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랜튼 대부인 (1832.12.9.- 1909.10.8.)
스크랜턴 대부인은 1832년 12월 9일 미국 메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뉴잉글랜드 감리교 목사인 에라스투스 벤턴(1805∼1884)이었다. 메리 플레처란 그의 이름은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와 함께 활동했던 18세기 영국 감리교회 여성 지도자 ‘메리 모상케 플레처’의 이름에서 땄다. 메리는 21세 되던 해인 1853년 부친이 목회하던 뉴헤이븐의 24세 청년 실업가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3년 만인 1856년 5월 29일,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부부는 아이에게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기의 몸 속에는 뉴헤이븐 시의원을 지낸 할아버지의 피와 미국 감리교회 뉴잉글랜드 연회에서 50여년을 목회했던 외할아버지의 피가 섞여 흐르게 됐다. 스크랜턴은 뉴헤이븐 시의원을 지낸 할아버지와 제조 판매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당시 예일대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였던 중등과정의 홉킨스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홉킨스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1871∼73년 사이에 가족과 관련된 많은 일이 일어났다. 1년 간격으로 친가와 외가 어른들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아버지가 42세의 나이로 별세한 것과 스크랜턴 가문의 명예였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16세 소년 스크랜턴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결혼 20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메리 스크랜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시아버지를 1년 사이로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겪었다. 41세의 나이로 홀몸이 된 메리 스크랜턴은 이후 아들의 학업을 뒷바라지 하면서 교회 봉사와 선교활동에 많은 시간과 관심, 노력을 기울였다. 그 즈음 메리는 미국 감리교회 여성해외선교단체인 ‘해외여선교회’ 조직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뉴헤이븐의 해외여선교회는 뉴헤이븐제일교회 여성 교인들이 주도했는데, 메리 스크랜턴은 뉴헤이븐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874년 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돼 지방 해외여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메리 스크랜턴이 지회 임원으로 활동하던 이 시기에 바로 로버트 매클레이 박사가 뉴헤이븐제일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했다는 점이다. 매클레이는 1884년 서울을 방문해 한국 선교의 문을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감리교 선교사로, 그에겐 ‘극동아시아 감리교 선교의 개척자’란 칭호가 있었다. 매클레이는 1848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23년간 활동 후 1871년 안식년 휴가를 얻어 뉴헤이븐에 와 있었다. 이 시기에 메리 스크랜턴은 매클레이를 통해 극동아시아 선교에 관한 정보와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2년 후인 1885년 매클레이와 스크랜턴, 두 가족은 일본에서 다시 만나 한국 선교 개척을 추진했다. 1878년 예일대를 졸업한 윌리엄 스크랜턴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뉴욕으로 갔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은 어려서 티푸스를 앓았을 때 간호하던 어머니에게 “나중에 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약속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리 스크랜턴도 뉴욕으로 옮겨 와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면서 뉴헤이븐에서처럼 해외여선교회 지회 및 지방회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이 소속했던 뉴욕지방회는 뉴잉글랜드 지방회 다음으로 조직된 지방회로,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후에 메리 스크랜턴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되자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박사(M.D.) 학위를 받은 1882년, 스크랜턴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결혼과 병원 개업이었다. 스크랜턴은 그해 6월 6일, 26세의 나이에 코네티컷 주 노리치에서 22세 루이자 암즈와 결혼했다. 루이자는 영국에서 뉴잉글랜드로 이민한 초기 청교도의 후예이자 코네티컷 지역의 종교·언론계를 대표하는 집안이었다. 결혼한 이들 부부가 자리를 잡은 곳은 미국 중북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였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도 동행했다. 결혼 1년 후엔 첫째 딸 오거스타를 얻었다. 가족은 클리블랜드제일교회를 다녔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은 청년회 지도교사 외에 주일학교 부교장과 속장으로 활동했으며 교회 여성 선교단체인 부인조력회와 해외여선교회, 국내여선교회 회원 및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여기서 잠시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 대해 알아보자. 선교회는 1869년 3월 보스턴 지역 감리교 여성신도 8명이 모여 미 감리회 여성들이 외국에 여성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토착민 교사들과 전도자들을 후원하는 일을 연합해 추진하기 위해 창설됐다.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선교운동 목적 외에도 여성의 사회참여운동에도 힘썼다. 당시 미국 여성들에게 제한됐던 참정권과 정치, 사회 활동 참여를 확대해가는 가운데 교회 여성들도 남성들이 주도했던 해외선교 영역에 참여해 ‘독자적인’ 여선교사 파송과 지원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보스턴에서 첫 조직이 탄생한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뉴욕과 뉴저지, 신시내티 등 교회에 지회가 설립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리하여 1년 만에 미국 주요 도시의 거의 모든 교회들에 지회가 설립됐고 창립 10년 만인 1879년에 이르러서는 8개 지부로 확산됐고 지부 산하에 30∼50개 지회가 있어 매년 8만 달러 규모의 선교비를 모금해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했다. 메리 스크랜턴이 속했던 클리블랜드에서는 1870년 해외여선교회 지회 및 지방회가 조직됐다. 메리 스크랜턴은 단순히 해외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회비를 내는 회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해외여선교회 지회나 지방 모임에 강연자로 참석해 회원 가입을 독려하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렇게 적극적인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선교사역, 특히 은둔국인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출처]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 (1)~(10) 선한 사마리아인 꿈을 안고 오다|작성자 KGM의 문화광장

