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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연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16. 10. 2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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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연회 6명 순교자 중 권원호 명예목사, 한사연 목사, 서기훈 목사 부조, 감리교 동부연회 본부 현관 부조

 

한사연 목사

한사연 목사(1879-1950)

 

한사연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를 시대마다 실천했기에 수많은 고초를 격으면서도 껵이지않는 신앙의 삶을 살다가 떠나셨다. 그는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아버지 한보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방의학을 배웠으며 총을 잘 다루는 포수였다. 1907년 강원도 이천에서 세례를 받고 1909년부터 공산당에게 희생되어 순교할때까지 김화를 줌심으로 강원도 서북부 산간지역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아내는 미신을 섬기는데 열심히였으나 세례를 받은후 김마리아라 개명했다 한다. 김화지역은 양심전으로 유명한 윤승근과 하디선교사의 복음전파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1년 하디 선교사에의해 15명이 세례를 받고 지경터에 교회가 세워졌고 지역에도 새술막교회가 세워졌다. 1914년 경원선의 완성은 교통의 중심축이 철원으로 바뀌였고 이후 금강산전철로 선교의 중심축도 지경터에서 철원과 김화가 중요하게 되었다. 한사연목사는 그런 격변기에 김화를 중심으로 목회를 했다. 1911년 회양구역 구역장으로, 14년부터는 금성구역장으로 사역하며 전도사가되고 이후 삭녕구역장으로 평강구역장으로 사역하며 1926년 장로목사안수를 받았다. 29년부터 다시 금성구역장이되고 이후 김화와 금성교회에서 목회를 한다. 강원북부의 외딴지역을 복음의 발걸음으로 밝히는 사역이였다. 이 과정에서 1919년에는 반일 활동과 관련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할만큼 복음과 민족은 비껴갈수 없었다. 삼일만세운동때 한목사의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지만 삼일운동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유대하여 독립대한청년단을 만들어 기독교민족주의 활동을 이끌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이가 10명인데 그중 8명이 금성교회와 주변 교회 성도들이였다. 그중 하나인 한사연의 수양아들 한성옥은 후에 목회자가 되었고 장흥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감당한다. 일제말기 선교사들이 추방당할 때에는 김화지역의 많은 신앙공동체를 책임져 목회를 했다. 해방이후 그의 목회는 여전히 가시밭길로 기독교 신앙은 공산주의와 충돌했다. 김화지역은 한사연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민족진영과 장보라로 대표되는 공산진영이 존재했다. 장보라도 한사연도 일제시대 독립을 목표로 활동할때는 협력자였다. 하지만 한목사는 교인들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도록 인도하고자 조선민주당에 가담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정치적으로 서로 극복의 대상이였고 기독교는 상대적 약자였지만 한사연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민주당원으로 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49년에는 화가 박수근과 그의 아내 김복순이 조선민주당의 공천으로 군의원과 면의원으로 당선될만큼 활동적이고 지지도 많이 받았음을 알수 있다. 한사연목사는 공산당의 압박에도 가족들까지도 교회와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항했다. 그에게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공산당은 한국전쟁을 준비하며 예비검속령을 내렸고 624일에 체포되었고 손자 한영순은 끌려가는 할아버지를 목격했으며 함께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신시욱의 증언으로 한사연목사는 1950103일에 원산 앞바다에 수장되어 순교했음이 전해졌다. 한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많은 이들이 월남할때에도 가족까지 교회와 지역을 지켰고 그 피해는 가족까지 이어져 4명의 아들중 3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희생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후손들의 열악한 환경과 교회의 무관심으로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념하는 일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요약출처- 장흥교회 한찬희 목사)

 

유관지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중 한사연 목사 이야기

(글 출처-http://www.21tv.org/bbs/zboard.php?id )

 

한사연 목사

 

삭녕감리교회- 임진강을 끼고 있는 삭녕은 원래는 독립된 군이었다가 1914년에 연천군에 통합되어 연천군의 서북지역을 이루었는데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철원군에 속하게 되었다.(남에도 철원군이 있고, 북에도 철원군이 있다.) 삭녕감리교회는 1916년에 설립되었다. 설립될 때에는 남감리회 서울지방에 속해 있다가 그 다음 해부터 철원지방에 속했다. 남감리회 전도인들이 경기도 고양에서 전도를 하다가 당시 김화군에 속해 있었던 지경대에 와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고, 지경대에서 철원, 김화로 복음이 퍼져 나갔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삭녕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삭녕감리교회는 초기에는 셔라우스(C. F. Shearouse: 史羅時) 선교사와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담임했다. 셔라우스 선교사는 1921년에 한국에 와서 1925년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강원도에서 사역했다. 한사연 목사는 평남 안주 출생으로, 예수를 믿은 다음에 매서인이 되어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는데 짚신을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등에 지고 깊은 오지까지 찾아다녔다.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었을 때 한 목사는 김화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월남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예배를 인도했다. 공산정권은 김화읍교회를 빼앗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한 목사는 가까운 곳의 성결교회를 빌려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 한 목사는 625 전쟁 중에 원산으로 끌려가서 순교당했다. 한 목사의 둘째 아들이 의사였는데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비슷한 때에 공산당에게 피살되었고, 자녀들 대부분이 희생당했다.

