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 포먼 무어 (Sammuel Forman Moore, 모삼열, 1860.9.15.- 1906.12.22.)
무어 목사님은 시카고에서 조금 떨어진 그랜드 릿지에서 1860.9.15. 출생하셨고 4살 위의 누님과 2살 위의 형님이 계셨습니다.아래로는 동생이 있고 아버님은 목사님이었고 형님도 목사님이 되었으며 동생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어려서 사도바울과 같은 극적인 소명 체험은 없었지만 열두살때 산에서 기도하던 중 '이방인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헌신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미국 서부의 몬타나 대학(Montana college)을 졸업하고 1889년 맥코믹 신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봄 졸업하였습니다. 그 해 7월에 사모님과 결혼하고 9월 22일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대학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았는데 몬타타대학에 다닐 때는 학교 근처에 있는 감옥소의 죄수들을 회개시켜 훌륭한 장로교인을 만들었고 맥코믹 신학교 시절에도 두 곳의 경찰서를 자주 방문하여 유치장의 죄수들을 회개시키고 위로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1892년 9월에 한국에 오셔서 선교사들이 주로 살고 있는 정동이나 연동과는 떨어져 있는 한국인 마을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말을 배우는 재주도 비상하여 한국에 온지 수개월 만에 주기도문을 드리고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3-4년 후에 수원에서 우리말로 설교를 마치자 한 노인이 "무어 목사님, 미국 사람도 한국말을 씁니까? 얼마나 말씀을 잘하시는지 한국 사람이 양복만 입은 것 같습니다"라고 칭찬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한국인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말을 배웠기에 그의 말은 순수한 보통사람, 곧 서민층의 생활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말을 그렇게 잘하는 무어 목사님이 선교사회에서 치루는 ‘한국어 시험’에는 늘 낙제 점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어 시험'은 '유식한 말'들을 묻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무슨 기독교서적 운동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제로 복음을 이 백성들에게 직접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님의 태도는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고 또 조그만 틈만 있어도 계속 복음을 들고 노방 전도를 나가기에 바빴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그분을 가리켜 仁牧이라 불렀고 그의 집을 '仁義禮之家'라고 칭송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한국에 오신 그 이듬해인 1893년에 곤당골에서 예수교학당과 교회를 시작하셨는데 이 교회가 오늘 우리 승동교회의 모체가 됩니다. 그 분은 교회 대지 구입을 위해 손수 60달라의 헌금을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무어 목사님과 백정들 간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1893년 무어 목사님이 예수교학당을 시작한지 얼마쯤 지난 후에 무어 목사님이 손수 복음을 들고 길에서 전도하면서 '아이들을 예수교학당에 보내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말을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듣고는 그 아들 봉출이를 학당에 보냈습니다.그 이듬해(1894)로 짐작되는데 박성춘이 발진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박성춘은 당시의 치료법에 따라 구들에 불을 많이 때고 땀을 흘리며 굿을 했지만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당에 갔던 봉출이가 무어 목사님과 함께 당시 고종 황제의 어의였던 애비슨(O.R. Avison) 선교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애비슨 선교사의 정성스런 양침 주사와 무어 목사님의 기도로 며칠 후에 박성춘은 완쾌되었습니다. 그리고 애비슨 의사가 고종황제의 어의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하늘 같은 고종황제의 의사가 나 같은 천민을 치료해 줄 수 있는가 ?" 하고 생각이 들자 그만 너무 감격하고 말았습니다.그 때 봉출이가 "아버지 교회에 가세요"하고 졸라대자 결심하고는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드디어 1895년 5월 박성춘은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입교를 했습니다.그러자 일이 터졌습니다. 양반 교우들이 하나 같이 교회를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당시는 교우들이 겨우 40~50명에 불가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교회가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무어 목사님은 이주사라는 양반 교우를 붙들고, "왜, 양반들이 안 나옵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 선교사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모르셨습니까?", "....?" "선교사님, 우리가 예수는 믿어요, 하지만 어떻게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본단 말입니까?" "이보시오, 이주사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웬 말입니까?"그러자 이주사는 고함을 치면서 나가버렸습니다. 백정 박성춘은 풀이 죽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어 목사님은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송을 계속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백정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6명의 백정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박성춘 교우가 4명의 백정과 그들의 부인들을 더 데려 왔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이 시련을 기도로 넘어 가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신씨라는 양반이 찾아와서 "선교사님 백정들은 뒤에 앉고 저희 양반들은 앞에 따로 앉게 해주시면 우리가 다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어 목사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외로운 백정들 편에 서신 것입니다. 