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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몬((No-amon), 룩소(Luxor), 테베(Thebes), Valley of the Kings

성지순례/이집트

by baesungsoo 2014. 4. 1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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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노아몬(No-amon)                (출처- http://yskimeng.blog.me/30188757395)

 

상(남부), 하(북부) 이집트

 

 노(No)는 노아몬(No-Amun), 테베(Thebes), 룩소(Luxor) 등 으로 부른다. 노(No)는 테베(Thebes)의 히브리 명칭이다. 노아몬은 ‘큰 도시’란 뜻으로 누에라고 불리다가 신왕국 때에는 와세트라고 불렸다. 헬라인들은 이 도시를 ‘신의 대도시’란 뜻으로 디오스플라스 마그나라고 불렀다가 테베로 불렀고, 아랍이 정복한 이후 룩소라고 불렀다. 앗수르의 에살핫돈(B.C. 670) 및 그 아들 아슈르바니팔(B.C. 663)의 맹공격을 받아 부귀와 명예를 빼앗겼다. 예레미야, 에스겔의 시대에도 노아몬은 존속했으나, B.C. 525년 바사(페르샤)의 캄뷰세스(고레스 2세의 아들)에 의해 다시 멸망되고,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에 완전히 멸망되었다. 룩소는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상류(남쪽)로 약 730km 떨어진 지점의 강변에 있다. 룩소는 카이로에서 기차로 약 11시간, 비행기로는 한 시간 이내에 이를 수 있다. 룩소(Luxor)는 남부(상 이집트)의 강 동편에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로서 아랍어로 ‘궁전’을 의미하는 ‘알-욱수르(el-Uqsur)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리스시대 이후 테베(Thebes)로 불리웠던 도시의 행정적 지명이다. 테베는 헬라식 이름으로 ‘아문의 도시(City of Amun)’를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신’ 아문(Amun/Amon)은 원래 헤르모폴리스에서 형성된 네 쌍의 신들의 계보인 팔신계(ogdoad) 중의 하나로 제 5왕조 때부터 등장하였다. 그 뒤 아문은 이집트 남부의 중심 도시 테베의 미미한 수호신 역할을 하다가 중왕국 제 11왕조 MentuhotepⅡ(c.2100 B.C.)가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이곳에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자 새로운 왕조의 최고신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힉소스의 침입으로 이방민족의 통치시대를 겪었으나, 주전 1550년경 강력한 제 18왕조가 수립되어 힉소스로부터 이집트를 해방시키자 테베는 신왕국의 수도로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와 함께 아문은 막강한 정치 세력에 힘입어 룩소에 거대한 규모의 신전들이 건립되면서 국가신으로 그 위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테베는 콥토스(Coptos), 헤르모폴리스와 동맹을 맺고 북쪽의 헤라클레오폴리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아문은 테베의 몬투와 콥토스의 민(Min)의 혼합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아문은 라(Ra/Re)와 결합하여 아문-라(Amun-Ra)로 불리우면서 상 이집트 테베의 신이 하 이집트의 태양숭배 전통을 이어받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제 18-19왕조 당시 전성기를 누릴 때, 테베의 인구는 백만에 이르렀다. 호머의 일리아드(Illiad)에서는 그것을 “100개의 문을 가진 도시”로 묘사하였다. 테베의 패권은 이단적인 Akhenaton(Amenhotep IV)이 수도를 북쪽(Amarna)으로 옮기고 아문숭배를 금지하였던 잠깐 동안의 아마르나 시대(Amarna Period)를 제외하고는 500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람세스 시대가 끝나 수도가 멤피스로 옮겨지고, 그후 다시 델타로 옮겨진 후에도 테베는 상이집트에서 제 1의 도시로 남았고, 제 25왕조(c.747-645)의 누비아의 통치자들 밑에서도 왕좌를 누렸다. 오늘날 룩소는 이곳의 모든 유적들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나일강 동편과 서편 지역에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먼저 강 동편에는 룩소신전과 카르낙신전,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룩소 박물관 등이 있다. 나일 강변 오른쪽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은 웅장하고 장엄하다. 어마어마한 134개 열주의 숲이 하늘을 찌르듯이 버티고 있어 이집트에서도 규모가 제일 큰 신전이다. 강 서편은 The Theban Necropolis로 왕들의 골짜기와 왕비들의 골짜기 그리고 ‘데이르 엘 메디나’에는 신전들과 무덤들을 건설했던 장인들의 골짜기가 있다. 룩소의 고대유물들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외국의 관심을 모았다. 그 유물들은 19세기 동안에 점차적으로 발굴되어 방문객들을 끌어 들였다.