 

김화읍교회- 1942년에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부임했다. 피터즈 선교사가 한국여인과 결혼할 때 그 결혼식의 주례를 한 분이 바로 한사연 목사이다. 한사연 목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선비목사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한사연 목사는 짚신을 신고 등에 성경과 찬송을 많이 짊어지고 강원도 산간오지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38선이 그어지고, 김화군이 공산당 통치 밑으로 들어가고, 박해가 심해지자 사람들이 월남하라고 권했다. 한 목사님은 교인들을 버리고 월남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더 열심히 전도했다. 한사연 목사는 1946년에 김화읍교회를 떠나 김화군 금성면에 있는 금성(金城)교회를 담임하였다. 공산정권은 금성교회를 징발해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 목사는 굴복하지 않고 이웃의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렸다. 19503월에 철원과 김화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체포되었는데 한 목사도 이 때 체포되었다. 손녀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보니까 사람들 이십여 명이 밧줄에 묶여 트럭에 실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모습이 있어서 잘 보니 바로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할아버지!” 외치자, 한사연 목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되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한 목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한사연 목사는 원산으로 끌려갔다가 1956103일 학살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사연 목사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셋이 전쟁 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당했다.

 

한사연 목사 순교 이야기 (12명의 순교자)

(글 출처-http://lovejesus.kr/lovejesus/bbs/board.php?bo_table=martyr)

 

1950624일 늦은 밤, 38선을 향해 탱크와 대포를 싣고 부산히 내려가던 금강산 전철의 수송작전은 이미 끝났다. 전쟁 전야의 금성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누군가 금성교회 목사관을 두드렸다. 그는 "회의가 있다"며 잠자리에 든 한목사를 깨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일요일인 이튿날 금성교회의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 영순씨는 한목사의 둘째아들인 명옥씨의 아들. 김화고급중학교에 다니던 영순씨는 그해 7월말쯤 전선에 동원되기 위해 김화인민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아놓고 있었다. 우연히 김화정치보위부 울타리를 지나가다가 할아버지 한목사를 만났다. 우람한 체격의 백발노인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함께 동아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영순아,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돼야한다!" 한목사의 가계는 철저히 유린됐다. 맏아들은 김화 생창굴 속에서 폭사 당했으며, 의사인 셋째 상옥은 원산으로 끌려갔다. 역시 의사인 막내는 김화 쑥고개 칠성정에서 총살당했다. 해주교회 사모로 시집간 외동딸 만옥은 행방불명됐다. 둘째아들 명옥만 월남했다. 전쟁이 끝난 후 금성이 고향인 사람들의 연말모임에서 영순씨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신시옥(작고)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목사는 원산 앞바다에서 4명 씩 철사줄에 묶여 수장됐다"고 일러줬다. 신씨는 그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이며 그는 그날을 103일로 기억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지난 94년 여름 북한의 오성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구김화읍 읍내리 민통선 북방의 한 벌판에서 들었다. 영순씨는 "여기가 보위부자리, 저기가 내가 막내 작은아버지 시신을 묻어 놓고 표식으로 구두 두 짝을 올려놓았던 그 밭"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그는 " '네가 증인이 되라'고 한 할아버지의 유언이 가슴에 박힌 커다란 가시 같다"고 말했다. "기막힌 이 사연을 글로 옮길 재주도 없고, 이 사연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도 없다"며 그때 노인은 소년처럼 울었다. 6년이 지난 최근 한영순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더 늙어 70세 노인이 돼 있었다. 2년 전 병을 얻어 민통선 출입영농도 일부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는 내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나는 한 순교자의 유일한 증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 말을 그 때처럼 다시 했다. 그의 가슴엔 아직도 그 가시가 박혀 있었다. 변한 건 어눌해진 말투뿐이었다.

