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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구리온

성지순례/이스라엘

by baesungsoo 2021. 8. 2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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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이익상 목사, <iframe src="https://www.facebook.com/plugins/post.php?href=https%3A%2F%2Fwww.facebook.com%2Ficksang.lee%2Fposts%2F4465884556807937&show_text=true&width=500" width="500" height="746" style="border:none;overflow:hidden"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fullscreen="true" allow="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picture-in-picture; web-share"></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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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유석회 |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총리) [그루엔] - Daum 카페)

 

본명은 David Gruen.

1886. 10. 16 러시아 폴란드 폴론스크(지금의 폴란드에 있음)~1973. 12. 1 이스라엘 텔아비브야포. 시온주의의 정치가, 정당 당수.

이스라엘의 총리(1948~53, 1955~63)와 국방장관(1955~63)을 지냈다. 19485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카리스마적인 성격과 투쟁정신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에서도 은퇴한 후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되었다.

태어나서 데이비드 그루엔이라는 작명을 받은 벤 구리온의 아버지 빅토르 그루엔은 동유럽의 억압받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옛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을 보급시켰던 운동 집단인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플론스크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시온주의는 소년 데이브드 그루엔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는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을 원하는 유대인들이 제1단계로 해야 할 일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민가서 농부로 정착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90620세의 청년 그루엔은 팔레스타인에 도착해 수년 동안 팔레스타인 북부의 해안평야와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 농민 부락에서 농부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대 히브리어의 이름인 벤 구리온을 사용했다. 말라리아와 굶주림을 포함해 초기 개척자들의 온갖 고초를 다 겪었지만 그는 한번도 목적의식을 잃지 않았다. 시온주의 중심의 사회주의 정당인 시온 노동자당이 당의 강령 속에 "당은 이 땅에서 유대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를 갈망한다"는 선언을 삽입한 것은 벤 구리온이 힘쓴 결과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투르크의 팔레스타인 지방 총독들은 벤 구리온의 시온주의 운동에 의구심을 품게 되어 그를 체포한 뒤 오스만 제국 밖으로 추방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뉴욕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태생의 폴린 먼웨이스를 만나 결혼했다. 1차 세계대전 종반에 영국이 투르크를 대신해 중동을 지배하게 되자, 유대인 정착자들과 해외에 거주하는 그들의 친구 및 지지자들은 장차 시온주의가 미국 내의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유대인 집단들에 못지 않게 영국에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가 1917112일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민족의 고향'을 만들어줄 것을 약속한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 후, 그는 영국 육군의 유대인 군단에 지원해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에 가담하기 위해 중동으로 귀항했다.

유대인 군단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영국이 이미 투르크군을 격퇴한 후였으며,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위임받았을 때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이루기 위한 작업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벤 구리온에게 있어 '민족의 고향'은 정치적 독립으로 향하는 한 단계였다. 그 실현을 위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가속화할 것을 촉구했는데, 그것은 유대인 국가 건설의 토대 역할을 할 유대인의 핵집단을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그 핵집단이 1920년 팔레스타인에서 벤 구리온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창설된 유대인 노동자 동맹인 히스타드루트(Histadrut)였으며, 벤 구리온은 이 동맹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히스타드루트는 사회·경제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안보 분야에서까지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하여 '국가 안의 국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10년 후인 1930년에 다수의 노동자 집단이 연합해 이스라엘의 노동자 정당인 마파이(Mapai)를 창립하고 벤 구리온을 당수직에 앉혔다. 1935년에 그는 국제 시온주의 운동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온주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의 위원장 겸 운동의 행정기관인 유대인협회(Jewish Agency)의 국장으로 선출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정착이 그 뿌리를 강화해감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에서 불안이 고조되었으며, 그결과 두 공동체 사이에 무력 충돌들이 발생했다. 1939년 영국은 중동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유대인에 대한 동조적인 입장을 버리고 친아랍 노선을 채택했으며, 그결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과 정착은 심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벤 구리온은 이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 대항해 일어서라고 유대인 공동체에 촉구했으며, 이에 따라 '싸우는 시온주의'10년기가 시작되었다. 1942512일 뉴욕에서 그는 미국 내 시온주의자들의 비상회의를 소집했으며, 그 대회에서 전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화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벤 구리온은 다시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19485월 국제연합(UN) 총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지원하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었다.