 

룩소르                     (출처- http://blog.daum.net/manjaro1/34)

 

룩소르                     (출처- http://www.cyworld.com/travelsr/6387296)

 

룩소르 박물관                    (출처- http://www.cyworld.com/travelsr/6387296)

 

미라 박물관은 이집트 룩소르(Luxor)에 있는 미라 전문 박물관이다. 1997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은 룩소르 사원 북쪽의 나일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워진 옛 관광안내 센터를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2035㎡의 면적에 전시관, 강의실, 비디오 룸, 카페 등을 갖추고 있다.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전 이집트 대통령 재임 때 관광객에게 고대 미라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물 전시실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하나는 오르막 회랑으로 궁전의 필사자였던 아누비스(Anubis)와 후네퍼(Hunefer)가 쓴 파피루스 문서(런던 대영 박물관 소장)로부터 만든 10개의 평판을 볼 수 있다. 이 평판의 대부분은 죽음에서 무덤까지 장례 장면을 보여준다. 박물관의 두 번째 부분은 회랑의 끝에서 시작된다. 방문객들은 19개의 전시 상자에 담긴 60여 개의 유물을 볼 수 있다. 이 유물들은 고대 이집트 신, 방부처리물질, 유기물질, 방부액, 미라 도구, 내장을 담던 카노푸스 단지, 부적 등 11개의 주제로 모아진다. 이 가운데에는 미라 처리된 고양이, 물고기, 악어 등이 포함돼 있다.

 

<룩소르신전>

 

룩소르 신전                   (출처- http://cafe.daum.net/krcos/nwSk/271)

 

룩소르 신전은 카르낙신전에 살고 있는 아몬신이 오페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는 축제의 장소였다. 고대 테베 시절 오페트 축제는 매년 증수기인 제2월에 11일 동안 열렸다. 이 축제 때 아몬신과 그의 처 밤의 여신 무트, 그리고 그의 아들인 콘수 신은 카르낙 대신전으로부터 룩소르 신전을 방문했다. 이 기간이 바로 일반 백성들이 신전 깊숙이 살고 있는 아몬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카르낙 대신전 안에 머물던 아몬신과 가족들의 신상은 왕궁악단의 연주 속에 사제들에 의하여 나일강 위에 대기하고 있던 파라오의 배로 옮겨지는 것으로 축제가 시작된다.  파라오가 배에 오르면 성스러운 배는 출항하여 나일강을 남하 룩소르신전 쪽으로 향한다. 강변에서는 축제를 구경하려는 군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지금은 룩소르 시에 거주하는 시민의 수가 10만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테베시절 당시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파라오와 아몬신 일가가 탄 배가 룩소르에 도착하면 성스러운 신상들은 신관들에 의해 룩소르 신전으로 옮겨진다. 아몬신상들이 신전 안에서 왕과 사제들의 제의를 받는 동안 밖에서는 민중들이 노래와 춤으로 밤을 지새운다. 축제가 끝나는 11일 후에 파라오는 아몬신을 모시러 룩소르 신전에 다시 온다. 파라오의 배는 아몬신을 모시고 카르낙신전으로 향한다. 이때는 파라오가 성장한 군대를 이끌고 강변을 행군하며 아몬신의 배를 호위한다. 아몬신을 카르낙신전에 다시 안치하는 것으로 11일 동안 계속된 오페트 축제는 막을 내리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시절의 룩소르에서는 많은 제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오페트 축제도 그 제전들 중의 하나로서 이 룩소르신전이 제전을 치르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 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 2007.2. 다마스커스가는길

 