스크랜턴 대부인과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출처-4대문 밖 가난한 천민들의 친구 스크랜턴 선교사의 동대문 교회, 578주째 예배 드려 < 교회 < 기사본문 - 웨슬리안타임즈)
여성 교육에 섬김을 이어온 메어리 스크랜튼. 그녀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흔히 스크랜튼 대부인이라 불리는 스크랜튼의 어머니는 정동 자신의 집에서 고급관리의 소실이며, 언젠가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며 영어를 배우러온 김 부인을 첫 번째 학생으로 맞아 여학교를 운영했다. 이 여학교가 바로 1886년 5월 31일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으로 이후 오늘의 이화여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1887년에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 당명을 하사받았는데, 이화는 ‘배꽃처럼 희고 아름다워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메어리 스크랜튼은 1892년까지 이화학당을 돌보며 교육사업을 통해 불평등 사회와 삶의 억압 속에 살던 여성들에게 자기 계발과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또한, 당시 남녀가 함께 집회를 열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성경공부 형태로 추진되는 여성들만의 주일학교를 조직하였다. 메어리 스크랜튼은 1892년 5월에 미감리회 여선교부가 주관하던 동대문선교사업에 합류해 여성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894년에는 선교지역을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겨 달성궁 매일학교인 일명 공옥여학교를 설립해 여자아이를 가르쳤다. 그리고 1890년대에는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성경교육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1900년 어간에는 부인성경학원으로, 1920년에는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했다. 메어리 스크랜튼의 선교활동은 지방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1894년 수원과 오산 등 경기도 남부지역의 순회전도를 시작으로 1896년에는 시흥, 과천, 고양, 동막, 용시, 양천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그녀는 나이가 많음에도 대단한 열정을 가진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이며,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였다. 75세까지 현장에서 일한 그녀는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소천해 양화진에 묻혔다. (출처-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1890년대 말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감리교 여자해외선교회의 동대문 선교지구의 모습 - 파란색 진료소와 빨간색 예배당 -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제공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
<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양화진 외국인 묘지 >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선교사 묘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선교사는 이화학당(현 이화대학교) 설립자이며,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1885년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사업(교육, 선교)의 선구자중 한사람이었다. 다년간 충실히 봉사하고 그가 선택한 한국에서 많은 좋은 일들의 향기와 기억을 남겼다.”고 에비슨 박사는 추모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 참조-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이화학당>

초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옛 이화학당 정문과 심슨관.
이화학당을 개설한 후 1888년 선교보고에는 ‘강한 어머니’ 메리의 불안이 잘 나타나 있다. ‘군중이 몰려와 아이들을 유괴해서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며 우리를 죽이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금도 낙담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밤 (선교)금령이 내려져 있는데도 한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매일 와도 되는지요. 허락해 주세요. 좋은 말씀 듣고 아름다운 노래 들을라치면 마음이 가벼워져요”라고 말했다.’

