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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도익서 (Dr. Charles David Stokes)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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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데이비드 스톡스(Dr. Charles David Stokes, 1915.5.11.~1997.1.10.)

 

찰스 데이비드 스톡스(Dr. Charles David Stokes, 1915.5.11.~1997.1.10.), 한국명 도익서(都益瑞)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태생의 미국 감리교회 한국 선교사이다. 도익서 박사(Dr. Charles D. Stokes)는 한국 선교사인 부친 도마련(Marion B. Stokes)목사와 모친 폴린 스톡스(Pauliine David Stokes)의 넷째 아들로 남 캐롤라이나주 서멀톤 312번지 외할아버지 댁에서 1915 5 11일에 태어났다.  그는 애즈베리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19367월에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어 애즈베리신학교에 들어가 신약학을 전공하여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389월에는 예일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393월 그는 미국 감리교 세계선교부 왓슨(A.W. Wasson) 박사에게 아버지에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싶은 심정을 피력하였다. 그는 19401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6월에는 알린 암스튜츠(Arlene Amstutz, 한국명 도애련)와 결혼하고, 그 해 712일 선편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한글공부를 시작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선교사 철수 계획에 따라 서울 도착 몇 달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 194012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선교 등 동양지역의 선교를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노스캐롤라이나 농촌지역인 그린스버러지방의 베들레헴교회와 레오버스교회에 파송받아 목회하였다19469월부터 목회를 중단하고 학업에 전념하여 19474월 한국 감리교회사에 관한 논문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Korea"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논문 지도교수는 저명한 교회사가 라투레트(K.S. Latourette) 박사였다. 이 논문은 선교사적인 관점에서 1885년부터 1930년까지의 한국 감리교회사를 서술한 것으로 한국 감리교회의 발전에 대한 미국 감리교회와 선교사들의 공헌과 선교정책의 특징이 강조되고 있다. 한국에 있는 미감리교 선교부의 활동을 다루기 때문에 이 논문은 자료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의 편지와 각종 원고, 선교부, 교회, 선교본부, 성서공회 그리고 기타 선교기관들의 간행물들을 주로 이용하고 있으며, 이 자료들을 참조하기 위해 스톡스는 예일대학의 데이 해외선교도서관(Day Historical Library of Foreign Missions), 뉴욕에 있는 선교사 연구 도서관(Missionary Reserch Library)과 감리교 도서관, 그 밖의 공립 또는 사립 도서관들에서 연구하였다논문을 마친 후 194711월 내한하여 한글공부를 하는 한편 북한지역에서 월남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펼쳤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 수송과 구호사업에 힘을 쏟았고 전쟁고아 구제를 위해 19523월 충북 음성에 아동보호시설 음성향애원을 개원하였다. 19526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한국의 참상을 미국 교회에 알리는 일을 하였다19541월 대전에 도착해서는 농촌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오늘의 목원대학교로 발전한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초기에 신학관 건물을 짓고 캠퍼스를 마련하는 데 사용한 경비를 위해 헌신적으로 모금활동을 하였고, 1954322일 학교 운영비를 위해 5백 달러를 지불한 것을 비롯하여 초창기에 어느 누구도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했다. 은퇴할 때 평소 모은 3천만 원을 목원대학교에 장학금으로 희사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목원대학교를 사랑하고 아끼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목원대학교 교수와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1983년 은퇴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감리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공을 남겼다. 1974년 개교 20주년에 행한 다음과 같은 기념사에는 그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저는 오늘 이 뜻깊은 개교 기념 식전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저의 말을 마치려 합니다. 첫째로 우리 학교는 작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학교를 통하여 상상치도 못한 큰 능력이 이룩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양육된 학생들이 세상에 나간다면 이 사회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 학교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믿음과 봉사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봉사의 목적과 믿음의 방법이 없다면 결코 이 학교는 발전되거나 성장할 수 없읍니다그는 목원대학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학교를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19612월부터 19837월까지 22년간 호수돈여자중ㆍ고등학교 이사로 활동하면서 학교 새 교사를 건축하는 데 있어 선교부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1966년 청양에 설립된 청신여자중학교가 건축 문제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국 교회의 협조를 얻어 교사를 완성했고, 1971년에는 임야 195천 평을 매입하여 교지를 확장하는 데 전심을 기울였다. 은퇴 후인 19837월 귀국하여 애틀랜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782세로 소천하였다한편 1966312일 아내를 심장암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잃고 196792일에 195410월부터 한국에서 기독교교육사업에 헌신하던 매릴린 테리 스톡스(Marily Terry Stokes, 한국명 이명은) 선교사와 결혼하여 아들 데이비드(David)를 얻었다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사후인 20001024일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였다.