룩소르 신전                 (출처- http://cafe.daum.net/krcos/nwSk/27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동안 지어진, 가장 큰 신을 위한 신전이다. BC2000- BC330년 1700년 동안 이집트 주신 아몬-라 신을 위하여 당시 모든 파라오는 이 신전에 정성을 다 하였다. 신전의 입구에는 람세스2세가 만든 양머리 ( 아툼)의 스핑크스 42개 상이 있다. 예전에는 스핑크스상이 카르낙 대신전까지 2열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룩소의  첫 탑문을 마주서면 람세스의 좌상이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함께 있다. 원래는 이곳에는 람세스의 입상과 좌상이 모두 6개가 있었지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고작 2개이다. 람세스 동상과 더불어 탑문을 지키는 오벨리스크 역시 2개였지만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였던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무하마드 알리 왕이 1883년 프랑스의 필립 루이 황제에게 오벨리스크 하나를 선물해 지금 현재는 프랑스 파리의 중심지인 콩코드 광장에 하나가 서 있다.  BC370년 경 만들어진 제 1 탑문(넥타네보1세 건립), 탑문의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오픈 코트, 이동식 스핑크스, 신전을 건축 할 때 사용한 흑 벽돌 더미, 람세스3세 오시리스 신전, 제 2탑문 안쪽의 134개의 열주기둥 홀( 세티1세 + 람세스2세 건축 함), 투트모스 1세 그리고 합셉수트 여왕 의 29.50m 의 오벨리스크,알렉산더 이복 동생인 필립이 만든 지성소, 투트모스3세의 쥬빌리 홀, 신성한 호수, 스카라비 상 등이 있고, 신전 안에 아몬-라신의 부인인 MUT 여신의 신전과 달(MOON)의 신 콘슈의 신전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아몬 무트 콘슈는 룩소의 홀리 페밀리(holy family)라 부른다. 카르낙 신전의 걸작은 134개의 열주 홀( 하이포스타일 홀)이 압권이다. 24m 파피루스가 핀 모양의 본 기둥 12개와 19m높이의 파피루스가 피지않는 모습의 기둥 122개 기둥이 빽빽하게 서 있다. 각 기둥에는 람세스2세가 아몬 민 & 아몬 라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조각이 되어있고, 각 기둥에는 화려한 채색이 남아있다. 카르낙 신전은 거대한 면적에 세워져 있는 신전인데 1.8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에 너비도 800미터에 이를 정도인데다 10개가 넘는 신전이 안에 있다. 특히 이 신전이 유명한 이유는 람세스 2세뿐만 아니라 중왕국 시대와 신왕국 시대의 역대 파라오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존에 세워진 신전에 다시 다른 신전을 이어 붙이는 식의 건축을 진행한 까닭에 규모 자체도 커지고 신전 안의 구조도 대단히 복잡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런 카르낙 대신전 역시 시작은 스핑크스 거리로부터. 하지만 이곳의 스핑크스는 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제 1탑문을 지나면 이 지방 최고의 신이었던 아문 신을 위한 아문 대신전이 나온다. 좌우로는 아문의 아내와 아들이었던 무트 여신과 콘수 신을 위한 사당이 나오고 그 다음은 최대 23미터부터 15미터에 이르는 높이에 지름이 3미터에 이르는 기둥들이 134개나 늘어 선 대열주실이 있다.  이어 람세스 3세의 거상이 나타나고, 람세스 3세 신전(제 20왕조), 대 히포스타일 홀(제 19왕조), 투스모스 3세의 주빌레 신전(축제의 홀)등이 계속해서 웅장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투토몬스 3세 신전은 탑문과 신전이 있다, 투토몬스 3세의 어머니이자 이집트가 손꼽는 3대 여걸 파라오 중의 하나였던 하트세프수트 여왕이 지었다는 오벨리스크 등이 나오고 신전의 최고 핵심인 지성소가 나온다. 그 뒤로는 넓게 자리를 잡고 있는 중앙 코트. 그리고 이곳을 하트세프수트와 그의 아들이 빙 둘러 세운 벽이 나온다. 이 벽 한쪽에는 하트세프수트 여왕의 치세에 대한 내용이 다른 한편에는 그의 아들이었던 투트몬스 3세가 남긴 글이 있다.

 

람세스2세              (출처- cafe.daum.net/lovedang/HHjx/2491

 

둘째 마당(아멘호테프3세 광장)              (출처- cafe.daum.net/lovedang/HHjx/2491)   

 

기독교의 흔적들                 (출처- cafe.daum.net/lovedang/HHjx/2491

 

예수와 12사도들의 모습이 색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전을 복구하면서 기독교의 벽화가 지워지니 그 속에서 고대 이집트의 부조가 나온 모습이 보인다. 

 

<카르낙 신전>

 

