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원호 명예목사 (국가보훈처)
(출처-http://blog.naver.com/asansarang/220088119940)
권원호(權元浩 ·1904. 8. 5 ~ 1944. 4.13·운동계열 국내항일)는 강원도 고성(高城) 사람이다. 강원도 회양감리교회(淮陽監理敎會)의 전도사로 있을 때 일제의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주일예배 시간에 완강히 거부했다가 1941년 10월에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1942년 1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옥중에서도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동방요배 등을 반대하다가 소위 불경죄(不敬罪)가 추가되었다. 1943년 11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형이 가형(加刑)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권원호 (權元浩) 인명사전,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한 전도사
(글 출처-http://search.kcm.co.kr/dic_view.php?nid=20060&key=8&kword=&page=)
1. 출생과 성장
권원호 전도사는 1904년 8월 5일(음)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신우리 평화스러운 농촌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권오방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04년 이라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물리친 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던 시기여서 권원호 어린이는 일찌기 기독교계에 들어와 중화읍교회 장로로서 봉사하며 나라를 걱정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신앙과 애국심으로 성장했다. 아침마다 드리는 가족 기도회에서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 주시고 이 민족을 왜인의 손길에서 구해 주소서...]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원호의 어린 가슴에는 애국심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더욱 주일학교와 밋숀 스쿨(당시 중화읍 교회에는 6년제로 경영하는 사립경의학교가 있었음)에서 받은 민족 교육은 장차 이 민족의 살길은 신앙 밖에 없다는 확고한 사상을 가슴깊이 배울 수 있었다. 1923년 (음력) 2월 7일 20세의 젊은이로 성장한 원호는 부모의 주선을 따라 윤치호의 장녀 순덕 양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 일에도 충실하며 평화스럽게 살아갔다.
2. 농민운동을 폈던 시절
그러나 당시 왜정의 토지수탈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농토에서 평안히 농사의 종사하며 살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왜인들은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한국인의 비옥한 농토를 수탈하는 바람에 한국인들은 보따리 걸머지고 만주로 가야 하였고 만주로 가지 아니하려면 산골로 들어가 석전(石田)을 개간하여 초식을 먹고 사는 화전민이 되어야 했다. 권원호도 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였다. 돌밭을 갈아 감자를 먹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조국 땅에서 이 백성을 깨우치며 왜인과 싸워야 한다는 애국 일념에서 황해도 신계군 사지면 막대리로 이주해 갔다. 막대리 견돌에는 주은동교회가 있어서 권원호는 교회 집사로 열심히 봉사하는 한편 밤이면 야학을 설립하여 남녀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는 일에 힘을 썼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왜경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여 다시 주거지를 옮겨야 하였다. 1931년 황해도 신계로 온지 2년 만에 이번에는 강원도 고성으로 갔다. 그는 고성감리교회(당시 담임자 이진구 목사)주일학교 교사 또는 청년회 회원으로서 청소년들에게 배일사상과 애국정신을 길러주기에 게을리 하지 아니했다. 담임 목사가 출타할 때에는 대신 설교를 맡아 했다. 병자나 낙심자 가정에 심방도 다녔다. 그의 뜨거운 기도와 열정어린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었다. 당시 고성구역은 고성읍 교회를 위시하여 장전교회, 온정리 교회, 추동교회 등 4교회로 조직이 되여서 담임 이 목사는 4교회를 돌보기 위해 늘 출타가 잦았다. 목사가 출타한 동안에는 권원호가 전도사 자격으로 일을 했다. 그는 그처럼 6년간의 교회 봉사를 통해 교역자로서의 자질을 착실히 쌓았다. 이제는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간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할 수 있게 되었다.
