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이눌서, 1867.12.11.- 1951.4.)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이눌서,李訥瑞)는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선교사·성서 번역가·교육자·신학자다. 한국 이름은이눌서(李訥瑞)다. 미국 남장로교회(PCU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소속의 선교사로 1894년조선에 들어온 이후, 호남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0년에 출판된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의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1917년부터1937년까지 어학교사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기독교신학연구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레이놀즈는1867년 버지니아주 노포크에서 태어났으며, 레이놀즈는 보수적이면서 경건한 신앙환경에서 성장하다 햄든시드니대학에 진학했다. 조선에서 성경 번역에 독보적 역량을 보여주었던 레이놀즈의 재능은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면서도 그는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할 정도로 언어능력이 빼어났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고전언어 분야를 비전 삼아 존스홉킨스대학 박사과정에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를 전공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했던 1887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립학교 교장으로 2년간 활동했다. 당시 레이놀즈는 학교뿐 아니라 YMCA 정기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석하면서 목회자의 비전을 세우게 됐고, 1890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개신교 목사가 되기 위해 1890년 레이놀즈는 미국 리치먼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했다. 신학교 재학 중 레이놀즈는1891년9월에 있었던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이 집회에 함께 참여한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全緯廉), 테이트(Lewis Boyd Tate,崔義德), 레이놀즈(W. D. Reynolds,李訥瑞), 마티 테이트(Mattie S. Tate,최마태),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팻시 볼링(Patsy Bolling), 메어리 레이번(Mary Leyburn)등 일곱 명의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1892년10월17일과 11월3일에 한국에 입국했다.레이놀즈는1895년10월 조선상임성서실행위원회 산하 공인번역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에 들어온지 3년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이유로 레이놀즈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을 반대하는 아펜젤러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오히려 아펜젤러의 마태복음 번역의 오류를 수정하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성경 번역은 단숨에 이뤄질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레이놀즈는 언더우드, 게일과 함께 성경 번역에 매진했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총 555회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쳐 최초의 공인 ‘신약전서’가 출판됐다. 특히 레이놀즈는 1899년부터 1937년까지 구약성경 번역과 개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맞춤법 통일안 등에 따라 몇 차례 표기나 용어가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레이놀즈의 헌신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울과 전주를 오가는 바쁜 사역 중에서 다른 선교사와 조선인 조사들과 함께 번역을 멈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1907년부터 구약 번역에 매진한 끝에 레이놀즈는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모든 번역을 완료하고, 앞서 언급한 “번역 다 되었소”라는 전보를 쳤던 것이다. 구약전서는 1911년 3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3만부가 인쇄됐다. 신구약 성경전서가 공인역으로 출간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레이놀즈는1910년4월2일 오후5시,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소속 휴 밀러(Hugh Miller)에게 전보를 통해 '번역다됐소'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는 최초의 구약전체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게일과 언더우드가 참여한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을 레이놀즈가 번역한 것으로 사실상 개인 번역과 다름없다는 평이 있다. 레이놀즈가 번역한 <구약전서>는1911년3월에 요코하마에서 3만부 인쇄되어 반포되었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연보
1867년: 출생
1891년: 유니온 신학교 졸업
1891년 9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간 언더우드선교사가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 집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테이트, 전킨 등과 함께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1892년 1월 22일: 한국 선교 허가받다
1892년 11월 3일: 제물포에 도착한 후, 서울로 이동했다.
1893년 1월 28일: 해외 장로교파별 선교공의회를 운영하던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연합하여장로교 선교 공의회(장로교미슌공의회; Presbyterian Mission Council)를 조직하고 레이놀즈를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 남장로교회소속 선교사들은 호남, 제주, 충청남도 등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결정하었다.
1894년 3월 - 5월: 군산, 전주, 목포, 순천 등 전라도 지역을 다니며 선교 구역을 살펴보았다.
1895년: 조선상임성서실행위원회 산하 공인번역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897년: '전주교회'(후일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로 불림) 목사로 부임했다.