카르낙 신전             (출처- http://blog.daum.net/duna2002/8498396)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동안 지어진, 가장 큰 신을 위한 신전이다. BC2000- BC330년 1700년 동안 이집트 주신 아몬-라 신을 위하여 당시 모든 파라오는 이 신전에 정성을 다 하였다. 신전의 입구에는 람세스2세가 만든 양머리 ( 아툼)의 스핑크스 42개 상이 있다. 예전에는 스핑크스상이 카르낙 대신전까지 2열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룩소의  첫 탑문을 마주서면 람세스의 좌상이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함께 있다. 원래는 이곳에는 람세스의 입상과 좌상이 모두 6개가 있었지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고작 2개이다. 람세스 동상과 더불어 탑문을 지키는 오벨리스크 역시 2개였지만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였던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무하마드 알리 왕이 1883년 프랑스의 필립 루이 황제에게 오벨리스크 하나를 선물해 지금 현재는 프랑스 파리의 중심지인 콩코드 광장에 하나가 서 있다.  BC370년 경 만들어진 제 1 탑문(넥타네보1세 건립), 탑문의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오픈 코트, 이동식 스핑크스, 신전을 건축 할 때 사용한 흑 벽돌 더미, 람세스3세 오시리스 신전, 제 2탑문 안쪽의 134개의 열주기둥 홀( 세티1세 + 람세스2세 건축 함), 투트모스 1세 그리고 합셉수트 여왕 의 29.50m 의 오벨리스크,알렉산더 이복 동생인 필립이 만든 지성소, 투트모스3세의 쥬빌리 홀, 신성한 호수, 스카라비 상 등이 있고, 신전 안에 아몬-라신의 부인인 MUT 여신의 신전과 달(MOON)의 신 콘슈의 신전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아몬 무트 콘슈는 룩소의 홀리 페밀리(holy family)라 부른다. 카르낙 신전의 걸작은 134개의 열주 홀( 하이포스타일 홀)이 압권이다. 24m 파피루스가 핀 모양의 본 기둥 12개와 19m높이의 파피루스가 피지않는 모습의 기둥 122개 기둥이 빽빽하게 서 있다. 각 기둥에는 람세스2세가 아몬 민 & 아몬 라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조각이 되어있고, 각 기둥에는 화려한 채색이 남아있다. 카르낙 신전은 거대한 면적에 세워져 있는 신전인데 1.8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에 너비도 800미터에 이를 정도인데다 10개가 넘는 신전이 안에 있다. 특히 이 신전이 유명한 이유는 람세스 2세뿐만 아니라 중왕국 시대와 신왕국 시대의 역대 파라오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존에 세워진 신전에 다시 다른 신전을 이어 붙이는 식의 건축을 진행한 까닭에 규모 자체도 커지고 신전 안의 구조도 대단히 복잡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런 카르낙 대신전 역시 시작은 스핑크스 거리로부터. 하지만 이곳의 스핑크스는 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제 1탑문을 지나면 이 지방 최고의 신이었던 아문 신을 위한 아문 대신전이 나온다. 좌우로는 아문의 아내와 아들이었던 무트 여신과 콘수 신을 위한 사당이 나오고 그 다음은 최대 23미터부터 15미터에 이르는 높이에 지름이 3미터에 이르는 기둥들이 134개나 늘어 선 대열주실이 있다.  이어 람세스 3세의 거상이 나타나고, 람세스 3세 신전(제 20왕조), 대 히포스타일 홀(제 19왕조), 투스모스 3세의 주빌레 신전(축제의 홀)등이 계속해서 웅장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투토몬스 3세 신전은 탑문과 신전이 있다, 투토몬스 3세의 어머니이자 이집트가 손꼽는 3대 여걸 파라오 중의 하나였던 하트세프수트 여왕이 지었다는 오벨리스크 등이 나오고 신전의 최고 핵심인 지성소가 나온다. 그 뒤로는 넓게 자리를 잡고 있는 중앙 코트. 그리고 이곳을 하트세프수트와 그의 아들이 빙 둘러 세운 벽이 나온다. 이 벽 한쪽에는 하트세프수트 여왕의 치세에 대한 내용이 다른 한편에는 그의 아들이었던 투트몬스 3세가 남긴 글이 있다

 

카르낙 신전              (출처- cafe.daum.net/lovedang/HHjx/2488)

 