데이비드 벤 구리온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선출되었다. 우익과 좌익을 다 같이 격앙시킨 국내의 정치 투쟁을 통해 그는 영국군을 상대로 싸웠던 지하 군대 조직들을 해체해 하나의 국민군으로 융합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국민군은 성숙해져가는 이스라엘 국민의 모델 겸 상징이자 시리아·요르단·이라크·이집트로부터 침략하는 아랍군들을 격퇴하는 유력한 전투력이 되었다. 싸움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랍측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국가와 공식적인 평화협상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벤 구리온은 신생국을, 2,000년 전 로마 군단들이 히브리의 자유 투사들을 진압하고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단절되었던 유대 역사의 직접적인 재개로 간주했다. 그는 유대인의 망명기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의 장기화된 막간으로 보았으며, 이제 유대인은 본래의 고향을 되찾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생 국가의 강화와 발전을 위해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세계로부터의 대규모 이민의 흡수, 사회적 배경이 다양한 신참자들의 동화, 통일된 공립교육제도의 창설, 사막의 정착화 등을 제시했다. 외교 정책에서 그는 독자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택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국방정책이 확고해, 인접 아랍국가들의 휴전협정 위반에 군사적인 보복으로 대응했다. 그의 강경책은 미국과 영국 정부로부터 거의 동조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양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로 인해 아랍의 석유수출국들과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양국은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카임 와이즈만이나 벤 구리온이 공직에서 잠시 은퇴했을 때 단기간(1953~55)의 총리로 선출되었던 모세 샤레트와 같은 보다 온건한 지도자를 선호했다. 소련은 중동에서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스라엘을 따돌리고 아랍 국가들에게 막대한 양의 무기를 제공했다. 그때 벤 구리온은 프랑스에서 우군을 발견했다. 알제리 전쟁 중에 프랑스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이끄는 아랍 연합전선의 대항에 부딪혔으며, 따라서 상당량의 군장비를 공급하면서 이스라엘과 보다 가까워졌다. 19567월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프랑스는 이집트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 원정에 이스라엘을 가담시켰다(수에즈 위기). 19561029일 벤 구리온은 비밀리에 프랑스를 방문해 프랑스와 영국의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진 후 군에게 명령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게 했으며, 그 사이 프랑스와 영국은 운하의 점령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그후 이스라엘은 티란 해협에서의 운항의 자유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의 평화 정착을 위한 UN 특별감시단의 배치를 보장받은 후 시나이로부터 철군했다.

시나이 원정 이후 이스라엘은 외교와 경제의 번영기를 맞이했다. 벤 구리온은 1963년까지 행정 수반직을 계속 맡았다. 공직생활 만년에 벤 구리온은 중동의 평화 수립을 목적으로 아랍 지도자들과의 비밀 회담을 위한 몇 가지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19636월 벤 구리온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일신상의 이유'로 돌연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의 사퇴가 부분적으로는 당내의 그의 지지자들과 정적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내분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한데, 정적들이 처음으로 그에게 반기를 든 것은 이스라엘의 사주로 이집트에서 일어난, 미국과 영국의 재산 파괴 활동을 골자로 하는 1954년의 '자본 사태'의 정치적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 사태는 벤 구리온으로 하여금 1965년 다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마파이에서 탈당해 소수 의석의 야당 라피를 창설하게 했는데, 라피의 당수로서 그는 자기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레비 에슈콜을 상대로 싸웠지만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970년 벤 구리온은 크네세트와 일체의 정치 활동으로부터 은퇴하고 네게브 지방의 한 키부츠인 스데보케르에서 회고록의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많은 저서를 출판했는데, 대부분이 연설과 수필을 모은 것들이었다. 생애에 있어서 그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에 관한 조사와 성서의 연구에도 힘썼는데, 성서 연구는 그것이 그의 이상들을 끌어낸 원천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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