유관지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 (글 출처-http://www.21tv.org/bbs/zboard.php?id )

 

김화읍감리교회 -민통선 안에 있었으며,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교회

 

1953727일에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그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보통 휴전선이라고 말하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각기 2km씩 뒤로 물러나서 4km의 남과 북 사이에 공백지역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비무장지대(DMZ)이다. 남쪽이 2km 뒤로 물러나서 철책을 친 것이 남방한계선인데 그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한 거리에서부터 군사작전과 보안을 위해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민간인출입을 통제하는 선이 바로 민통선인데 19542월에 설치되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민통선 안의 여러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게 했다. 이것은 보통 민북(民北)마을이라고도 하고 통일촌이라고도 한다. 1990년대에는 민통선이 북으로 많이 올라갔다. 지금은 출입 시간은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방문목적을 말하면 출입이 가능하다. 김화군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625 전쟁 때 이 지역에서 싸움이 아주 치열했다. 철원김화평강을 철의 삼각지대라고 한다. “점령하기 힘든 곳이란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김화군의 한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다. 남에서는 남에 속하게 된 김화군 지역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으로 만들었고, 북에서는 북에 속하게 된 김화군 지역을 가지고 강원도 김화군을 만들었다. 예전 김화군의 많은 지역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있는데 예전 김화읍이었던 지역은 남방한계선 가까운 곳의 민통선 안에 들어 있다.

 

윤승근 전도인, 하디 선교사, 무스 선교사

 

김화읍감리교회는 1900년대 초기에 세워졌다. 김화군에 지경대란 곳이 있는데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교통이 편한 곳이었다. 이곳에 윤승근이라는 분이 들어가서 전도를 해서 교회가 세워졌다. 그 다음에 하디 선교사가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했다. 김화읍교회는 그 때 세워졌다. 1923년에는 무스(J. Robert Moose) 선교사가 담임했다. 무스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무아각(茂雅各)인데 아각은 야곱의 한자 표기이다. 이 분은 선교사업과 함께 자선사업을 많이 한 분이다. 이 분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이 분이 사는 집 앞에 나무로 된 비석을 세워줄 정도였다. 1924년에는 배기준(裵基俊) 전도사, 그 이듬해에는 김태제(金泰濟) 전도사, 1929년에는 백학신(白學信) 목사, 1930년에는 서기훈(徐琦勳) 목사가 담임했다. 백학신 목사와 서기훈 목사는 나중, 625 전쟁 때 강원도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공산군에게 희생당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문우형(文宇亨) 목사, 중반에는 강명석(姜明錫) 목사가 담임했다.

 

피터즈 선교사의 토착선교

 

그런데 김화읍교회는 1937년에 피터즈(Victor. W. Peters: 皮道秀) 선교사가 부흥하면서 널리 알려지고 부흥하기 시작했다. 피터즈 선교사는 한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한국문화를 좋아했던 분이다. 그는 1928년에 한국에 왔는데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경기도 지역에서 일하다가 김화읍교회에 부임했는데 한국식 석조기와집 예배당을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피터즈 선교사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을 했다. 지금은 국제결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당시는 국제결혼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을 때였다. 피터즈 선교사는 한국 아내와 함께,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한국식 주택에 살면서 목회를 했다. 이 분은 미술에 조예가 깊어서 성화를 많이 그렸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밑에서 슬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여인들을 한복 입은 여인들로 그렸다. 한마디로 해서 기독교의 토착화에 앞장섰던 선교사였다. 피터즈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 일본 당국이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할 때 한국을 떠났다. 피터즈 선교사는 20129월에 미국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피터즈 선교사와 한국인 부인 한흥복 사모, 네 자녀  (출처-http://jubileeuni.com/menu85/10078)

 

한사연 목사

삭녕감리교회- 임진강을 끼고 있는 삭녕은 원래는 독립된 군이었다가 1914년에 연천군에 통합되어 연천군의 서북지역을 이루었는데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철원군에 속하게 되었다.(남에도 철원군이 있고, 북에도 철원군이 있다.) 삭녕감리교회는 1916년에 설립되었다. 설립될 때에는 남감리회 서울지방에 속해 있다가 그 다음 해부터 철원지방에 속했다. 남감리회 전도인들이 경기도 고양에서 전도를 하다가 당시 김화군에 속해 있었던 지경대에 와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고, 지경대에서 철원, 김화로 복음이 퍼져 나갔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삭녕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삭녕감리교회는 초기에는 셔라우스(C. F. Shearouse: 史羅時) 선교사와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담임했다. 셔라우스 선교사는 1921년에 한국에 와서 1925년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강원도에서 사역했다. 한사연 목사는 평남 안주 출생으로, 예수를 믿은 다음에 매서인이 되어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는데 짚신을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등에 지고 깊은 오지까지 찾아다녔다.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었을 때 한 목사는 김화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월남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예배를 인도했다. 공산정권은 김화읍교회를 빼앗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한 목사는 가까운 곳의 성결교회를 빌려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 한 목사는 625 전쟁 중에 원산으로 끌려가서 순교당했다. 한 목사의 둘째 아들이 의사였는데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비슷한 때에 공산당에게 피살되었고, 자녀들 대부분이 희생당했다.

