하게 떠나도록 했다. 오늘날에도 현지인들은 이곳을 아랍어로 ‘교수형 장소’를 의미하는 ‘엘-마쉬나카’(el-Mashnaka)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사건에서 유래된 이름인 것 같다. 로마군은 마케루스 요새를 접수 한 후 기원 후 72년에 파괴해 버렸고 그 이후로는 버려진 장소가 되었다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곳곳에 동굴들이 보인다.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정상의 돌담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요새의 도면 : 1.마케루스 동편 언덕에서 요새로 이어지는 수로 2.동쪽 망루 3.지하 저수조가 있는 기둥열 4.연회장-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5.헤로데 대왕이 지은 목욕시설 6.북쪽 망루와 아랫도시의 흔적들
1.안뜰 기둥열 2.연회장 3.안뜰 4.목욕시설 5.망루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1890년대에 폼페이에 있는 열주랑을 복원한 것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마케루스 요새에 있는 열주랑은 폼페이 정원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서 아마도 이와 같은 설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63)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63)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63)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요새는 1968년, 1973년 그리고 1978-1981년까지 고고학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1978-1981년에는 작은형제회의 예루살렘 성서대학에서 요새를 발굴하여 궁전 터와 요새의 흔적들을 확인 하였다. 요새화된 성곽 안에는 헤로디온 요새의 왕궁처럼 넓은 안뜰이 있고 정교한 목욕시설과 모자이크 바닥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발굴된 도자기류를 통해서 이곳 마케루스 요새는 하스모니아 왕조 때부터 로마시대에 이르는 흔적들을 확인 하였다. 동편 비탈진 언덕에서도 성벽과 망루가 발견 되었는데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랫마을’과 동일시된다. 동쪽 산비탈로 이어진 능선에는 요새 안에 있는 물 저장소로 끌어들인 수로가 발견되었다. 산 중턱에는 여러 개의 동굴들이 파져 있는데 동쪽 산 계곡으로부터 수로가 연결된 것으로 보아 충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파 놓은 물 저장소로 보여진다. 여기에 있는 동굴들 중의 하나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 갇혀 있었던 감옥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수세기가 지난 후 은수자들의 수행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지하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헤롯 여름궁전 유적지
마케루스 요새의 남쪽 계곡과 사해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63)
마케루스 요새의 남쪽 계곡과 사해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63)
마케루스 요새의 동쪽 능선쪽에서 요새 중턱으로 끌어들인 수로의 모습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63)
헤로데는 수많은 물 저장소를 만들어 우기에 비를 모아 항상 충분한 물을 비축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수많은 화살과 투석 장비들을 비축하여 장기간의 포위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세례요한이 2년동안 갇혀 있던 곳으로 알려진 동굴감옥(중앙)
세례요한이 2년동안 갇혀 있던 곳으로 알려진 동굴감옥 입구
세례요한이 2년동안 갇혀 있던 곳으로 알려진 동굴감옥 내부 계단
SOLARIO Andrea, Salome with the Head of St John the Baptist,1506-07, Oil on panel, 57x47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하자(마태 14,4; 마르 6,17-18) 이에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기회를 노리다가 헤로데의 생일날 춤을 춰 헤로데에게 기쁨을 선사한 딸의 도움을 받아 세례자 요한을 참수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율법에 어긋난 혼인 관계를 꾸짖자 헤로디아의 원한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죽게 된다.(마르 6,17-29; 마태 14,3-12 참조)
마르 6,17-29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는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세례자 요한이 죽은 것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대중적인 인기를 이용해서 정치적인 선동을 할까봐 염려해 세례자 요한을 체포하여 마케루스 성으로 데려가 서기 27년경 처형 했다고 전한다. 헤로데는 이복동생인 헤로데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하여 나바테아 왕국 아레타스 4세(BC9-AD40)의 딸을 소박했다. 이에 나바테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던 아레타스 4세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여 참패를 안겨 주었는데 백성들은 이것을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처형시킨데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겼다고 한다. (글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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