3. 교역의 길로 나서는 권원호 전도사
권원호는 1936년 4월에 모인 연회에서 원산지방 * 통천교회로 파송을 받아 목회를 시작했다. 권원호는 자신으로서도 각오한 바 있어 목회의 길로 나섰지만 담임 이진구 목사의 권고도 있어서 힘있게 나섰던 것이다. 그의 설교는 복음적이었고 애국적이었으며 그리고 부흥적이어서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아니해서부터 일약 부흥 설교가로 각광을 받았다. 한편 생각해 보면 권전도사는 목회하다가 그만 쉬어야 할 가장 어려운 시절에 오히려 교회를 담임해 갔다는데에 우리는 그의 신앙을 가이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하여간 권전도사는 6년을 하루같이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설교하고 심방하며 열심히 목회를 하였거니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면서 겨레에게 민족혼을 깨우치기에도 온갖 힘을 다했다. 1939년 5월 경성 정동제일교회에서 제7회 3부 합동 연회가 모였다. 연회에 참석한 권전도사는 가장 왜경의 박해가 심한 회양읍 교회로 자원해 파송을 받아 부임했다. 회양교회는 이봉운 전도사가 시무하다 왜경의 박해로 떠나 간 교회였다. 권전도사는 왜경의 감시나 박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힘을 내어 교인 가정을 심방했다. 왜경의 박해가 심하다는 것은 일본의 멸망이 가까왔다는 증거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민족을 깨우고 정신을 가다듬게 해야 한다는 것이 권전도사의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루도 쉴사이 없이 전도와 심방에 힘쓰며 배일 사상 고취에 있는 힘을 다했고 교회 봉사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1940년 8월 초에는 금강산 온정리 수양관에서 모인 원산지방 교역자 수양회에도 다녀왔다. 그는 동역자들에게도 하나님은 결코 이 나라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조국의 해방을 암시해 주기도 했다. 그의 그런 은밀한 민족운동을 왜경이 모를리 없었다. 드디어 왜경은 권전도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권전도사가 그런 강요에 응할리 없었다. 1940년 10월 초에 그를 구속하려고 가택수색을 하는 도중 그의 가정에서 태극기가 나왔다. 왜경은 권전도사를 구속하는 한편 교회중요 임원들의 가정도 수색하는 중에 역시 태극기가 발견되자 태극기 사건의 배후를 캐고자 하여 애를 썼으나 배후에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아니함으로 권전도사만 구소하고 2년 가까이 조사했다. 그러나 권전도사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통천교회- 권원호 전도사의 첫 파송된 통천교회에 관하여 :권원호 전도사의 사위되는 임청산 교수의 기록에 의하면 권전도사의 첫번 파송받은 교회가 통천군 흡곡면 명고리 통천교회라고 했고 크리스챤 신문에 소개된 권원호 전도사 순교 사화에도 통천교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통천교히는 통천군 통천면 서리 195-2에 있고 통천군 흡곡면 명고리에 있는 교회는 흡곡교회다. 한데 1937년도 연회록에 게재된 파송기에 의하면 통천교회와 흡곡교회는 모두 미파로 되어 있고 담임자가 파송되어 있지 않다. 당시 통천교회에는 지교회가 6개처가 있었고 흡곡교회에는 지교회가 7개처가 있었다. 그러니까 권전도사가 파송받아 간 교회는 통천교회의 어느 지교회든가 아니면 흡곡교회의 어느 지교회였을 것이다. (감리교 교회사학자 윤춘병 목사)
4. 결혼 (윤치호의 맏사위)
권원호 전도사는 당시 독립진영의 지도자이면서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개화운동을 진두지휘하던 윤치호의 장녀 윤순덕 여사와 20세에 결혼했다. 윤치호가 권 전도사의 기개를 얼마나 인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그러나 그의 굽힐줄 모르는 굳센 신앙과 나라와 겨레를 뜨겁게 사랑하던 정신은 이 민족의 가슴에 도도히 흐를 것이다. <윤영호기자> (출처-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067)
5. 순교자의 반렬에 오른 권전도사
권전도사에게 가하는 왜경의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물먹이기]등 가장 고약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태극기는 조국의 국기이므로 보관한 것이었고 신사는 우상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참배할 수 없다"는 것이 권전도사의 답변이었다. 백번은 심문해도 대답은 그 한가지 뿐이었다. 그 때마다 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권전도사가 심한 고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신도들은 경찰서를 방문하여 이제라도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승낙하고 어서 나오도록 하라고 종용하였다. 그러나 권전도사는 오히려 신도들을 책망도 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라"고 권고도 하여 신자들은 두번 다시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못했다.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왜경도 권전도사의 신앙을 꺾지 못하고 서울로 이송하여 재판을 받게 됐다. 드디어 권전도사는 1942년 1월 2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뤘다. 옥중에서도 그는 계속 같은 죄수들에게 전도하며 민족 사상을 고취하자 1943년 11월 10일에는 불경죄까지 가산시켜 징역을 1년 더 추가 선고했다. 그리고는 그를 독방으로 이감시켜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못하게 하는 한편 음식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오랜 고문과 영양부족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권전도사는 마침내 1944년 4월 13일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안으로 올라가 안가웠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그러나 그의 굽힐 줄 모르는 굳센 신앙과 나라와 겨례를 뜨겁게 사랑하던 정신은 이 민족의 가슴 속에 도도히 그리고 영원히 흐를 것이다.