김화읍교회- 1942년에 한사연(韓士淵) 목사가 부임했다. 피터즈 선교사가 한국여인과 결혼할 때 그 결혼식의 주례를 한 분이 바로 한사연 목사이다. 한사연 목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선비목사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한사연 목사는 짚신을 신고 등에 성경과 찬송을 많이 짊어지고 강원도 산간오지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38선이 그어지고, 김화군이 공산당 통치 밑으로 들어가고, 박해가 심해지자 사람들이 월남하라고 권했다. 한 목사님은 교인들을 버리고 월남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더 열심히 전도했다. 한사연 목사는 1946년에 김화읍교회를 떠나 김화군 금성면에 있는 금성(金城)교회를 담임하였다. 공산정권은 금성교회를 징발해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 목사는 굴복하지 않고 이웃의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렸다. 19503월에 철원과 김화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체포되었는데 한 목사도 이 때 체포되었다. 손녀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보니까 사람들 이십여 명이 밧줄에 묶여 트럭에 실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모습이 있어서 잘 보니 바로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할아버지!” 외치자, 한사연 목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되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한 목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한사연 목사는 원산으로 끌려갔다가 1956103일 학살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사연 목사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셋이 전쟁 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당했다.  

논밭이 되어 버리다

김화읍감리교회는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 생창리(生昌里) 16번지였다. 건물 규모는 마흔한 평이었다. 이곳은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가 되어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이지만 1970년 초부터 주민들이 입주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현재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 논밭이 되어 있다.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생창리감리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 교인들의 일부가 이 지역은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생창리 부근에 승리전망대가 있는데 승리전망대에서는 비무장 지대를 볼 수 있고, 북한 군인들이 훈련받는 하전사 훈련장과 예전에 금강산으로 가던 전기철도가 놓여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다.

 

민통선 안내판: 강원도 고성군 평화전망대 부근   (출처-http://jubileeuni.com/menu85/10078)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생창리 마을의 현재 지도  (출처-http://jubileeuni.com/menu85/10078)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엮음

(글 출처-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136)

 

한국기독교 선교 130년을 앞두고 그동안의 활동들을 평가하고 한국교회의 내일을 설계하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동부연회는 특별히 동부연회 출신 6명의 순교자를 조명하고 이러한 순교적 전통에 기반한 동부연회의 내일을 설계하고자 동부연회 순교자 열전’(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을 출간했다. 이철 감독(동부연회)미래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복음적 신앙의 뿌리를 찾고, 그 복음의 정신을 계승해 한국 감리교회 재도약의 디딤돌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순교자 열전에 소개된 여섯 분의 순교정신이 동부연회의 정신적 신앙의 유산이 되고 우리 신앙의 본질을 바로 잡는데 발판이 되길 바란다며 출간의미를 밝혔다. 순교자 열전에는 김영학 목사(1877~1932, 양양교회), 강종근 목사(1901~1942, 철원제일교회), 한사연 목사(1879~1950, 김화교회), 서기훈 목사(1882~1951, 장흥교회) 권원호 전도사(1904~1944, 회양교회) 최인규 권사(1881~1942, 천곡교회) 6명의 순교자들의 삶이 수록되어 있다. 시베리아에서 양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목양일념으로 사역하다가 공산주의에 체포되어 노역장에서 복역 중, 얼음 강물에 빠져 순교한 한국 기독교 역사의 첫 순교자 김영학 목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었다가 끝까지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 희생된 강종근 목사, 권원호 전도사, 최인규 권사. 해방과 함께 분단의 비극을 경험하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민족 전체가 시련을 겪고 있을 때에, 끝까지 자신의 양을 지키며 선한 목자의 길을 걷다가 순교한 한사연, 서기훈 목사. 순교자 열전에는 이렇게 고귀한 삶을 살아간 여섯 순교자의 삶과 당시 그들의 음성을 글로 재연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동부연회 순교자 열전 출판의 역사신학적 의미라는 글을 통해, “동부연회 순교자들이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라고 자문하며 이를 세 가지로 대답했다. 첫째로, ‘신앙양심에 따라 살자는 것으로, 순교자들은 부정직한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 길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둘째로, ‘신앙의 본분을 지키라는 것으로, 순교자들은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양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면서 목회자로서 자리와 본분을 지키다가 십자가를 졌다면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선한 목자로 자기의 본분을 다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셋째로, ‘평소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라는 것으로, 이 교수는 순교자들은 생전에 완벽에 가까운신앙생활을 했다면서 순교는 평소 생활에서 믿음에 철저했던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 교수는 흔히 순교에는 백색순교적색순교를 말하는데, ‘적색순교는 붉은 피를 흘리는 순교이고 백색순교는 피 대신 눈물과 땀을 흘리는 순교를 의미하는데, 순교자 열전의 여섯 분은 평소 백색순교를 경험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적색순교의 영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철원의 순교자들 (요약 출처- 장흥교회 한찬희 목사)