1900년 9월 9일: 전주 서문외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이눌서의 집 사랑방에서 하리슨 선교사(W. B. Harrison)가 만 16세의 김창국을 대상으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2년 10월: 밀러 선교사의 지방 순회로 공석이된 승동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 부임했다.
1906년 3월 - 1907년 8월:제임스 게일 목사의 안식년으로 연동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로서 직무를 담당했다.
1907년: 한국인 번역조사 이창직, 김정삼과 레이놀즈 선교사가 구약성경 번역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YMCA 낙성식에서 설교를 했다.
1910년 4월 2일: 구약성서 전체 번역을 마쳤다.
1910년 5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복귀하여 1911년 10월 '전주교회'로 돌아왔다.
1911년:독노회회장을 역임했다.
1917년: 평양의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에 복위했다.
1924년: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29년: 지리산 노고단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내에 9홀 골프장을 설계해서 만들었다.
1937년 6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폐교로 복귀하지 못했다.
1951년: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어트에서 사망했다.
(출처-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全緯廉), 테이트(Lewis Boyd Tate,崔義德), 레이놀즈(W. D. Reynolds,李訥瑞), 마티 테이트(Mattie S. Tate,최마태),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팻시 볼링(Patsy Bolling), 메어리 레이번(Mary Leyburn)

한국 성서번역위원회. 앞줄 왼쪽부터 레이놀즈, 언더우드, 게일, 존스. ⓒ서울역사아카이브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한국 성서번역위원회. 앞줄 왼쪽부터 레이놀즈, 언더우드, 게일, 존스. ⓒ서울역사아카이브 레이놀즈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파송을 받아 입국해 호남지역 선교와 우리말 성경번역을 위해 크게 헌신했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글 학습 노트 ⓒ천지일보 2023.12.06.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한국에 온 레이놀즈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한국에 적응하고 선교기지 개척을 위하여 1894년과 1895년에 전라도와 남해안 일대를 탐사했는데, 일기와 메모지에 모든 한국 고유명사를 한글로 기록했을 뿐 아니라, 국영문 혼용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을 많이 사용하여 기록했다. 그 수첩 뒤에는 한글 발음법, 문법, 단어, 도량단위와 셈법, 일상회화, 5단계의 경속(敬俗)어체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레이놀즈와 함께 한글성경 번역 사업을 했던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조선지부장 휴 밀러(Hugh Miller)는 그가 ‘정확한 학문’과 ‘최고의 한국어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레이놀즈가 번역한 구약성서와 신학지남(편집인)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조선 상임성서실행 위원회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게일 등 재편되면서 레이놀즈가 1895년 공인 번역위원회에 들어간다. 공인 번역 위원회는 중국의 전례를 참고하여 각 번역 위원이 조한규(아펜젤러), 김명준(언더우드, 레이놀즈), 송덕조(언더우드), 최병헌(스크랜턴), 이창직, 정동명(게일), 김정삼, 이승두(레이놀즈), 홍준(트롤포프), 문경호(존스) 등 언어 조사의 도움을 받아 번역을 하였다. 그들은 1896-1897년까지 매주 세 차례 모여서 토론하며 1900년 5월까지 로마서까지 실험역을 완성하고 초역을 마친다. 나중에 번역 위원회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세 명 뿐이었다가 언더우드와 게일이 질병과 안식년으로 떠나면서 1906년 9월 성서위원회는 알버트 피터스 선교사와 윌라드 글리던 크램을 추가 번역 위원으로 임명된다. 레이놀즈와 이창직, 김정삼은 지속적으로 참석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피터스 선교사의 구약 번역작업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전주에서 레이놀즈는 1908년 4월부터 1910년 4월까지 2년 동안 이미 번역위원회가 번역하여 출간한 창세기, 시편,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 상하, 말라기와 게일이 번역했던 욥기, 호세아, 예레미야를 제외한 구약의 모든 부분을 번역하였다. 이눌서 선교사가 거의 손을 보며 다시 번역하게 되고 피터스가 가세되여 마지막 완성하게 된다. 이눌서는 구약 성경을 평균적으로 오전에만 40-50절씩 번역했다. 이처럼 어려운 작업을 통해 1910년 4월 2일 최종적으로 구약 번역을 시작한지 1년 만에 <구약전셔>가 1911년 3월 요코하마에서 3만 부가 인쇄되었다. 이리하여 <신약젼서>와 <구약젼셔>가 출간되어 성경 전체의 한글 공인역을 완성하게 된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성경사전
1927년 간행된 사전. 레이놀즈(W.D.Reynolds) 편집. 영국기독교서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이 영문 사전들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

미남장로교회 7인 선교사 사진. 레이놀즈-부인 팻시 볼링 선교사 부부(박스 안), 전킨 부부, 테이트 부부, 린나 데이비스와 장인택 조사(맨 왼쪽)