카르낙 신전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카르나크 신전 입구에는 제1탑문 과 제2탑문이 있는데, 제1탑문(정문) 앞에는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스핑크스들이 도열한 스핑크스 대로가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룩소르 신전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제1 탑문을 지나면 22왕조 때 건축된, 넓이가 약 8,650㎡에 달하는 대광장이 나올 것이다. 대광장 북쪽에는 아몬 신, 무트 신, 콘스 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 두었던 세티 2세의 신전이 있고, 남쪽에는 람세스 3세의 신전이 있다. 대광장을 지나면 제2 탑문 앞에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람세스 2세의 석상이 있다. 제2탑문은 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헵이 건축을 시작하여 19왕조 람세스 2세 때 완성되었다. 제2 탑문을 지나면 열주전이 나오는데 그 넓이는 5,356㎡로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은 아멘 호텝 3세가 건축하였으며,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세티 1세가 건축하기 시작하고, 람세스 2세가 완공하였다.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천장에 건축하였다. 고대에는 기둥에 채색한 흔적이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아 있다. 134개의 열주는 높이 23m와 15m 두 종류로 되어다. 대열주실을 지나면 투트모세1세와 핫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각각 오른쪽에서 보인다. 맨 끝에 있는 신전은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이다. 제3탑문은 아멘호텝 3세 때 건축되었으며, 제4탑문은 투트모세 1세 때 건축된 것을 세티 2세가 복원한 것이다.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광장에는 투트모스 1세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제4탑문 안쪽에는 핫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보이며, 투트모세 1세와 3세가 건설한 제5탑문과 제6탑문을 지나면 태양신 아몬의 지성소에 도달한다. 지성소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방되어 일출과 일몰 때 햇살이 아몬 신의 지성소를 비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성소는 2중 구조다. 외실은 투트모세 3세가 건축한 것이며 내실은 주전 3년경 프톨레미 왕조가 건설하였다. 지성소 남쪽에는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가 있다. 성스러운 호수 입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이 보인다. 호수 입구 쪽에 핫셉수트 여왕의 누워있는 오벨리스크도 있다. 이 신전에는 람세스 2세가 세운 건물에 아스글론 벽이 있는데 이 벽에는 람세스 2세가 아스글론 성읍을 공격하고 아스글론 백성들이 맏아들을 성벽 너머로 던지면서 저항하고 있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람세스 2세 때 터키의 힛타이트 제국과 맺어진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 기록되어 있다. 꼭 이곳을 성지라고 생각하여 순례할 계획이라면 맨 안쪽에 초대 교회 시절에 신전이 교회로 바뀌어서 예배드렸던 흔적이 보일 것이다. 지금은 퇴색되어 희미하지만 성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초대 교인들은 사막 너머 이곳에 숨어서 예배드렸던 당시를 상기함으로써 오늘의 나를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카르낙 신전                (출처- http://blog.daum.net/gratuliere/13370113)

 

20개씩 나열된 양 머리 스핑크스. 대부분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카르낙 신전은 테베의 지역 신이었던 아몬신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몬신은 종종 양머리를 가진  신으로 묘사 되는 신이다

 

카르낙 신전 오벨리스크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대열주홀을 지나면 2개의 오벨리스크를 볼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많은 신을 믿고 섬겨 왔다. 그 중에서도 이들이 가장 굳게 믿고 숭배한 신은 태양신 라(Ra)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기원전 3000년 경부터 그리스어로 ‘작은 쇠꼬챙이’라는 의미를 가진 오벨리스크를 태양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섬겼다. 오벨리스크의 기원은 헬리오폴리스(태양의 도시)의 제12왕조 세누세르트 1세가 세운 벤벤석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은 태양광선처럼 길쭉한 오벨리스크 형태의 뾰족한 돌 벤벤석에 태양신이 구현했다고 믿었다. 이때부터 이집트 사람들은 라를 섬기기 위해 사각형 단면에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로 마무리된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의 사면에는 라에 대한 찬가와 당시 왕을 칭송하는 내용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새겨졌다. 당시에 거대한 첨탑을 세우기 위해 동원한 노동력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이다.

 

<왕들의 계곡>

 

왕들의 골짜기 안내도

 

왕들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 상 이집트(남부)의 나일강 서편에 위치해 있다. 기제에 피라밋이 건설된 지 약 1000년 뒤인 주전 1600년경에 테베에서 일어난 신왕국시대의 제 18왕조 이후 주전 1200년의 제 20왕조 시대까지 만들어진 여러 왕들의 왕능들이 여기에 있다.  이 무덤들은 입구를 거의 알아볼 수 없어서 무덤의 존재를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지하 통로와 매장실로 이루어진 암굴 무덤이다. 그 이유는 내세에서 부활할 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 미이라가 도굴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된다. 지금까지 왕들의 골짜기에서는 투탕카문 왕의 묘를 비롯하여 62기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제 18왕조 제 3대 투트모세 1세의 것이다. 한편 관람이 가능한 묘들은 한정되어 있다.