이화학당 (출처-이 땅을 사랑한 예수의 증인들, 조선 여성을 일깨운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저장 - 파일썬)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기념비 (이화학당)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기념비 (이화학당)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초기 이화학당 학생들

초기 이화학당 학생들과 교사,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맨 우측 마지막 줄)

이화여자대학교 메리 스크랜튼 설립자 흉상
1. 이화학당 시대 (1886~1910)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19세기 말, 한국사회에는 근대화의 여명, 개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은 여전히 봉건적인 틀에 갇혀 억압 받는 인고의 삶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때, 이화학당이 문을 연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여성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전혀 허락되지 않았던 인습을 깨고, 남성들조차 접하기 힘든 신교육의 기회가 당당히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화학당의 출발은 한국여성이 받은 은총이었고, 한국여성의 발전은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최초의 한옥교사

1887년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녀관

인체생리학 교과서 (조세핀 페인 총장)

이화학당 초기학생들

이화학당 수업광경

1908년 중학과 1회 졸업생

1908년 창립기념행사
2. 대학과 시대 (1910~1925)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1910년, 한일합병조약 조인으로 기울어 가던 국운은 막을 내립니다. 이 망국의 한을 박차듯이 이화학당에는 대학과가 설치되었습니다. 사회 일반은 물론, 동료 선교사들조차 한국에서 여성고등교육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프라이 당장은 대학과와 유치원 사범과를 설립해야 한다는 신념에 불타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조혼풍습으로 지적·신체적으로 성숙되기 전의 어린 여성들이 가정에 갇혀야 했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룰루 E. 프라이 당장은 한국여성에게 보다 광범위한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바로 질 높은 교육을 받은 한국 여성 지도자 배출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예상과 기대는 적중했습니다. 이화 학생들의 향학열과 소명감으로 1914년부터 1925년까지 배출된 대학과, 대학예과, 유치원 사범과를 졸업한 이화의 졸업생들이 이땅의 근대화 과정의 제1세대 여성지도자군을 이루어 뚜렷한 업적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대학과를 설립한 제4대 룰루 E. 프라이 당장

대학과시대 학생 단체사진 (1910)

대학과 제1회 졸업생 (신마실라, 이화숙, 김애식 1914)

대학과시대 선생님과 학생들

대학과 전용건물 프라이홀 (1923)
3. 전문학교 시대 (1925~1945)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의 대학과가 목표한 것은 선진국들이 실시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대학교육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화학당 대학과를 각 교파가 공동후원하는 기독교연합여자대학으로 성장시키려는 논의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대학교육 기회를 제한하려는 일제 식민지교육정책으로 말미암아 이화는 대학의 꿈을 접어두고 전문학교 인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당 내에서는 대학이 전문학교로 격하됨을 슬퍼하기도 했으나,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정식출범은 전국에서 고등교육을 갈망하던 여학생들의 열렬한 호응과 기대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전문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지는 삶을 스스로 택하는 특별한 것이었고, 이화여전 출신들은 식민지하의 한국 사회 여성 선각자로서 각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전문학교를 설립한 제6대 앨리스 R. 아펜젤러 교장

4개 국어로 진행된 수업

정동 채플

신촌캠퍼스 이전 (1935)

신촌캠퍼스 전경 (1935-1949년)

신촌캠퍼스 복구 (1953-1959년)