레이놀즈의 동역자로서 볼링은 선교 지망생으로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카메론 존슨과 전킨 선교사와는 선교 기도 동지였다. 매코믹 신학교의 테이트는 적극적으로 선교 준비 활동을 통해 레이널즈를 도와준 동료였다. 레이놀즈와 부인 팻시 볼링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 윌리엄 데이비스는 한국에 입국한 다음 해인 1893년에 태어났으나 10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94년 둘째 아들 존 볼링(R. J. Bolling, 1894-1970, 보린)이 태어난다. 이 존 볼링은 1970년 75세에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별세한다. 레이놀즈와 볼링 사이에 태어난 존 볼링은 자신의 유해를 레이놀즈 선교사가 있는 양화진에 묻히는데, 권명달 씨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사랑했느냐 하는 것은 그의 매일의 생활에서 보여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먼저 피아노에 앉아 ‘애국가’를 연주했습니다. 그가 애국가를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첫째로 자기는 한국 사람이며, 다음은 자기 부인이 안익태 선생과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탓이지요. ...1970년 그분은 제2의 고향인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부인 마가렛트 여사가 그의 유언을 이어 받아 레이놀즈 교수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셨지요 ...레이놀즈 교수는 한국인 중의 한국인이지요. 한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를 사랑했으며, 고(故) 유일한 씨와 더불어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민족과 국가 미래에 관심을 두었습니다.”(전택부 책, 135-136). 팻시 볼링 선교사(레이놀즈 부인)는 호남 선교의 7인의 선발대의 멤버들과 함께 호남 선교의 선구자가 된다. 이들 7인 선발대, 곧 언더우드 형제의 기부금의 세 사람과 함께, 테이트 여동생인 매티 테이트, 레이놀즈의 부인 팻시 볼링, 전킨의 아내 매리 레이번, 독신 리니 데이비스 등이다. 이 7인은 전주를 중심의 복음 전도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7인의 개척자는 동학난으로 말미암아 코로나 이상으로 센 콜레라 전염병이 창궐하고 이 어려움을 겪는데 이는 전쟁 후유증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수탈과 착취에 만연된 불쌍한 사람들과 황폐한 광야와 같은 전북의 황량한 땅을 선교사의 손길을 통해 가나안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볼링의 남편 레이놀즈 선교사는 성경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는 이 번역 사역과 더불어 1895년 전주 서문 교회를 세운다. 1897년 남자 2명과 여자 3명(김내윤, 김창국, 여자 강씨, 임씨, 김씨)을 세례를 주고 전주 예배당이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팻시 볼링 선교사의 비전은 레이놀즈 남편을 위대한 선교사로 만들었고, 그녀의 내조는 호남 선교의 복음의 큰 씨앗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교는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평양신학교>

평양신학교 (출처-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 한국 기독교 부흥과 성장의 발원지 : 네이버 블로그)
평양신학교는 1908년 5월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지원으로 신학교 교사가 2층 규모로 건축되었고, 맥코믹기념 기숙사(맥코믹) 알렉산더기념 기숙사(남장로교), 마르다기념 기숙사(북장로교), 빅토리아기념 기숙사(호주장로교) 등 6동의 기숙사가 건축되었다. 1916년, 평양신학교는 6명의 정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진이 참여하여 1918년부터는 현재까지도 발간되고 있는 “신학지남”을 발간하고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한편 레이놀즈의 책임하에 “성경사전”을 발간하여 성경공부 학습자들을 위한 중요한 부교재가 되었다. 1921년, 5년 신학과정이 1년2학기 3년 과정으로 개편되었고, 교회지도자 과정으로 6주 2년 과정이 개설되었다. 장로교신학교는 한국장로교 선교회 사역의 “사경회제도”의 성장에 따라 제도화 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캘빈주의를 배경으로 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을 수납하고, 장로정치를 수용한 성경중심의 학교로서 개별적 연합에서 총회로 이관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장로교신학교는 구학파 신학을 계승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의 전통과 맥을 잇고 복음주의와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을 다시 후대에 까지 연결해야 하는 중요한 오늘을 보내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신학생들은 신구약 전권을 공부해야만 하고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 가르치며, 성경을 진실로 신앙하고, 바르게 이해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했다. 동정녀 마리아탄생,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희생, 육체적 부활, 기적의 역사성과 역사적 재림 등 전통적인 교리를 계승하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신학교육은 계속되었다. 평양신학교는 목회자, 설교자, 전도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이러한 복음주의적 신관과 사관은 매우 엄격하고 정확하게 교육 되어야 하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10년 백만인구령운동은 마펫(마포삼열)과 알렌(곽안련)과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 등과 같은 맥코믹신학교 출신자들이 주도하였다. 