왕비의 골짜기(The Valley of the Queens)는 네크로폴리스의 서쪽 끝에 위치하며, 왕들의 골짜기에서 직선거리로 1500m 떨어져 있다. ‘왕비의 골짜기’란 이름은 잘못 붙여졌다. 제 19왕조 동안 왕비가 처음으로 이곳에 매장되기 전에, 이미 귀족들이나 왕족의 아이들이 이곳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Place of Beauty'라 이름 지어졌지만 지금은 아랍어로 Biban el-Harem(Gates of the Harem)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계곡에는 거의 80여 무덤이 있는데, 대부분 묘비명이 새겨져 있지 않거나 미완성 상태이다. 정교한 벽화들은 예술성에 있어서 왕들의 계곡에 있는 벽화들과 필적하지만, 많은 것들이 소금부착물로 인해 부식되고 파괴되었다.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져 있는네페르타르타, Nefertari, 람세스 2세의 부인)의 무덤은 1987년 10월 이후 보수 공사를 위해 폐쇄되었으나 지금은 완전 소복구되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100£E). 람세스 2세의 왕자인 카마셋(Kha-Em-Wasetefe아몬 헤르 코페셰프(Amon-her-Khopeshef)의 묘와 제 20왕조 시대의 왕비로 여겨지는 티티의 묘 등만 개방되어있다.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uck9/130188740500)

 

Valley of the Kings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Tutankhamen_map_Valle_Re_Nilo_space)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daum.net/ghyeon/287)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ingongju13/70172840877)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ingongju13/70172840877)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ingongju13/70172840877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ingongju13/70172840877)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ingongju13/70172840877)

 

왕들의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mingongju13/70172840877)

 

투탕카멘 황금 가면 

 

Tutankhamun     (사진출처-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EGYPT/KINGS)

 

투탕카멘 미이라,  투탕카멘,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사망”


고대 이집트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은 기형의 발 때문에 걸을 때 지팡이를 짚어야 했고, 다리 골절과 말라리아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AFP와 AP 통신이 2010.02.16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집트와 이탈리아, 독일 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은 최근 투탕카멘 미라에 대한 유전자 검사와 컴퓨터 단층촬영(CT) 등을 동원한 2년 동안의 조사를통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기원전 1333년부터 1324년까지 9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투탕카멘은 19세에 요절한 파라오로,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1922년 11월 나일 강 서쪽 '왕가의 계곡'에서 황금 마스크를 쓴 그의 미라와 수많은 부장품이 보존된 그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유명해졌다. 투탕카멘의 사인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그간 이륜 전차에서 떨어지거나 말에 차이는 사고로 숨졌다는 설과 독살설 등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돼 왔다. 연구팀은 이번에 유전자 검사를 통해 투탕카멘이 치명적인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열대열 원충'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또 투탕카멘이 왼쪽 다리에는 발이 안쪽으로 휘는 '내반족(內反足:club foot)'을, 오른쪽 다리에는 뼈 질환을 앓고 있어서 지팡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입천장이 갈라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선천성 기형인 '구개열'에 걸린 사실도 확인했다. 여러 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해진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됐다는 것이 연구팀의 견해다. 투탕카멘의 가계를 둘러싼 궁금증도 이번 연구를 통해 상당 부분 풀렸다. 10여 구의 미라에 대한 유전자 검사에서 연구팀은 투탕카멘의 아버지가 아톤 신을 숭배하며 일종의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파라오 아케나톤이며, 그의 어머니는 아케나톤의 여동생임을 밝혀냈다. 이밖에 연구팀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태아 미라 2구도 투탕카멘의 사산된 쌍둥이 딸임을 확인했다. 투탕카멘은 그의 누이 앙케세나멘과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다만 그의 무덤에서 태아 미라 2구가 발견돼 학계에서 논란이 됐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17일 발행되는 미국의학협회 학술지에 게재된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입력 2010.02.17)  

 

투탕카멘의 묘 발굴 역사

 