▣ 중화읍교회 (출처-http://blog.naver.com/gaing6677/220815764608)
평안남도 중화군에 세워진 중화읍교회는 1897년 5월 13일 세워졌다. 평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 먹을 때 즈음 도착한다고 해서 ‘중화’라는 지명이 탄생됐다는 말이 있다. 중화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전도에 의해서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복음을 전해들은 김태로가 평양 장대현교회에 출석 후 지역주민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헌신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 스무 명이 넘자 이들은 평양까지 가서 예배를 드리기보다 자신의 마을인 중화에 교회를 세우자고 결의했다. 그들의 마음이 모여 초가로 교회가 세워졌고, 이듬해 열두 칸 초가 예배당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여덞 칸 기와집과 열 칸 초가로 교회는 부흥됐다. 중화는 중화읍교회보다 1년 먼저 세워진 대기암교회와 함께 지역 복음화에 헌신하게 된다. 1911년 장산동교회와 건산교리교회를 합병한 중화읍교회는 1911년 출석교인이 300명인 교회로 부흥한다. 교인 중에는 독립협회 회원인 이준배, 당시 중화군수였던 신대균도 있었다. 신대균 군수는 증화읍교회에서 학교를 세울 때 군청 소유 건물을 사용하게 하는 등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초기 중화읍교회는 그래함 리(한국명 이길함) 선교사가 사역했으며 그 다음 홀드크로프트(한국명 허대전) 선교사와 채정민 목사가 함께 사역했다. 이 지역 출신인 채정민 목사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7년 이성하(우리나라 최초 개신교 침례교인)와 최일형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다. 1898년 침례를 받은 그는 그래함 리 선교사의 조사로 평안도 중화를 비롯해 황해도 일대 교회들을 돌봤다. 1911년 평양장로회 신학교 졸업 후 그 해 목사 안수를 받고 중화읍교회로 부임해 1934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은퇴 후 평양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된 채정민 목사는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주기철·이기선 목사 등과 함께 강경파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했다. 채정민 목사는 1948년 우리나라가 건국 될 때 주일인 5월 9일 예정이던 제헌국회의원 선출 선거를 월요일인 5월 10일에 실시될 수 있도록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중화읍교회 출신 인물로 눈 여겨 볼 인물로는 신사참배를 강력히 거부하다 순교한 권원호 전도사가 있다. 권원호는 1904년 8월 중화읍교회 장로였던 권오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깊었던 권원호는 당시 중화읍교회에서 6년제로 운영하던 학교에 다니며 민족 교육을 받았다. 당시 왜정의 토지수탈로 고향을 떠나 주거지를 옮겨야 했지만 옮기는 지역마다 그 곳에 세워진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심과 애국심을 키워갔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목회자의 길로 나서 일본 경찰의 박해가 심하다는 강원도 회양읍교회에 자원, 목회자로 부임하게 된다.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권 전도사는 1940년 10월 자택에서 태극기가 발견된 혐의로 구속, 모진 고문 속에 1944년 옥중에서 순교를 당하고 만다. 중화읍교회에 부임했던 김선환 목사도 3·1만세운동과 관계되어 옥고를 겪기도 했다. 중화읍교회는 채정민 목사나 김선환 목사, 권원호 전도사, 독립협회 이준배 같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친일 분자도 있었다. 이 교회에 부임한 박응률 목사는 평양노회장이던 1938년 열린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평양·평서·안주 3개 노회 총대 35명을 대표해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했다. 그래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은 이렇게 결정됐다. 박응률 목사는 해방 후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1950년 북한정권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과 신사참배거부운동
(출처-http://blog.naver.com/dschoiword/110007737932)