소외 계층과 함께 고통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어 목사님의 위대한 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첩장교회', '백정교회'인 승동교회가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선 것입니다. 그 후 목사님은 백정들의 고충을 자세히 듣고는 이미 지난해(1894) 갑오경장때 법제적으로는 혁파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남아 있는 천민들의 차별 철폐를 위해 조정에 탄원서를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95년과 1896년 봄까지 세 차례에 걸쳐 內部에 탄원서(所志)를 냈습니다. 그 내용은,"우리 백정들 모두가 갓과 두루마기를 쓰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의 어의였던 애비슨 의사와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도 함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침내, "이미 법령이 공포되었는데 어찌 너희들의 청원을 거절하랴?"라는 內部의 대답이 내려졌고 전국에 방을 부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무어 목사님, 애비슨 선교사, 박성춘 교우의 노력의 대가였습니다. 이후 박성춘 교우는 무어 목사님에게 큰 힘이 되었고 전국을 돌아 다니며 백정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1898년 만민공동회가 종로 네거리에서 열렸는데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은 물론이고 학생, 부녀자, 장님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때 윤치호 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첫번째 연사로 박성춘 교우가 등단하여 애국애족을 외치는 감격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박성춘 교우는 드디어 1911년에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주도적인 역할로 보면 더 일찍 장로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백정이 어떻게 장로가 되는가?” 라고 하는 반대하는 이들 때문에 다소 늦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그 아들 봉출이는 매우 총명하여 예수교학당과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8년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이 되어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종황제의 악성 종기를 치료하여 고종황제로부터 "너는 정말 박사로구나 !"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어 목사님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었으므로 평등하고 똑 같은 인권을 가졌다는 성경 중심의 복음 실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매하고 선지자적인 그의 행보는 칭찬은 커녕 오히려 많은 선교사들의 불평을 샀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서울의 몇몇 선교사들은 "교회가 백정들의 것으로 소문이 나서 양반들에게 전도를 할 수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무어 목사는 백정 해방운동을 위해 탄원서를 냈다"고 헐뜯기도 했습니다. 특히 알렌(A.N,Allen) 공사와 가장 갈등이 심했습니다. 알렌 공사는 1884년 중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국 선교본부에 “한국에 가도록 해달라”고 청원하여 미국 공관에 거주하는 의료원으로 한국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었는데, 총상을 입은 정부 고관을 치료해 주고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 후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입국하게 되자 선교사 직책을 내놓고 공사가 된 정치적인 분입니다. 성격이 매우 괴팍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이러한 알렌에게 무어 목사님은 순진하게도 "나를 궁중에 들여보내주면 황제에게 전도하겠소"하고 제의를 했습니다. 물론 알렌은 펄쩍 뛰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무어 목사님은 단념하지 아니하고 고종황제께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미국사회의 관습이 한국에서도 통용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편지는 고종황제에게 가지 않고 알렌의 손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알렌은 크게 화를 내면서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은 모두 훌륭하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빈톤과 무어가 더욱 어렵다. 그 중에도 무어는 걷잡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는 미국 국무성에 편지를 냈습니다. 그 편지 중에서 알렌은 "백정에서 황제라니 도약도 너무 지나친 도약(great leap)이 아닌가?" 라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국무성에서 입수한 무어 목사님의 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 사무엘 무어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신하들과 더불어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면 저를 불러주시기를 바라옵니다.” - 존경하옵는 황제폐하께, Sammuel Moore 어떻습니까. 이것이 못할 말이며 쌍스런 말입니까 ? 알렌의 눈에는 도약이 심했겠지만 아마도 하나님과 무어 목사님의 눈에는 결코 백정으로부터 황제까지의 도약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같이 죄인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무어 목사님과 알렌 공사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되었습니다.