왕들의 골짜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길이 500m, 너비 1㎞인 음산한 골짜기. 이집트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 서쪽에 있는 이 골짜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4천년 전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왕)들의 무덤이 들어찬 곳이다. 왜 왕들은 이렇듯 도읍지에서 멀리 떨어진 음산한 골짜기의 벼랑과 바위 틈에 그들의 주검을 숨겼을까. 왕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죽은 뒤에 머무를 곳으로 피라미드를 세웠다. 또 영혼이 다시 찾아들도록 자신들의 시체를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게 했다. 피라미드는 어떤 침략에도 견디게끔 거대하게 만들고,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입구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왕들의 뜻과 달리 피라미드의 보물은 도둑들에게 번번이 털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비밀장소에 무덤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왕은 토트메스 1세였다. 그는 오랫동안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끝에 자기 무덤을 이 골짜기의 벼랑 틈에 숨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장소를 비밀에 부치고자 잔인한 살육극이 벌어졌다. 왕의 신하는 전쟁포로 100여명을 데리고 무덤을 만든 뒤 그들을 모두 죽였고, 그 또한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 모든 파라오의 주검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왕들의 골짜기’에 숨겨졌다. 그리하여 파라오의 미라들은 약 3천년 동안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이집트 왕가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 비밀장소는 그러나 안전하지 않았다. ‘왕들의 골짜기’는 1881년 한 미국인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이집트 골동상인으로부터 몰래 사들인 옛 파피루스가 피라미드시대 이후의 왕이 사용했던 유품으로 밝혀지자 이상하게 여긴 카이로박물관이 조사에 나섰는데, 조사관은 꽤 오랫동안 추적한 끝에 주민 전체가 무덤도둑인 마을을 찾아냈다. 13세기부터 대를 이어가며 옛 무덤을 도둑질하고 살아온 쿠르나 마을. 주민 한 사람이 1875년 우연히 ‘왕들의 골짜기’에서 파라오의 무덤을 발견한 뒤로, 마을사람 전체가 공범이 되어 파라오의 무덤을 파헤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1881년 7월5일 조사관이 도둑을 앞세우고 ‘왕들의 골짜기’를 찾았을 때 그 동안 파헤쳐진 무덤 64개에는 옛 유물이 하나도 없었다. 조사관은 도둑의 발길에 마구 짓밟힌 미라들만 박물관으로 옮겼을 뿐이다. 1902년 미국인 변호사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이집트 정부로부터 ‘왕들의 골짜기’를 발굴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12년 동안 무덤 네 군데를 발굴했으나 다 도굴된 뒤여서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1914년에 발굴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발굴권을 넘겨받은 사람은 영국인 귀족 조지 H 카나번. 백만장자인 그는 스포츠와 모험을 즐겼으며 미술품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친 뒤 요양을 위해 따뜻한 이집트에 갔다가 무덤을 발굴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고고학 발굴이야말로 예술품 수집과 모험을 함께 맛볼 수 있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사해 보니 ‘왕들의 골짜기’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의 무덤이 딱 하나 있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 도둑들도 그때까지 이 왕의 무덤을 찾지 못했으므로,그 무덤의 유물만은 온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였다. 1906년 카나번이 카이로 박물관을 찾아가자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는 발굴을 맡아 일할 사람으로 젊은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를 소개했다. 그때 카나번의 나이는 마흔,카터는 서른세 살이었다. 1913년 가을 어느 날,카나번과 카터가 높은 곳에서 ‘왕들의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터가 골짜기 가운데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무덤이 람세스 2세, 저쪽이 람세스 6세, 그리고 이쪽이 메르넵타 왕의 무덤입니다. 저 세 무덤을 이어서 만들어지는 세모꼴 안을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이 세모꼴 땅 안에 있다고 믿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는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그 근처 바위 밑에서 투탕카멘이라고 새겨진 도자기와 금박 입힌 나무상자를 주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흙을 치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3년을 쉬었다가 1917년부터 다시 시작했지만 2년 동안 흙을 치우고 다시 2년 동안 장소를 옮겨 땅을 팠어도 무덤 입구는 찾을 수 없었다. 아직 한 군데 파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저 오두막은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 때 일꾼들이 쓴 집인데, 람세스 6세는 투탕카멘보다 훨씬 뒤의 왕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 밑은 아직 파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1922년 11월3일 카터는 그 오두막을 헐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카터가 무심코 일꾼들이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니,거기에 바위를 깎아 만든 돌계단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누가 보아도 무덤 입구로 가는 층계임이 분명했다. 계단 열여섯 개를 파내자 출입문이 나타났다. 문의 틈새에는 투탕카멘의 도장이 찍힌 종이가 붙여진 채 봉인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도 이곳을 통과한 적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카터가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그 안은 돌과 자갈로 꽉 메워져 있었다. 6년이나 기다려온 날.