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 탄신100주년을 맞아 2003년 4월 1일 개관한 기념관에는 열사의 출생에서 옥중 순국까지의 열사일대기가 전시물과 함께 영상물로 꾸며져 이곳을 찾는 많은 참배객들에게 당시의 상황과 열사의 정신을 재조명해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한 열사가 벽에 서서 고문받는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보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체험공간을 마련 산교육의 장소가 되고 있다.
류관순 열사
류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 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의 10대손으로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 군 동면 용두리 (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열사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인사로서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 운동자입이다. 류 열사는 어릴 때부터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닌 기독교신자로서 본래부터 총명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시켰다. 1919년 3월 1일 만 17세의 소녀의 몸으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 하였다.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동년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우내장날인 4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안, 연기, 청주, 지넌 등을 누비며 계획하였다. 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불을 신호로 아우내 장터에 수천명이 모였고 열사께서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로 류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였고, 류열사도 부상을 입은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되었다. "한국인으로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을 수 없다." 고 항거하여 3년형을 받았으나 복심 법원에서 법정 모독죄로 처벌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8월 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부르다 헤아릴 수 없는 폭해와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목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고 1972년 10월 14일에 봉화지와 생가지를 사적 230호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가 “한국 독립을 위해 싸운 10대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유관순(1902~1920) 열사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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