1934년, “선교50주년 희년기념예배”에서 마펫은 한국교회에서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고, 그 십자가의 도가 한국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켰다고 전하였다. 마펫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서 행정과 탁월한 지성을 겸비하며 평양신학교가 한국신학교의 정통성과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알렌 선교사는 신학교 교재인 설교학과 예배학을 발간하고, 레위기, 민수기, 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욥기, 시편, 소선지서 6권, 공관복음에 이르는 표준성경주석을 편찬하였다. 레이놀즈는 유니온신학교의 존경받는 신학도로 45년간 한국의 순회선교사와 성경번역가와 신학교 교수로 헌신하였다. 이후 한국최초의 남궁혁교수(1927)가 초빙되고 그 후 이성휘교수(1930)와 박형용박사(1930)가 교수에 초빙되는 등 점차로 한국인 교수들이 확대되었다. 1938년 9월 제 27차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적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순교한 이들이 50여명이었고, 반대하다 옥중에서 해방되면서 출옥한 성도들도 약 50여명이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서다 주기철, 최봉석, 박관준, 박의흠, 서정명 등이 함께 순교했으며 위와 같은 사건으로 평양신학교는 폐교를 당하게 됐지만 평양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들은 한국 기독교사의 지속적인 부흥과 성장에 갈망하며 한국교회를 일깨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양화진외국인묘지>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햄덴 시드니 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외국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축구 야구 정구 등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892년 5월 5일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은 미국 남장노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때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선교사가 함께 내한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폭 넓게 헌신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부인 팻시 볼링(Patsy Bolling) 선교사
1868년 9월 28일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국적 현모양처로서 대외 활동보다 가정에 충실했으며 남편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출생 당년에 사망한 W. D. 레이놀즈는 레이놀즈 부부의 맏아들로 1893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같은 해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전주서문교회> 1895년 설립 제4대 목사 시무

전주서문교회 (출처- 정림 홈페이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다가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 속한 개신교회이다. 호남지역 첫 교회 설립이다.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의 파송을 받은 정해원에 의하여 1893년에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 개신교 교회이다.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1892년에 인천을 통해 입국하였고, 다른 해외 장로교파 선교사들과 함께 이듬해 초 장로교 선교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한국에서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기로 한 선교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호남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호남지역에는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있어 미국인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선교활동보다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국인 어학 선생인 정해원을 먼저 전주 지역으로 파송하였다. 정해원은 1893년 6월 전주천 건너 부남면 은송리(지금의 완산동 165-5번지) 용머리고개 기슭의 초가 한채를 52냥(미화 26달러 상당액)에 구입하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후, 1897년 7월 17일에 레이놀즈 선교사의 집례로 김내윤과 김창국 등 남자 2명과 여자 3명에게 세례를 배풀게 되었다. 1897년에는 선교부를 확장하기 위하여 토지를 추가 구입하고 건물 두 채를 건축하고 있었으나 기독교 전도를 반대하는 유생들이 개입하여 전주 관아는 전주 이씨의 본향인 완산은 내국인도 아무나 임의로 건축을 할 수 없는 곳이라며 건축 금지를 명령하였다. 주한 미국 공사관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 선교부 기지를 서북편인 화산으로 옮겨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건물 세 채를 이전해서 지을 수 있는 보상금을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협상하였다. 선교부 자리의 이동과 함께 전주 초기 교회 터도 맞은 편 전주성 서문 옆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 곳에 현재까지 전주서문교회 예배당이 위치하고 있다.