2000년- 현재 이대캠퍼스
(학교연혁)
1886.05.31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 여사가 서울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학생으로 수업 개시
1887.02 고종황제로부터 [이화학당] 명칭 하사
1904 중학과 설치
1910 대학과 신설
1912 보통과·고등과·중학과 및 대학과 설치
1914 이화유치원 신설, 대학과 1회 졸업식
1915 유치원 사범과 설치
1917 중학과를 대학예과로 개칭
1918 고등과, 보통과를 이화학당에서 분리하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보통학교로 11월 1일 개교
1922.10 제6대 이화학당장에 앨리스 R. 아펜젤러 당장 취임
1925.04 대학과 및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고 문과 및 음악과 신설

제7대 김활란 교장 취임 (1939)

재단법인 이화학당의 설립 (1943)
(역대총장)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제 1대 메리 F. 스크랜튼 (1886.05 ~ 1890.05)
미국감리회해외여선교회(W.F.M.S.) 최초의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1885년 조선에 건너와 1886년 서울 정동에서 한 명의 여학생과 함께 최초의 근대식 여성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의 여성 교육사와 여성 근대사를 이끈 이화의 위대한 시작이었다. 제 1대 당장을 맡은 스크랜튼 선생이 주력한 것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인습에 얽매여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소녀들을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남녀간 내외로 인해 남성의사들을 기피하는 여성들을 위한 전문 진료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梨花學堂)’과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이 설립되었다. 스크랜튼 선생은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라는 신념 아래 한국인을 외국 환경에 맞도록 변화시키기보다 한국적인 것에 대해 학생들이 긍지를 갖도록 교육하였다. 그가 뿌린 교육의 씨앗은 이 땅의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이 여성임을 긍정하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뜻깊은 미래로 이어졌다.

제 2대 루이자 C. 로드와일러 (1890.05 ~ 1892.06)
제 2대 로드와일러 당장은 교원 경력이 있는 교육 선교사 출신으로, 이화학당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자 학제를 구비하기 시작하였다. 학과목을 구분하고 정식화하여 지지(地誌), 산술, 과학, 영독본, 영문법 등 근대 학문체계를 마련하였고,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생활과 기숙사생활을 구분하여 학당의 규칙을 강화하였다. 로드와일러 당장은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라는 스크랜튼 선생의 교육이념을 이어받아 한글 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실용적인 지식 습득을 주장하였다. 당장직 퇴임 후에도 1899년까지 주한감리교 여선교부와 문서선교 분야에서 활동하며 지도에 전력하였다.

제 3대 조세핀 O. 페인 (1892.09 ~ 1907.06)
제 3대 페인 당장은 탁월한 사무능력과 사업능력을 발취해 15년간 이화학당의 발전을 이끌었다.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하고자 1897-1900년에 걸쳐 이층 양옥교사 ‘메인홀’을 건축하였고, 강당과 기숙사를 갖춘 메인홀은 학생들의 학습 및 문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1900년을 전후로 학당에서 자체 저술한 교과서와 번역·개편된 미국 교과서를 사용하는 등 정부의 교과서 편찬보다 앞선 진보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4년에는 처음으로 정부 인가를 받아 4년제 ‘중학과’를 설치하였고, 이화학당 최초의 교칙이라 할 수 있는 ‘당칙’을 만들었다. 중학과 설치는 이화의 교육이 여성 고등교육을 지향해 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제 4대 룰루 E. 프라이 (1907 ~ 1921.04)
제 4대 프라이 당장은 조혼이 만연하던 당대에 여성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임 초기부터 대학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이화학당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한 데 이어, 일제의 교육 탄압과 여성 고등교육은 시기상조라는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고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신설하였다. 대학과 설립과 이에 따른 여성학사 배출은 한국 여성이 고등교육을 통해 유능한 여성 지도자로 성장하는 가능성을 연 획기적 사건이었다. 또한 1914년 유치원을 설립하고 1915년 이화학당에 ‘유치원 사범과’를 설치해 한국의 유아교육을 선도하는 한편 전문적 직업 교육인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교수진 강화, 교과과정 정비, 제반규칙 제정 등 학교 행정의 현대적 기틀을 마련하며 이화의 견고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보구녀관>