 

1. 철원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그럼에도 꽤나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오대쌀의 신화는 여기에 근거하며 천연기념물 202203호 두루미들도 평야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 남북간에, 동서간에 중앙에 이러한 평야가 만들어진 것은 30만년전 평강의 오리산에서 용암이 흘러나와 계곡을 매웠기 때문이다. 그때이후 평지에는 흙이 쌓이고 평야를 이뤘으며 흐르는 물은 강을 이루어 한탄강을 형성했다. 역사속에서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로 나뉘어 전쟁할 때 철원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궁예에 의해서 태봉국이 세워지고 이땅은 도읍지가 되었지만 그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철원사람들에게 漢灘江(한탄강)恨嘆江(한탄강)같이 되었고 궁예가 왕건에게 최후의 패배를 당한 산은 鳴聲山(명성산) 곧 울음산이 되었다. 그러나 아품만 있지는 않았으니 이땅은 조선시대 병자호란의 때에 백전전투에서 조선이 유일하게 승전한 전투의 땅이기도 했으며 겸재 정선은 철원을 화폭에 담아 금강산 그림과 함께 진경산수화로 인전받는 계기가 되었다. 정철의 관동별곡 속에서는 북관정이라는 철원의 3대 정자에서 지어진 시도 등장한다. 일제시대 경원선이 만들어지며 큰 읍을 이루었고 금강산가는 전철은 전 국민이 누리고픈 최고의 호화여행 상품이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다시한번 철원에게 큰 아품을 주었으니 백마고지전투, 오성산지구(삼강령)전투 등은 한국전쟁에서도 주목하게하는 아품이다. 철원은 아품의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복음의 역사도 우리들 그리스도인에게는 많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순교하신 믿음의 선진들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한다.

 

이곳의 내용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동부연회 순교자 열전

동부연회역사편찬위원회 동부연회사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6.25와 한국 감리교회 순교자

박경룡 주님따라 금강산

기독교대한수도원사 출판위원회 눈물이 강이되고 피땀이 옥토되어

를 참고하여 정리 한다.

 

1. 강종근 목사 (1901-1942)

 

강종근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자가 된 첫 번째 목회자이다. 감리교회는 신사참배에대해 순응하는 입장이였으나 강종근목사 등 소수의 신앙인들은 신앙과 민족을 지키며 수난과 죽음을 당했다. 강종근목사는 평남 강서군의 강영동과 박형옥의 4형제중 막내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그가 2살 때 돌아가시고 가난한 집안을 어머니가 책임지셨다. 그는 어머니를따라 예수를 믿게된다. 그의 가족은 한일합방과 함께 만주 봉천의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삼광학교와 철영 육영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이동교회를 다니며 최학규전도사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최학규의 추천으로 강종근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더욱 굳어졌으며 졸업후 1925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29년 졸업한다. 재학중이던 26년 윤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그는 1933년 경성지방 창동구역에 파송받아 목회를 시작하였고 그의 사역기간 크게 부흥하였다. 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구역에 파송되어 목회했고 38년에는 창도교회, 39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철원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철원제일교회는 강원도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때 박연서목사를 중심으로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교회로 이런 발자취는 선교적으로도 큰 부흥을 이룰수 있었다. 36년에 기공해서 지었던 예배당은 한강이북에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은 30년대 후반부터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갔고 신사참배는 교회에게 큰 어려움이였다. 감리교회는 38년 이후로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했으며 39년 정춘수목사가 감독이 되면서 혁신교단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예속되었다. 이런 시대배경에도 불구하고 강종근목사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하며 민족을 향해 손을 펴야한다는 설교 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민족도 해방의 때가 올것임 선포하며 이겨내기를 선포했다. 연천교회에서도 창도교회에서도 철원제일교회에서도 그의 외침은 약해지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그는 끝까지 거부하여 일본 경찰의 표적이 되었다. 1940930일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이 검거되었고 강종근목사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일본은 강목사를 조용히 서울로 이송하고자 했지만 성도들은 새벽녘에 철원역에서 찬송으로 떠나는 목사를 배웅했다고 전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중 건강이 악화되었고 194263일에 06나는 기뻐라는 말을 아내 윤희성에게 남기고 순교하셨다. 강종근목사의 유족은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아들의 친구인 이창건박사가 강목사의 재판기록을 찾아내어 2003년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2. 한사연목사(1879-1950)

