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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근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16. 10. 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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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감리교 동부연회 본부 순교자 부조

원주 감리교 동부연회 본부 순교자 부조

 

양지 순교자기념관 순교비 

강종근 목사

 

강종근 목사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63일 이었다. 윤희성 여사는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장로로서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던 고 강 목사는 지난 8년간 강 목사의 제자이자 장남 서웅 씨의 친구인 이창건 박사의 노력 끝에 2003815일 뒤늦게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리고 2006.11. 국립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이 거행됐다. 예식을 치룬 뒤 이 박사는 오늘 뜻 깊은 자리까지 오게 돼 감격스럽다고 강종근 목사를 위해 감리교회 모두가 기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종근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자가 된 첫 번째 목회자이다. 감리교회는 신사참배에대해 순응하는 입장이였으나 강종근목사 등 소수의 신앙인들은 신앙과 민족을 지키며 수난과 죽음을 당했다. 강종근목사는 평남 강서군의 강영동과 박형옥의 4형제중 막내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그가 2살 때 돌아가시고 가난한 집안을 어머니가 책임지셨다. 그는 어머니를따라 예수를 믿게된다. 그의 가족은 한일합방과 함께 만주 봉천의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삼광학교와 철영 육영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이동교회를 다니며 최학규전도사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최학규의 추천으로 강종근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더욱 굳어졌으며 졸업후 1925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29년 졸업한다. 재학중이던 26년 윤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그는 1933년 경성지방 창동구역에 파송받아 목회를 시작하였고 그의 사역기간 크게 부흥하였다. 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구역에 파송되어 목회했고 38년에는 창도교회, 39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철원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철원제일교회는 강원도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때 박연서목사를 중심으로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교회로 이런 발자취는 선교적으로도 큰 부흥을 이룰수 있었다. 36년에 기공해서 지었던 예배당은 한강이북에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은 30년대 후반부터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갔고 신사참배는 교회에게 큰 어려움이였다. 감리교회는 38년 이후로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했으며 39년 정춘수목사가 감독이 되면서 혁신교단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예속되었다. 이런 시대배경에도 불구하고 강종근목사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하며 민족을 향해 손을 펴야한다는 설교 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민족도 해방의 때가 올것임 선포하며 이겨내기를 선포했다. 연천교회에서도 창도교회에서도 철원제일교회에서도 그의 외침은 약해지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그는 끝까지 거부하여 일본 경찰의 표적이 되었다. 1940930일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이 검거되었고 강종근목사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일본은 강목사를 조용히 서울로 이송하고자 했지만 성도들은 새벽녘에 철원역에서 찬송으로 떠나는 목사를 배웅했다고 전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중 건강이 악화되었고 194263일에 06나는 기뻐라는 말을 아내 윤희성에게 남기고 순교하셨다. 강종근목사의 유족은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아들의 친구인 이창건박사가 강목사의 재판기록을 찾아내어 2003년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출처- 장흥교회 한찬희 목사)

 

 

 

감리교 금촌묘지에 남아있는 강종근 목사 묘비, 유골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 되었다.

(출처-https://kmc.or.kr/news-kmc?uid=70885&mod=document&pageid=1)

 

감리교 금촌묘지에 남아있는 강종근 목사 묘비, 유골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 되었다.

(출처-https://kmc.or.kr/news-kmc?uid=70885&mod=document&page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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