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고 런던에 가 있는 카나번에게 전보를 쳤다. 11월24일 카나번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두 사람이 다시 봉인을 잘 살펴보니 누군가 뜯었다가 다시 잘 봉인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 며칠 걸려 통로의 자갈더미를 치우고 나니 두 번째 문이 열렸다. 방안에 들어선 네 사람(카터, 카나번, 카나번의 딸과 사위)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황금 옥좌를 비롯한 금붙이들이 방안에 가득 차 있었고, 벽에는 화려한 벽화와 돌조각이 황금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수천년 전 이집트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값진 문화재였다. 여태까지의 이집트 문화사를 다시 쓰게 할 보물들. 그 방에는 미라가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이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네 군데 벽을 꼼꼼히 더듬어 보았다. 그랬더니 방이 2개 더 있었다. 구멍을 뚫고 한 군데를 들여다보니, 온갖 일용품과 장신구가 꽉 들어차 있었다. 그렇다면 또 한 군데 방에 투탕카멘의 미라가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보물이 얼마나 더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그것들이 본디 있었던 자리를 기록하고,목록을 만들고, 부숴지지 않도록 포장하고,연구실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고, 따라서 몇 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곳곳에서 전문가들이 달려와 12월6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다섯달이 지난 1923년 5월13일,1차로 유물을 포장한 상자 34개가 무덤을 떠나 카이로박물관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일찍이 이집트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1924년 2월17일 카터는 두 번째 방을 열었다. 그가 돌을 들어내고 구멍 안으로 플래시를 비추자, 20명 남짓한 전문가들은 그 뒤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바심을 냈다. 안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 방이야말로 미라를 안치한 현실(玄室)이었다. 금빛 벽은 미라를 넣어둔 엄청나게 큰 겉관이었는데, 어찌나 큰지, 관과 현실 벽 사이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틈밖에 없었다. 카터가 그 앞에 서자 너무도 웅장함에 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길이 5m, 너비 3.3m, 높이 2.73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관은 온통 순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현실을 한 바퀴 둘러보니, 한쪽 벽에 문이 또 하나 있었다. 그 방에는 커다란 금빛 궤짝이 있고 그 둘레에 여신상 4개가 서 있었다. 그곳은 보물을 모아둔 창고였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가장 큰 보물 발견이라고 일컬어지는 투탕카멘 왕릉 발굴은 무덤을 찾는 데 6년, 유물을 조사하고 옮기는 데 6년이 걸렸다. 1927년 2월3일,네 겹으로 된 겉관이 열리자, 노란색 석영으로 된 돌관이 나타났다. 550㎏이나 나가는 붉은색 화강암 뚜껑을 들어올리자 마침내 속관이 나타났다. 속관은 주검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인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첫번째 속관의 뚜껑에는 아홉살에 왕이 되어 열여덟살에 죽은 소년 왕의 앳된 초상을 새긴 황금판이 붙어 있었다. 얼굴은 순금, 눈은 흑요석, 눈썹은 푸른 유리로 만들어졌고, 두 손에는 그가 이집트의 왕임을 상징하는 갈고리와 도리깨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제일 감동시킨 것은 소년왕의 이마에 놓인 한묶음 꽃이었다. 그것은 나이 어린 왕비가 남편에게 바친 마지막 작별 인사였으리라. 그 꽃다발은 3,000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짧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3,000년은 어제와 오늘에 지나지 않았다. 3,000년 전이 지금 이렇게 우리 앞에 생생히 펼쳐져 있지 않은가. 꽃 한다발이 옛날과 오늘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피크리스·팔랑개비국화·노박덩굴·목가지와 만다라 열매들을 소담스럽게 묶은 그 꽃다발은 소년왕이 4월 말∼5월 중순 사이에 묻혔음을 가르쳐 주었다. 두 번째 속관의 뚜껑에는 예복을 입은 소년왕의 초상화가 있었다. 두 번째 속관을 들어냈을 때까지도 남아 있는 관은 아주 무거웠다. 두 번째 속관의 뚜껑을 열고 나서야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세 번째 속관은 온통 2.5∼3.5㎜ 두께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순금 뚜껑을 열자 마침내 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아마포로 칭칭 감은 미라는 얼굴에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가면을 쓰고 있었다. 미라를 겹겹이 싼 아마포를 풀어헤쳤더니 그 안에 온갖 귀한 보석이 143개나 들어 있었다. 열여덟살밖에 안 되는 파라오가 하늘나라로 가지고 가려던 황금 보화는 이토록 엄청난 양이었다. 어느 누가 그것을 어림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미라의 머리를 받친 왕관 모양 베개 밑에는 머리받침이 있었는데,합금되지 않은 순수한 철이었다.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순수한 철제품이었다. 마지막 남은 붕대 한 겹을 벗겨냈을 때 카터가 대한 왕의 얼굴은 ‘평화롭고 온유한 젊은이의 얼굴’이었으며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우수한 골격을 지녔고, 특히 선이 뚜렷한 입술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발굴이 한창 무르익던 1923년 4월6일 카나번이 모기에 물려 죽은 것을 시작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온세계의 신문들은 그것을 ‘파라오의 저주’ ‘투탕카멘으로부터 저주받은 몇 번째 희생자’ 따위의 제목을 달아 호들갑스럽게 보도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카터는 그런 일에 주눅들지 않았다. 1933년 독일 고고학자 게오르그 슈타인도르프는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조사했더니 모두 자연사했거나 발굴과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또는 우연한 죽음으로 밝혀졌다. <왕들의 골짜기- 파라오들의 비밀무덤, 출처- 민이의 세계문화유산기행 [World Herit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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