 

한사연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를 시대마다 실천했기에 수많은 고초를 격으면서도 껵이지않는 신앙의 삶을 살다가 떠나셨다. 그는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아버지 한보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방의학을 배웠으며 총을 잘 다루는 포수였다. 1907년 강원도 이천에서 세례를 받고 1909년부터 공산당에게 희생되어 순교할때까지 김화를 줌심으로 강원도 서북부 산간지역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아내는 미신을 섬기는데 열심히였으나 세례를 받은후 김마리아라 개명했다 한다. 김화지역은 양심전으로 유명한 윤승근과 하디선교사의 복음전파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1년 하디 선교사에의해 15명이 세례를 받고 지경터에 교회가 세워졌고 지역에도 새술막교회가 세워졌다. 1914년 경원선의 완성은 교통의 중심축이 철원으로 바뀌였고 이후 금강산전철로 선교의 중심축도 지경터에서 철원과 김화가 중요하게 되었다. 한사연목사는 그런 격변기에 김화를 중심으로 목회를 했다. 1911년 회양구역 구역장으로, 14년부터는 금성구역장으로 사역하며 전도사가되고 이후 삭녕구역장으로 평강구역장으로 사역하며 1926년 장로목사안수를 받았다. 29년부터 다시 금성구역장이되고 이후 김화와 금성교회에서 목회를 한다. 강원북부의 외딴지역을 복음의 발걸음으로 밝히는 사역이였다. 이 과정에서 1919년에는 반일 활동과 관련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할만큼 복음과 민족은 비껴갈수 없었다. 삼일만세운동때 한목사의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지만 삼일운동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유대하여 독립대한청년단을 만들어 기독교민족주의 활동을 이끌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이가 10명인데 그중 8명이 금성교회와 주변 교회 성도들이였다. 그중 하나인 한사연의 수양아들 한성옥은 후에 목회자가 되었고 장흥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감당한다. 일제말기 선교사들이 추방당할 때에는 김화지역의 많은 신앙공동체를 책임져 목회를 했다. 해방이후 그의 목회는 여전히 가시밭길로 기독교 신앙은 공산주의와 충돌했다. 김화지역은 한사연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민족진영과 장보라로 대표되는 공산진영이 존재했다. 장보라도 한사연도 일제시대 독립을 목표로 활동할때는 협력자였다. 하지만 한목사는 교인들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도록 인도하고자 조선민주당에 가담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정치적으로 서로 극복의 대상이였고 기독교는 상대적 약자였지만 한사연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민주당원으로 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49년에는 화가 박수근과 그의 아내 김복순이 조선민주당의 공천으로 군의원과 면의원으로 당선될만큼 활동적이고 지지도 많이 받았음을 알수 있다. 한사연목사는 공산당의 압박에도 가족들까지도 교회와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항했다. 그에게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공산당은 한국전쟁을 준비하며 예비검속령을 내렸고 624일에 체포되었고 손자 한영순은 끌려가는 할아버지를 목격했으며 함께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신시욱의 증언으로 한사연목사는 1950103일에 원산 앞바다에 수장되어 순교했음이 전해졌다. 한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많은 이들이 월남할때에도 가족까지 교회와 지역을 지켰고 그 피해는 가족까지 이어져 4명의 아들중 3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희생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후손들의 열악한 환경과 교회의 무관심으로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념하는 일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3. 서기훈 목사(1882-1951)

 