(학력)

1929. 9 ~ 1933. 5 서울외국인 고등학교 졸업

1933. 9 ~ 1935. 7 미국 에즈베리 대학 어학과 졸업(학사)

1937. 8 ~ 1938. 6 미국 에즈베리 대학 신학대학 졸업(석사)

1938. 9 ~ 1940. 5 미국 예일대학 대학원 졸업(석사)

1946. 9 ~ 1947. 6 미국 예일대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명예 박사 학위

19656월 미국 에즈베리 신학원 명예 신학박사

(경력)

1940.9 ~ 1944.8 한국 주재 감리교 선교사(일제말엽 귀국)

1944.9 ~ 1947.9 미국 크라이맥스 감리교회 시무

1947.12 ~ 1983.9 한국주재 감리교 선교사

1952.3.1 전쟁고아를 위하여 충북 음성향애원 설립(이사장)

1952 ~ 30년간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 겸 이사장

1954.5 ~ 목원대학교 설립(감리교대전신학원)

1954.5 ~ 1983. 9 학교법인 감리교대전신학원 이사

1957.5 ~ 1983. 9 감리교대전신학교 교수

1960. ~ 목자관 운영이사회 회계

1961. ~ 1983 호수돈 여자 중ㆍ고등학교 이사

1966. ~ 청양 청신여자중학교 이사장

1970. ~ 대전 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 건축위원

1979.10 ~ 1983. 9 학교법인 감리교대전신학원 이사장

1983. 정년 은퇴후 귀국

1990.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공로 표창

1997.1.10 사망

2000.10.24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전수자: 선교사의 미망인 Marilyn Terry Stokes 여사).

(출처- 찰스 D. 스톡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인물사전

 

<도익서 선교사, 성경과 유사한 한국인의 풍습>

1940년대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목원대 창립자) 도익서(Charles D, Stokes)선교사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1947년)에서 한국인들이 복음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을 환경 적인 요인에서 찾았습니다. 한국인들이 사는 모습은 마치 아프리카 토인과 비슷했고 한국의 지리적인 '산 넘어 산'이라는 면은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평생을 거의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이 많았으나 높은 도덕률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고상한 지식과 높은 도덕률과 함께 통일된 언어였다고 소개합니다. 한국인들은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 있는 단순하고 놀라운 알파벳이 있는데 이것은 극동 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없는 문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성적으로 연설을 하는데 타고난 재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이 본래 동양의 책이라는 점에서 한국인들은 성경속에 나오는 씨 뿌리고, 도리깨질하고, 결혼잔치, 공동우물, 문둥병자, 평안을 비는 인사법 등 너무나 성경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국인들은 영적 진리를 번역할 때 상징과 비유의 언어를 쉽게 이해하였고 성경을 표현하는데도 직관력을 가졌으며 서구인들이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훈련이 필요한 영적인 것들도 마치 한국인들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해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독창적인 문화적 풍습에 따란 것도 상황화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새벽기도입니다. '한국에 의해 발전된 새벽기도회는 전 세계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기여입니다. 동틀 무렵이 끝나도록 시간을 맞춘 큰 정성을 드린 깊은 영적인 기도시간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절망 가운데 있는 많은 교회에게 새로운 탄생의 시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북장로교회는 지침 원리를 1917년에 명확하게 8가지를 제시했는데 1번이 '교회는 모든 영혼과 영혼의 공동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국인들을 성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고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 이영제 목사

(출처- 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2997)

 

 

<음성향애원>   (출처-사회복지법인 아동양육시설 음성향애원입니다.)