전주 서문교회
레이놀즈는 1901년 안식년을 다녀온 후 목포를 선교지로 배정받아 목포지역 사역하면서 성경 번역일도 감당했다. 그러나 1902년 아펜젤러의 갑작스런 순교로 인해 구약성경 번역을 전담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왔다. 이후 서울에서 승동교회에서 4년간 사역하고 이어서 연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교단을 뛰어넘어 헌신한 것이다. 그 후 한글 성서번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서울을 떠나 다시 호남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군산에서 1908년 1월 군산 영명학교 설립했다. 그러나 전주를 담당하던 동료 선교사 전킨이 소천하여 그해 2월 전주에 와서 기존에 사역했던 전주 서문교회 4대 목사로 인근 지방교회를 섬겼다. 이때 전주 서북쪽 외곽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지역 교회가 크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교회연혁)
1893. 06. 미국 남장로교선교사 레이놀즈(이눌서) 목사가 정해원 씨를 전주에 파송.
정해원 씨가 완산밑 은송리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복음 전파를 시작.
1893. 09. 제1대 테이트(최의덕 선교사) 목사 부임. (이임 1897.07.)
1897. 07. 제2대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 목사 부임. (이임 1904.10.)
1897. 09. 선교사들이 구입했던 가옥을 예배에만 사용하도록 개수하고"전주교회"라고 부르기 시작.
1898. 11. 03. 마티 잉골드 여의사(전주예수병원 설립자)가 부인 환자 외래 진료를 시작.
1900. 09. 09.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 목사가 희현당 옛터에서 신흥학교 시작.
1902. 테이트(최의덕 선교사) 목사가 6명으로 기전학교 시작.
1904. 10. 제3대 전킨(전위렴 선교사) 목사 부임. (이임 1908.01.)
1905. 09. 현재의 위치에 2,578.5㎡[780평]의 터를 마련하고, 벽돌집에 한식 기와를 얹은 건평 188.43㎡[57평]의 일자형예배당을 신축. 이때부터 본 교회를 ‘전주서문외교회’(전주서문밖예배당) 또는 ‘전주부중교회’라고 부름.

교회내부 (출처- 정림 홈페이지)
<서울 승동교회> 1902년 시무

승동교회 (출처- 승동교회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볼만한곳)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곽안련 선교사 건축)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1894~1928)을 비롯한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를 열었던 곳이다. 2월 28일에 열린 제4회 회의에서는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다음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22년에는 이 교회에서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가 설립되어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장로회 역사의 중요한 상징인 승동교회는 제101회 총회에서 역사사적지 1호로 지정 되었다. 승동교회는 선교초기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영욕의 현장에 서있으면서, 단 한 번도 선교사를 통해 전수된 복음과 총회의 본류에서 이탈하는 일 없이 본 교단 역사의 산실로 역할을 감당해왔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승동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만세운동의 중심이 된 탑골공원 및 태화관 등과 인접해 있었기도 했지만, 교인들 중에 차상진 목사와 면려회장 김원벽을 비롯한 충군애국(忠君愛國) 인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9년 3월 2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백방으로 독지가를 물색하던 중,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제휴되었다. 김 장로는 흔쾌히 학교를 위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하기로 하고 상당한 부동산과 헌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조선신학교는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와 깊이 관련된 자들은 195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로 분열될 때 모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떠났다. 그러나 승동교회는 떠나지 않았다. 조선신학교에 장소를 제공해 주기는 했어도 신학적 정통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승동교회의 정체성이었다. 1942년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폐쇄되고,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경기교구가 소집될 때 승동교회는 회집장소로 선정되는 비운을 맞는다. 