서기훈 목사는 세상이 변해도 복음의 진리에 굳게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삶으로 보이셨던 복음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시고 떠나셨다. 하지만 그를 기억할만한 기록을 찾는일은 쉽지 않은 아쉬움이 많다. 그는 충남 논산의 서영구의 아들로 태어나 입신양면을 위해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던중 그의 나이 231904년에 육곡교회를 설립하게되었다. 당시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 백성을 지켜낼수 없을 때 교회는 일본의 힘을 피할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였다. 교회가 현실적 이유로 세워졌지만 5년의 세월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 목회의 소명을 깨닫게 만들었다. 190928세로 세례와 함께 공주교회의 단기 신학을 이수했다. 1916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27년에는 장로목사안수를 받으니 이때 46세였다. 초기는 충청지역에서 목회사역을 23년이후 순교할때까지는 강원북부 지역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조용하고 점잔은 성격이였다고 증언해준다. 그의 초기 목회여정은 연산구역, 부여구역, 대전남북구역의 활동이 있었지만 자세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23년부터 원산에서의 18년 사역의 시작이다. 간성, 고저, 원산구세병원, 장전구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교회부흥을 이끌었다.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유치장에서 여섯달을 보내기도 했다. 이때 수염을 깍지 못했던 것이 그의 상징이 되었다. 해방이되어 폐쇄되었던 교회들을 회복하지만 공산주의는 새로운 핍박자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하던 때에 서기훈 목사는 장흥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장흥교회는 1920년 한성옥목사에 의해 설림되었고 영생학교를 통해 민족계몽에 나섰다. 삼일 민족대표인 신석구목사는 4, 한국 개신교 수도원을 세운 박경룡은 12대 담임자였고 서기훈목사는 6대와 13대 담임목회를 했다. 서기훈목사는 감리사로 1931-33년 철원지방에서 활동했다. 그의 활동은 연약했던 교회들이 큰 부흥을 이루게 했다. 장흥교회(철원동구역)에도 엡윗청년회가 조직될 만큼 교회는 젊고 활동적이였다. 이 조직은 훗날 장흥교회를 중심한 신앙운동에 큰 활동을 하게 된다. 박경룡목사는 1940년 장흥교회에 부임하여 수도원운동을 시작했고 이것은 대한수도원의 시작이 되었다. 이성해집사, 유재헌목사, 전진전도사 등은 우리나라 기도운동의 선각자들이다. 해방은 기쁨과 함께 어려움으로 찾아왔다. 38이북은 공산주의 세상이였고 기독교는 큰 어려움에 처했다. 김윤옥목사의 지도로 반공조직이 만들어졌고 많은수가 장흥교회 성도들이였다. 신한청년회다. 19463월에 조직되지만 8월에 발각되어 지역과 교회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50여명중 주동자 김윤옥목사와 박성배장로 7년형을 기타의 사람들이 4-1년형을 받고 여러명이 옥사하고 체포중 죽기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박경룡목사는 교회를 떠나야 했고 그 후임으로 서기훈목사가 부임하였다. 서기훈 목사는 교회와 공산주의가 대립된 상황에서도 단절보다는 소통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인격은 좋은 도구였다. 핵심 공산당원 이영일의 아버지 이보연과도 수시로 바둑을두며 왕래했고 교회는 어려움중에도 새벽종이 그치지 않을수 있었다. 사랑으로 대하며 소망중에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집단적인 보복의 상황이 발생한다. 대한청년단원들이 공산당원과 가족에게 보복하려 할 때 서목사는 그들의 행위를 막아냈고 많은 이들이 피난길에 오를때도 남겨진 성도들을 돌보며 교회와 성도를 지켰다. 철원에 공산당이 다시 들어왔고 공산당에 대항했던 장흥교회 성도들을 대신하여 구금되고 195118일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4. 조춘일목사(1903-1950)

 

조춘일은 경기도 연천군에서 조경숙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2년 세례를 받은후 형 조신일목사를 도와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37년 철원성경학원을 38년 성신학교에서 수업하고 철원지방 안협구역, 금강구역 등에서 목회하다가 1946년 목사안수를 받고 연천교회 회양교회 김화교회에서 목회했다. 김화교회에서 한국전쟁을 격게되는데 공산당의 픽박에도 떠나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켰다. 1950624일 북조선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고 공산군이 후퇴할 때 우익인사을 학살할 때 조목사도 총살당했다. 1950930일로 추정된다.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이들은 조목사가 가족과 함께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피해있다가 교회를 돌보기위해 내려갔고 얼마후 돌아온 가족들은 조목사를 보지 못했다. 이후 금곡리라는 곳에 40여명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조춘일 목사도 그곳에 있었다. (6.25와 한국감리교회 순교자)

 

5. 신한청년회

 