음성향애원  (출처- 음성향애원, ‘나눔 숲’으로 행복한 공간으로 변신한다 < 음성읍 < 지역 < 기사본문 - 음성신문)

 

1952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불우한 어린이들을 보호·양육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이념으로 전쟁 고아를 수용하기 위하여 목원대학교(구 대전신학대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Dr. Charles D. Stokes(한국명: 도익서 박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같은 해 7월 후생 시설로 보건사회부장관의 인가를 받았으며 1958년 1월에 재단법인 음성향애원으로 허가를 받았다. 1977년 1월에 사회복지법인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1980년 8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지속적으로 원사를 증축하였다. 2004년 1월에 수용 정원을 90명에서 100명으로 변경하였고, 2015년 7월 29일 수용 정원을 100명에서 72명으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음성향애원   (출처- 음성향애원 - 디지털음성문화대전)   

 

 

 

<목원대학교, 전 대전감리교신학원>

목원대학교 (출처- 목원대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54년 5월에 미국인 선교사 도익서(都益瑞, Stokes,C.D.)를 설립자로 하여 기독교대한감리회와 미국연합감리회 세계선교부가 협력, 감리교대전신학원(監理敎大田神學園)으로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에 전희철(田熙哲)이 취임하였으며, 개교 당시 6·25전쟁으로 막대한 인적자원의 손실을 입은 한국감리교회가 전후 복구 및 부흥을 위한 지도자가 부족하여 ‘농촌교회 목회자 양성’이라는 제한된 목표를 가진 신학교육기관이었다. 1957년 2월 재단법인 감리교대전신학원이 설립되고, 같은 해 5월 4년제 문교부학력인정학교인 감리교대전신학교로 인가되었다. 1964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변경하고 이듬해 1월 감리교대전신학대학으로 개편하였으며, 초대학장에 이호운(李浩雲)이 취임하였다. 1969년 이후 감리교 산하의 신학교육기관으로 일관해온 종래의 성격을 탈피하여 교육목표의 포괄적 확대가 이루어져, 1970년 종래의 신학과 외 최초로 음악교육과가 신설되었다. 1972년 12월 일반대학으로 전환되어 교명을 목원대학으로 변경하고, 미술교육과·영어교육과·국어교육과·기악과·산업미술과·경영학과·수학교육과·상업교육과·행정학과·무역학과·건축미술과·영어영문학과·독어독문학과·불어불문학과·경제학과·응용통계학과·법학과를 편성하였다. 1980년 대학원, 1981년 신학대학원을 설치하고 1983년 회화과·전산정보학과·물리학과, 1984년 화학과·생물학과를 신설하였다. 1993년 종합대학교로 체제를 변경하였으며, 1997년 산업정보대학원을 설립하였다. 1998년 5월 학교법인을 감리교학원으로 변경하여 인가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건축도시공학부를 유성캠퍼스로 이전하였다가 1999년 2월 전 캠퍼스를 유성으로 이전하였다. 1999년 11월 언론광고홍보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여 인가받았다. 2005년 5월 개교 51주년 기념하여 이호운기념관, 도익서 기념관, 남기철 기념관 등 기념관을 헌정하였다. 2006년 2월 사범대학을 새롭게 설치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학교명

(한글)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영문) Mokw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소 재 지  (한글)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북로 88 (302-729)

(영문) 88, Doanbuk-ro, Seo-ku, Taejon, Korea 302-729

소 속 교 파 : 기독교대한감리회

설립자이름 : 도 익 서 (Charles D. Stokes)

1954. 5. 4. 감리교대전신학원 발족, 전희철 초대교장 취임

1965. 1. 13. 감리교대전신학대학 설립인가, 신학과 정원 160

1972. 12. 21. 목원대학으로 교명 변경인가

1980. 11. 3. 목원대학 대학원 설치인가

1981. 10. 20. 신학과 모집정원 60명 증원

1981. 11. 25. 목원대학 신학대학원 (정원 80) 설치인가

1984. 10. 5. 신학과 60명으로 감축

1987. 11. 9. 신학과 박사과정 설치인가

1993. 9. . 신학대학으로 변경

1994. 9. 5. 선교학과 40, 사회복지학과 (야간) 40명 설치인가

1995. 10. 4. 기독교교육학과 20명 설치인가

1997. 3. . 신학대학 신학부 150명 모집

1999. 1. 4. 사회복지학과 신학대학에서 인문대학으로 소속변경

1999. 2. 22. 유성캠퍼스 이전

1999. 11. 19. 교육대학원 시설인가(6개 전공 60)

2002. 02. 28. 이군호 총장 이임, 김원배 부총장 총장 대행

2002. 09. 13. 목원대학교 제5대 유근종 총장 취임[법인 제149(02·.9.25)]

도익서 설립자 설명

도익서장학회    (출처- 목원대 도익서장학회, 웨슬리신대원생 11명에 장학금 1706만원 전달 < 목원대 뉴스 < 뉴스 < 기사본문 - 웨슬리안타임즈)

 