보구녀관 (출처- 언론보도 | 보구녀관(普救女館) |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서울 발산동 이화여대 서울병원은 강서 일대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첨단 의술의 현장이다. 2018년 11월 12일 봉헌예배를 올렸다. ‘동대문 이대병원’ 후신이다. 현대 건축미를 뽐내는 이대서울병원 한쪽에 매력적인 한옥 공간이 눈길을 끈다. 132㎡ 넓이의 복원된 보구녀관(普求女館)이다. 한문에 익숙지 않은 젊은세대에는 선뜻 개념이 잡히지 않는 곳이다. 녀관 앞마당에 안내문을 읽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019년 ‘올해의 한옥상’을 받았다. 보구녀관은 1888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뜻으로 명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이다. 1885년 의사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한국명 시란돈)과 함께 입국한 조선 최초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에 의해 병원이 시작됐다. 모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및 북감리회로부터 공식 파견됐다. 특히 메리는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 전신) 등 수많은 학교 설립을 통해 ‘만인 평등’의 여성 인권을 심었다. 여성에게 이름 석 자마저 주어지지 않던 전근대의 조선이었다.

서울 발산동 이화여대 서울병원 내 보구녀관(한옥)
(출처- 언론보도 | 보구녀관(普救女館) |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1887년 서울 정동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으로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이 세웠다. 정동 보구녀관은 동대문으로 이전, ‘동대문 이대병원’으로 불렸다. 이화의료원은 2019년 이화여대 서울병원 개원과 함께 보구녀관을 복원, 기독교 선교병원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아래 흑백 사진은 초기 보구녀관이다.

1906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졸업자들의 예모식.
스크랜턴 모자가 조선에 입국해 사실상 왕실 주치의로서 활약하자 고종이 1886년 ‘시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메리는 서울 정동 시병원 4채 한옥 한쪽에 여성전문 진료실을 냈다. 그 진료실이 이듬해 보구녀관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1913년 보구녀관 분원인 동대문 볼드윈진료소와 통합돼 동대문 시대를 열었다. 의료선교사 메타 하워드, 맥길, 홀, 박에스더(김정동) 원장 등으로 이어지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이들은 메리로부터 신앙적 훈련을 받아 소명 의식을 높였다.

현 서울 정동교회와 이화여고 중간 지점의 ‘보구녀관 터’ 팻말.
조선 초기 선교사들은 대개 20~30대 초반이었다. 그 가운데 ‘유일한 어머니’ 메리가 있었다. 선교지 박해와 풍토병, 본국에 갈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선교사들은 메리의 사랑에 힘을 얻었다. 선교사들은 ‘마더’라 불렀고 조선 그리스도인과 일반 백성들은 ‘대부인’(The great lady)이라 칭했다. 그 어머니는 온화했고 모든 일에 희생적이었다.

경기도 수원 매향학교. 메리가 경기 남부 선교 당시 설립했다.
(출처- 언론보도 | 보구녀관(普救女館) |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종양이 있는 네 살 여자아이가 죽기 직전 병원으로 왔다. 그 부모가 전통 진료 방식의 지시에 따라 아이의 배설물을 종양에 발랐다고 한다.’ ‘화상 입은 소녀가 업혀 왔다. 입원을 권고했으나 그 집 남자들이 내 권고를 듣지 않았다. 아이가 낯선 곳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한 소녀 가족이 데려가 버렸다.’ ‘우리 여학교에서 소녀들의 눈과 혀로 약을 만들고 있다고 소문이 났고 이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했다.’ 보구녀관 3대 병원장 로제타 홀이 쓴 일기의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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