하지만 일제가 만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해방 후 해산하고, 대신 남부총회가 회집됐다. 1946년 6월 11일 개회한 제1회 남부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로 명명된다. 승동교회는 남부총회가 회집된 장소로서, 또 한 차례 역사적 현장의 중앙에 섰다. 1959년 제44회 총회는 WCC 문제로 분열되었다. 당시 WCC를 반대하며, 장로회 신학과 역사적인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승동교회가 속회 총회 장소를 허락했다. 이듬해 9월 22일 제45회 총회가 고신 측과 합동총회로 회집될 때 장소도 승동교회였다. WCC를 지지하는 쪽은 연동 측으로, 반대하는 쪽은 승동 측으로 불릴 만큼 승동교회는 한국교회 본류를 이끌어가는 상징이자 희망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승동교회는 설립 100주년 기념의 해인 1993년에 신학적인 정통과 전통에 기초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이를 후대에게 계승하기 위하여 여러 자료들을 집대성했다. 2010년에는 역사관을 개관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제101회 총회는 승동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1호로 지정했다. 발제자/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서울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옛 곤당골교회)와 주변 모습. 근대식 적조 예배당과 한옥 교회 부속 건물(주차 차량 쪽)로 구성돼 있다. 교회 초기 백정 출신이 많아 ‘백정교회’로도 불렸다. 강민석 선임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258089
(교회연혁 )
1893.06. 선교사 사무엘 무어(S.F.Moore) 목사가 곤당골에 교회를 설립하고 첫 공식예배를 드리다 (제1대 담임목사)
1895. 양반교인 중 일부가 홍문섯골에 교회를 분립하다
1898.06. 곤당골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다
1899. 곤당골교회의 교인이 홍문섯골 교회로 합류하다
1902.02. 선교사공의회에서 홍문섯골교회 치리하여 교회를 패쇄하자 교인들이 제중원(구리개병원) 내의 예배처소로 가서 예배를 드리다. 그리하여 동현(구리개)교회가 설립되다
선교사들은 동현교회를 중앙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다
1902.09. 곽안련 동현교회 부목사 부임하다
1902.10. 이눌서(W.D. Raynolds) 목사 서울지역 연합당회(새문안교회) 임시당회장 부임
1908. 이여한을 초대장로로 장립하고 김소(J.F. Genso) 장로와 함께 당회 구성
1905.08. 현 위치인 인사동 137번지로 옮기면서 중앙교회로 개칭하고, 제2대 담임목사로 곽안련 목사(Rev. Charles Allen Clark) 시무(1906년 3월 위임)
승동기독학교(현대식 초등학교) 시작
1907.09.17. 대한예수교독노회가 평양장대현교회에 창립될 때, 곽안련 목사가 총대로 참석
1909.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1911년에 자립시킴
1911.12.04. 경충노회 창립노회가 새문안교회에서 회집되었을 때, 곽안련 목사께서 부회장으로 당선되고 이여한 초대장로가 총회총대로 피선, 제2대 박성춘, 김일선 장로 장립
1912.09.01.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가 창립될 때 곽안련 목사와 이여한 장로 총대로 참석
1913.02.16. 예배당 건축을 마무리하고 헌당식을 거행
1913.09.07. 소안동예배당에서 개회예배를 드린 제2회 총회가 본교회당에서 회집함
1915.07.02. 이여한 장로, 목사 장립 후 곽안련 목사와 위임동사목사(제3대 담임목사)
1916.05. 청년면려회 조직
1917.06.19. 제4대 담임목사 차상진 목사, 곽안련 목사와 위임동사목사로 시무
1919.02.20. 청년면려회장 김원벽, 본교회 하층 소학교사무실에서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 열고 독립운동 숙의
1919.03.14. 차상진 목사, 11인의 동지들과 함께 ‘12인의 장서'를 조선총독에게 제출 후 체포 투옥
1922.09.09. 제5대 담임목사 김영구 목사, 곽안련 목사와 위임동사목사로 시무

▲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포먼 무어의 곤당골 교회로 시작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 1912년 적벽돌을 쌓아 박공지붕을 얹은 로마네스크풍의 신축 교회 완공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 증축 기공식 및 상량식 / 1958년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이후 출입문 쪽 신자석 공간을 늘리는 증축공사로 교회 정면부의 원형창과 아치창은 사라지고 두 개의 출입문도 한 개로 통합되었다. 그렇게 초기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3.1운동의 진원지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본당은 200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 / 2001년 지정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3.1 독립운동 기념터