1945년 해방은 38선을 불러왔고 철원은 38선 이북지역이 되어 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했다. 그때 정치적으로 38선 이후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시영(후에 부통령)은 김윤옥목사를 설득하여 38선 이북에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게 했다. 김윤옥목사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병조목사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철원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여 장흥교회 성도들과 신한청년회라는 반공조직을 19463월 조직하였다. 대부분 교회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였다. 일본군이 버리고간 무기를 동원하여 무장하고 내무서원을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이 조직은 6개월만에 발각되었고 50여명의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강원지역 회장 김윤옥목사, 철원지역 회장 박성배장로, 부회장 정국환장로, 각 부장으로 박정배, 김관순, 김윤성, 박상춘, 김정필, 김금순 등이였다. 몇몇 사람들은 검거 과정에서 총에 맞거나, 취조 과정에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주동자 김윤옥과 박성배는 8년형을 받았다가 한국전쟁에서 총살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4-1년의 형을 감옥에서 보내며 죽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은 기록을 찾기 어렵기에 공식적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윤옥목사와 많은 수의 장흥교회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위해 투쟁했고 그 과정이서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순교자요, 순국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6.25와 한국 감리교회 순교자) 김화 지석교회 김유해목사, 철원 월정교회 이운성전도사는 6.25와 한국 감리교회 순교자에 약간의 기록이 있지만 너무 빈약하여 다루지 않았습니다.

 

6. 박봉진목사(1890-1943)

 

박봉진 목사는 1890년 평택에서 태어나 16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717세가 되던 해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수원으로 나갔다가 거리에서 전도하던 청년을 만나 수원교회(현 종로 감리교회)에 등록하였다. 수원에서 금은방사업을 통해 재산을 많이 모았다. 1915년 성공한 사업가로서 고향 평택으로 돌아온 박봉진은 고향에 사업장을 마련하고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1917년 이명헌목사와 신학생 14명이 경기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평택에서 열린 집회에서 박봉진은 처음 성결교회와 만나게 되었다. 191931일에 촉발된 만세운동이 11월에 평택과 안성에서 일어났을 때 박봉진은 평택의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평택경찰서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석방된 박봉진은 192012월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전신)에서 파송된 공응탁 전도사와 함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후임으로 1923년에 부임한 김협두 전도사와 함께 교회당 건축에 나섰다. 신자들이 모두 가난하여 건축이 지지부진하자 박봉진은 건축비의 거의 전액을 헌금하여 그해 723일 평택 읍내에 평택성결교회당을 완공하고 봉헌예배를 드렸다. 평택성결교회의 집사였던 박봉진은 사업상 수원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곳에는 한국교회의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전도사가 개척하여 세운 수원성결교회가 있었다. 박봉진은 수원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이성봉 전도사의 설교를 들으며 깊은 감화를 받았다. 불같은 신앙의 소유자 박봉진은 이제 그의 생을 주님을 위한 삶으로 바꾸기로 작정하였다. 그의 결정은 1932년 나이 42세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장호원교회와 여주교회에 파송돼 목회를 하셨으며 19415월에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철원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합니다. 철원교회는 성결교회에서 일곱 번째로 세워진 교회로서 191411월에 배선표 전도사에 의해 개척되었다. 박봉진 목사는 일제의 경찰들이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을 알면서도 거침없이 설교하였다. 재림의 주이신 예수님 만이 경배 받으실 왕이었기에 신사참배에 대한 박봉진목사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설교를 트집잡아 연행과 석방이 반복되었다. 박봉진 목사는 527일 경찰서의 출두명령을 받았다. 형사들이 들이닥쳐 서재와 집안을 수색하여 설교 노트와 교회 서류들을 압수하였다. 유치장에서는 썩은 좁쌀과 콩밥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것이나마 유치장 안의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 이 놈아,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 나에게 묻지 말고 너희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 예수 재림은 곧 온 세상의 심판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도 예수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말인가?

 

- 천황폐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범하였으므로 천황 폐하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부인과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1943810, 더 이상 그들이 취조할 수 없을 정도로 박봉진 목사의 상태가 죽음의 문턱에 다달았을 때, 데려가라는 통고가 전해졌다. 박봉진 목사는 그 길로 하나님의 나라로 떠나갔다. 병원에 도착한지 엿새만인 1943815일 새벽 4시였다. 박봉진 목사의 설교 원고와 각종 글들은 유족들이 해방 후 남산에 있던 기독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한국전쟁시 불에 타서 모두 소실되었다. (철원성결교회 김창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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