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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 기념관 1 (병천)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17. 5. 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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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 기념관

 

유관순열사 탄신100주년을 맞아 2003년 4월 1일 개관한 기념관에는 열사의 출생에서 옥중 순국까지의 열사일대기가 전시물과 함께 영상물로 꾸며져 이곳을 찾는 많은 참배객들에게 당시의 상황과 열사의 정신을 재조명해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한 열사가 벽에 서서 고문받는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보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체험공간을 마련 산교육의 장소가 되고 있다.

 

 

 

 

 

 

 

 

 

 

 

 

 

 

 

 

 

 

 

 

 

 

 

 

 

 

 

 

 

 

 

 

 

 

 

 

 

 

 

 

류관순 열사

 

류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 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의 10대손으로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 군 동면 용두리 (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열사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인사로서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 운동자입이다. 류 열사는 어릴 때부터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닌 기독교신자로서 본래부터 총명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시켰다. 1919년 3월 1일 만 17세의 소녀의 몸으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 하였다.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동년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우내장날인 4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안, 연기, 청주, 지넌 등을 누비며 계획하였다. 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불을 신호로 아우내 장터에 수천명이 모였고 열사께서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로 류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였고, 류열사도 부상을 입은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되었다. "한국인으로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을 수 없다." 고 항거하여 3년형을 받았으나 복심 법원에서 법정 모독죄로 처벌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8월 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부르다 헤아릴 수 없는 폭해와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목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고 1972년 10월 14일에 봉화지와 생가지를 사적 230호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가 “한국 독립을 위해 싸운 10대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유관순(1902~1920) 열사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29일 인터넷판 첫 페이지에 실은 기사에서 “1851년 창사 이래 <뉴욕 타임스>의 부고 기사(obituary)는 주로 백인 남성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주목할 만한 여성들을 추가하려 한다”며 유관순에 대한 기사를 쓴 이유를 설명했다. <뉴욕 타임스>는 “1919년 봄, 한국의 독립을 위한 평화적 시위가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민족의 집단적 자유를 갈망하는 운동의 얼굴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유관순이 이화학당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고향 충남 천안에 독립선언서를 반입해 만세운동을 이끈 것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고문을 당하면서도 수감자들의 석방과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기개를 보였다고 전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던 발언도 소개했다. 1920년 9월28일 순국 직전에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사실도 전했다. 기사는 이어 유관순의 출생과, 당시 개화한 그의 집안 분위기, 이화학당에 진학한 배경도 소개했다. 또 유관순의 집안이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했다고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2015년 8월에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식민 지배를 반성한 일도 전했다. 이 기사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015년 이화여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유관순 열사를 언급하며 폭력이 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들의 기억과 이상을 죽일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그를 잔다르크에 비유했다고 전했다.

(출처-http://v.media.daum.net/v/20180329224604348?rcmd=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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