1901년 안식년을 다녀온 후 목포를 선교지로 배정받아 목포지역 사역하면서 성경 번역일도 감당했다. 그러나 1902년 아펜젤러의 갑작스런 순교로 인해 구약성경 번역을 전담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왔다. 이후 서울에서 승동교회에서 4년간 사역하고 이어서 연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교단을 뛰어넘어 헌신한 것이다. 그 후 한글 성서번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서울을 떠나 다시 호남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서울 연동교회> 1906-1907년 게일 목사 안식년 동안 시무

연동교회
조선 말기인 1894년에 설립된 오래된 교회이다.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모삼열(본명 S. F. Moore)이 1894년 전도하여 몇 명의 신자를 얻었고, 그래함 리(한국명 이길함) 선교사와 서상륜이 연지동 136-17번지의 초가를 예배당으로 삼아 예배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연동교회의 초기 신자들은 천민에 속한 갖바치들 즉, 신을 삼는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점차 신도가 증가하면서 이듬해에는 교육 기관인 연동소학교를 세워 여학생도 모집해 운영했다. 이 학교는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00년에는 제임스 게일이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고, 한옥집을 개조해 교회당으로 사용하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로를 선출하였는데 양반들은 낙선하고 갖바치 출신의 고찬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양반들은 종묘 옆 봉익동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1910년 묘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의 기록에 따르면, 연동교회의 주일예배 참석 인원은 163명이고 이 가운데 세례교인이 35명이었다. 박승봉, 유성준, 이상재 등 양반 출신의 개화파 청년들도 여럿 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준 역시 교인이었다. 1907년에는 매주 1천 2백명의 교인이 출석할 만큼 교회가 확장되었다. 같은 해 어린이 교육을 위해 소아회(小兒會)라는 이름으로 주일학교를 처음 시작하여 근대 한국 기독교의 교육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1] 소아회로 인해 어린이 신도 수가 크게 늘어났고, 다른 교회에서도 차츰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동여학교의 영향으로 신교육을 받은 여성 신자도 늘어나 김마리아, 신의경, 유각경, 김필례 등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연동교회의 유성준 등 일부 양반들은 김창재의 집에서 시작한 안동교회로 분립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선(日鮮) 기독교 일체화' 라는 종교정책을 세우고 1942년 9월7일 '조선에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를 시작으로 한국 기독교의 말살을 획책했다. 1943년 1월26일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제1차 합동준비위원회를 첫 모임으로 교파 합동안이 토의 됐으나 서로 다른 역사적, 교리적, 교회법 문제로 합의하지 못했다. 결국 주시하고 있던 총독부는 감리교가 주동이 된 조선혁신교단을 결성하고 연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인 전필순 목사를 의장에 앉혔다. 하지만 이후 장로교, 감리교의 반발로 조선혁신교단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전필순 목사도 반대하여 이탈했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분열될 때는 예장통합 측에 속했다.
(출처- 연동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01년 안식년을 다녀온 후 목포를 선교지로 배정받아 목포지역 사역하면서 성경 번역일도 감당했다. 그러나 1902년 아펜젤러의 갑작스런 순교로 인해 구약성경 번역을 전담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왔다. 이후 서울에서 승동교회에서 4년간 사역하고 이어서 1906년 3월 - 1907년 8월 제임스 게일 목사의 안식년으로 연동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로서 직무를 담당했다 그 후 한글 성서번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서울을 떠나 다시 호남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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