반론자는 순천사건이 신사참배거부항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지적을 수용하는 반면에 자신이 이 사건을 신사참배거부로 수난을 당한 것으로 기술한 바 없고 "다만 '일제의 박해에 대한 한 저항의 유형'으로 보았을 뿐"인데, 필자가 오해하여 마치 "신사참배 거부항쟁으로 본 것처럼 주장하면서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건에 대한 일제의 판결문을《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의 증언》(1993)에 수록했을지라도 "그것이 그 사건을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을 당한 것으로 기술'한 것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 "문건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 책의 '부록'으로 수록했을 뿐"4)이라고 한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1. 동일범주, 대등 선상의 파악
김승태는 순천사건이 신사참배거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밝힌 바 없다. 반면에 두 사건을 같은 범주에 넣어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상호 비교한다. "대응유형"은 두 사건을 관련짓는 글로 시작한다. "경상도 지역 및 서북 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동과 함께 한국교회의 일제에 대한 저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5)고 한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일제 탄압에 대한 저항의 연구는 그 동안 많이 밝혀지고 언급되어 왔지만 아직도 역사적 사실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6)고 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가 순천사건이라고 한다.김승태가 인용, 열거하는 순천사건에 대한 자료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탄압을 받게 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다.《순천노회 50년사》(1972)가 순천사건을 "신사참배의 박해"라는 항목에서 다루고 있다고 소개한다. 순천사건을 신사참배거부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는 김춘배의《한국기독교수난사화》(1979)7)는 순천노회원들이 탄압을 받게 된 첫 번째 이유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신앙에 관한 문제로 그들[이] 천황 예배를 강요하고 주장하매 교역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반항하였다. 신사참배문제는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그들의 이른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주장하는 방편과 수단이기도 하였다"8)고 기술한다. 김승태는 "대응유형"의 맺음말에서도 순천사건을 신사참배사건의 범주로 파악한다. 신사참배라고 하는 저울에 무게를 달고 신사참배거부의 눈금으로 상호 비교, 평가한다. 순천교역자들이 (1) "신사참배에 대해서 겉으로는 '적응'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설교를 통하여 공언(公言)함으로써 그 행위(신사참배)가 가진 의미를 '무효화'시키고자 했다"9)고 한다. (2) 그들의 대응양상이 일제와 타협하고 신사참배에 순응했던 지도자들과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교회 밖에서 투쟁했던 경남지역 신사참배거부운동 그룹과 달랐다고 한다. (3) 신사참배거부운동이 교회 밖에서 투쟁한 것과는 달리 순천 교역자들은 "아무리 타락한 교회라도 그 안에 남아서 성도들을 보살피고 기독교를 변질시키려는 외부의 강요를 무효화시킴으로써 자신과 성도들의 신앙을 지켜가고자 하였다"10)고 한다. (4) 순천사건은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경상도와 평안도 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변질된 기성교회 조직을 파괴시키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려고 한 "교회분립운동"이었던 것과 달랐다고 한다. 시종일관 신사참배의 콘텍스트에서 신사참배거부항쟁과 순천사건을 등식화하고 비교 평가한다. 김승태는 위 네 가지에 근거하여, (5) 두 사건이 동일하게 "반일적"인 것이었지만, 후자는 전자와 달리 "반교회적"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6) 순천노회 피의자들이 절망의 시기에 설교를 통해 "일제의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무효화'시켜 나갔다"11)고 한다. 거짓된 이데올로기란 신사참배이론??천황제를 의미한다. (7) 순천교역자들이 1942년 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신사참배거부 때문이며, 신사참배를 행하는 총회도 그들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두 사건을 동일한 까닭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동일범주로 다루어 그 가치의 우열을 비교하여 평가한다. 순천사건을 신사참배거부로 파악한 것이다.