도익서장학회는 목원대 설립자인 도익서 박사(Charles D. Stokes·1915~1997)의 선교 정신을 계승할 차세대 감리교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장학생은 품행과 사명감, 신학적 역량을 두루 갖추고 웨슬리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감리교회에 헌신할 예비 목회자를 대상으로 면접을 거쳐 선발됐다.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양화진 외국인 묘지>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도익서 목사 약력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부친 도마련(Marion B. Stokes)목사와 모친 폴린 스톡스(Pauliine David Stokes), 도익서 박사(Dr. Charles D. Stokes)

 도마련, 도익서 가족 묘

 

<마리온 스톡스(Marion B. Stokes, 도마련, 1882.12.12.~1968)선교사>

 

마리온 스톡스(도마련, 1882~1968)는 농촌 및 도시 목회, 문서 선교, 교회 행정 등 다방면에 활동하며 한국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선구자이며, 상설 중앙전도관을 설치하여 체계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88212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콜롬비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워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선교의 사명을 깨닫고 19054월 목사 안수를 받고, 11월부터 애쉬빌 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2년 사역 후 1907년 남감리회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에 왔다. 그는 개성 지역에 배치되어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대부흥 운동의 열기가 한창이어서 그도 이 분위기에 발맞추어 열정적으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2년 후에 부흥의 불길이 사라지는 것을 직면하고, 다시 부흥의 불길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했다. 1909년 개성에서 여름 남감리회 갬블, 리드, 스톡스 3명의 선교사는 철야기도를 드리면서 통회 자복하고 충만한 성령의 은사를 구했다. 그리고 산에서 금식기도 했는데 이때 하나님이 이 땅에 큰 복을 내려주시려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 그후 그는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들에게 5만 명의 새신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것이 100만명 구령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19099월 개성에서 남감리회 선교회 모임에서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전도표어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10월 서울에서 복음주의 선교부 연합공의회가 모였을 때, 갬블, 리드, 스톡스 등이 참석하여 범 개신교회의 표어로 금년에 100만 명에게로를 확정하고 전국적인 신앙부흥운동을 전개 했다. 그의 5만명 전도 구호가 초교파적으로 확대되어 백만명 전도 운동이 된 것이다. 1918년 그는 춘천지방 감리사로 파송받아 강원도 지방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문서 선교에도 힘을 쏟았다. 19201월 월간지 세광을 간행하였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구속, 칭의, 중생, 성결 등의 교리를 게재하고 신도들의 실 생활이 변화되도록 하고, 기독교 교육에 대한 글을 게제하였다. 1929년에는 주일학교 선생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주일학교 교사들이 참고할 수 있게 했다. 1934년에 조선 주일학교 연합회장으로 초교파적인 일을 하였으며 19351월에는 초교파 잡지 성화월간지를 발행하였다. 그는 안식년 동안 에모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서, 19249월 제7회 남감리회 연회에서 특별 부흥의 해를 정하고 다시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도록 강조했다. 그 결과 서울에 상설 중앙전도관을 설치하고 19259월 관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10여 년 간 이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전도 운동을 펼쳤고,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중앙전도관에는 상설강좌가 개설되어 총 15만 명의 수강자를 배출하였다. 1926~1927, 1935~1936, 두 차례 철원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면서 이곳 교회를 발전시켰다. 철원 지방에서 철원읍 제일교회, 철원 역에 제이교회, 철원 성경학원 설립과 기숙사 건축, 김화읍에 석조 예배당, 기타 10여 개의 교회를 신축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철원읍 제일교회에서 그의 한국선교 3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귀국하였고, 1941년부터 쿠바 선교사로 파송되어 7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후 1950년 한국 전쟁 중에는 미군의 한국어 통역으로 일본 등의 지역에서 종군하였다. 1968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샤로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의 시신은 한국에 와서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의 자녀 4형제는 모두 목사로 성장했다. 장남 마크 스톡스는 에모리대학 신학부장을 거쳐 미국 남감리 교회 감독으로 선출되었고,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파이퍼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차남 제임스 스톡스는 목회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 잡지 편집장을 지냈다. 3남 맥 스톡스는 에모리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였고 후에는 감리교회 감독을 지냈다. 4남 찰스 스톡스(도익서)1947년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내한하여 부친의 뒤를 이어 한국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1955년 대전 목원대학교를 설립하고 1983년까지 28년간 학교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

[출처] 208. 스톡스, 상설 중앙 전도관을 통해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백만인 구령 운동의 토대가 된 선교사|작성자 둘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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