2. 신사참배거부항쟁자 명단
김승태가 순천사건을 신사참배거부사건으로 파악한 더욱 분명한 증거는 그가 작성한 두 개의 신사참배거부항쟁자 명단이다. "일제말기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과 한국기독교계의 대응"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이라는 작은 주제 하에서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과 "신사참배거부 권유운동"을 소개한다. 대규모의 조직적, 집단적 신사참배거부운동과는 달리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인 차원의 신사참배거부 저항은 전국 어디서나 있었다고 하면서, "교파별ㆍ지역별 신사참배거부항쟁자"(1994) 명단을 두 면에 걸쳐 실었다.12)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들을 신사참배거부운동자로 분류하는 명단이다. 순천사건의 김상두ㆍ김순배ㆍ김정복ㆍ김형모ㆍ김형재ㆍ나덕환ㆍ박용희ㆍ박창규ㆍ선재련ㆍ선춘근ㆍ오석주ㆍ양용근을 신사참배거부로 인해 순교한 이기풍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이름과 함께 포함시킨다. 순천사건으로 순교한 양용근 목사를 신사참배거부항쟁자로 표기하고, 정확성을 기하여 그의 옥사 날짜까지 밝힌다. "양용근 목사(1943.12.5 옥사)"라고 기록하면서 "신사참배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다고 한다"13)고 한다. 김승태는 또 이 명단에 대한 설명에서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14)고 한다. 김승태는 일제 말기 한국기독교의 존재양태와 행동방식을 정리, 요약하는 글에서도 순천사건을 신사참배와 직결시킨다. 강압적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한국교회의 순수 신앙이 왜곡되고 박해받는 위기 상황을 겪고 있었다고 지적하고서 "우리는 이 시기에 한국기독교가 두 가지 상반된 행동 양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저지른 친일ㆍ부일 행각과 민족정신과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행적이 그것이다"라고 한다. "교회 지도급 인사들, 제도적 교회, 기독교 기관들이 친일ㆍ부일적 행위를 보여준 반면에 소수의 무명의 신앙인들은 주로 지방에서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을 폈던 것이다"15)고 한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가 심한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신사참배반대운동자"(1991) 명단도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들을 포함시킨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언급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 교파별, 지역별 분포"를 상세히 언급한 다음에 "신사참배반대운동자" 명단을 싣는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의 수를 "149명"으로 헤아려 구체적으로 명기하면서 순천 수난교역자들의 이름을 기록한다.16) 김승태는 1991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들을 신사참배거부항쟁자로 분류했다. "교파별ㆍ지역별 신사참배거부항쟁자"(1994)는 "신사참배반대운동자"(1991)를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박창귀"와 "황두현"을 "박창규"와 "황두연"으로 고쳐 쓴다. 황두연은 신사참배거부 항쟁자이며 순천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신사참배거부로 순교한 박연세 목사와 순천사건으로 순교한 양용근 목사를 함께 기록하고 그들의 옥사 날짜를 기입하며 신사참배거부항쟁자 이기풍과 이우식의 이름을 추가로 기입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반론자가 순천사건을 신사참배거부 항쟁사건으로 파악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3.《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의 증언》부록
"전남 순천노회 박해사건 판결문"을 부록으로 수록한《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의 증언》의 편집(editing)을 보면 그 "문건의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 책의 '부록'으로 수록한 것일 뿐"17)이라고 하는 말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수난자들의 법정 증언 및 재판기록" 4개를 부록으로 수록한다. 총 13가지 문헌 가운데서 "전남 순천노회 박해사건 판결문"을 열 번째로, 부록의 첫 번째로 싣는다. 부록의 순서는 통상적으로 중요성에 따라 정해진다. 위 판결문 다음에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인 "출옥성도 손양원 목사 신문조서 및 판결문," "옥중 순교자 권원호 전도사 신문조서," "옥중 순교자 박연세 목사 판결문"을 차례로 싣는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싣는다면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 설명과 함께 마지막에 실을 수도 있다. 김승태는 이 책의 서문에서 신사참배문제가 대두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판결문을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의 저항 문헌으로 간주한다. 순천사건을 신사참배거부와 직결시킨다. "신사참배거부항쟁자를 특별한 성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명한 신학자,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몸을 움츠리거나 아부하고 있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을 우직하게 지킨 자들의 저항과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이 남긴 자료를 한데 모아 편찬한다"18)고 한다. 순천사건에 대한 판결문을 신사참배거부항쟁 문건으로 파악한다. 김승태는 판결문에 대한 해설에서도 그 문헌이 신사참배거부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관련이 없는 문헌을 단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싣는다면 간단한 설명이라도 덧붙여 그 까닭을 밝히는 것은 상례이다. 주목할 것은 판결문을 위 책의 부록으로 편집하던 시기이다.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들을 포함시킨 "신사참배반대운동자" 명단(1991)과 "교파별ㆍ지역별 신사참배거부항쟁자" 명단(1994)을 편집하던 때 위의 책을 편집했다. "대응유형"을〈복음과 상황〉(1992)과《서암 조항래 교수 화갑기념 한국사학 논총》(1992)에 기고하고, 또《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1994)에 수록하던 때이다. "교파별ㆍ지역별 신사참배거부항쟁자"(1994) 명단을 작성한 것은 위 책을 편집한 후이다. 1991년과 1994년 사이에 저술한 논문과 책에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들을 신사참배거부항쟁자 명단에 포함시킨 것은 그가 판결문을 위 책에 실은 것이 단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 한국 감리교 역사 (출처-http://blog.naver.com/ansanman33/10045233810)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 이후 한국 감리교회는 ‘자치교회 시대’를 열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 설립 취지로 위와 같이,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의 3대 원칙을 선포하였으며 신앙 및 신학 원리로 8개조“교리적 선언”과 16개조“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회 구성을 평신도와 성직자 동수로 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여성 성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1931년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0년대 한국교회가 점차 신앙적 영성과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을 때,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으며, 그의 신앙과 삶은 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한국 교회가 진보·보수 신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겪는 중,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던 정경옥 목사는‘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했고, 경건적 신앙 실천을 바탕으로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했던 변홍규 목사는 보수적 신학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일제 말기 교회는‘큰 수난에 처하여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국가 종교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고,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3년‘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가 1945년 7월 말‘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앙양심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앙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예산제일교회 청년·학생들이 ‘학생속회’를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모곡교회의 민족운동가 남궁억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홍천과 춘천 지방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십자가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리고 동부연회의 철원읍교회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등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옥중 순교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8·15해방의 기쁨은 잠시, 남북이 분단되면서 38선 이북에 있던 교인들은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과 함께 극심한 수난을 받게 된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철원에서는 장흥교회 청년들이 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결국 북한에 있던 많은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고, 이후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겪은 후 남과 북 사이에 정치·문화·종교적 갈등과 대립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러한 민족의 분단상황에서 교회는 내적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감리교회도 해방 직후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시작으로 1954년, 1970년, 1974년에 각각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합동함으로‘하나된 감리교회’전통을 이어 나갔다. 전쟁 후 감리교회는 미연합감리회 선교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재건과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1964년 김활란, 홍현설의 발의로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초교파적 대중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고, 1974년 시작된 ‘5천 교회 1백만 신도운동’과 1987년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은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세가 1984년에 90만 명, 1996년 현재 7개 연회, 국외선교연회, 서부연회, 183개 지방, 4,700교회, 135만 명 교인을 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 볼리비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65년 ‘감리교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태평양 동아시아 지역, 1980년대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199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옛 공산권 지역으로 선교가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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