알렌은 무어 목사님을 공관의 영창에 집어 넣고, 또 입국 비자도 회수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알렌은 1901년 가을 평양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 편지를 내서 "무어 목사는 미국 시민으로서 정부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전하도록 하라"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선교사들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들은 "무어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어 알렌에게 보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심한 갈등을 겪었지만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미국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인 개념에 가득해서 그 동안 당신에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가 잘못했고 앞으로는 당신의 말을 듣겠습니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정식으로 알렌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국 해외 선교본부 총무인 엘라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누구도 미워해서는 안되지만 너무 너무 참을 수 없어서 한 두어 주일 동안 나쁜 마음을 품고 지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내 뒤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그를 용서할 수 있고, 또 내 마음의 안정도 얻을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내의 폐결핵이 점차 심해져서 1902년에서 1903년까지 미국의 유타주와 사우스 캘리포니아에서 휴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그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배를 하나 만들어 기쁜소식(Glad-tidings)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황해도 白川에 갔을 때였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한국인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고 있었습니다. 농번기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인 장정들을 강제로 끌어다 일을 시켰고 가축을 마구 잡아갔지만 임금을 주거나 가축의 값을 쳐 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에 나오지 않는다 하여 한국인들을 잡아다 때리고 감옥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화가 난 무어 목사님은 이 일을 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알렌 공사는 또다시 이 일을 트집 잡고" 너는 한국인에게 너무 너무...,그러지 말고 복음이나 전하라"고 힐책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무어 목사님은 "내가 미국시민으로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소"라고 대꾸하고는 일본 공사를 찾아 갔습니다. "한국인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으면 임금을 주어야지 임금도 주지 않고 때리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라고 대 들었습니다. 그리고 농촌에 대한 일본의 수탈 상황을 조사하여 미국 신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기고를 하였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1906년 5월 무어 목사님은 평양 신학교에서 구약과 영국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본래 구약연구에 정통하였고 라틴어와 히브리어는 매우 익숙한 사람입니다. 무어 목사님은 영국 역사 중에서도 찰스 대제와 의회와의 갈등을 중심으로 영국의회 민주주의를 가르쳤습니다. "내가 이것을 가르치면 한국에 의회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암시하는 것인데 한국 조정에서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 목사들이 이러한 의회정치와 민주주의(Democracy)를 가르친다면 한국의 장래는 과연 어찌될 것인가?" 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가 건설되기를 소망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무어 목사님도 이 땅의 생을 끝낼 때가 왔습니다.그는 1906년 12월 22일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수 많은 백정들이 연못골에 있는 목사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의 요청에 따라 백정 20명과 경신학교 학생 20명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목사님의 시신을 옮겨왔습니다. 그리고는 동네부인들이 정성껏 장식한 관에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말로 정성껏 장례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자 경신학교 학생들이 목사님을 운구하고 정동교회에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까지 찬송가를 부르면서 도보로 운구하여 갔습니다. 한편 백정들은 자기들의 슬픔과 아쉬움을 억제할 길이 없어 '聖者'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천주교회의 예를 따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듬해(1907) 사모님은 복중에 있던 엘리자베스를 출산하신 후에 아이들(3남1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너무 가난하여 선교본부에 구제를 요청했으나 별 도움을 받지 못했고, 사모님의 심한 폐결핵과 가난으로 결국 장남 존과 차남 데어 퍼리스트는 뉴헤이븐에 있는 친지 집으로 보내졌고, 엘리자베스는 어려서 죽었습니다. 사모님은 폐결핵 요양소에서 고통스런 생활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푸시다가 1923년 5월 29일 뉴욕 북부의 캐스달 뉴욕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이 승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시며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던 위대한 선교사 무어 목사님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그의 신학사상을 잠깐 살펴보고 끝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추적하고 연구한 바로는 무어 목사님이 무슨 특별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졌거나 新신학의 사회복음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그 분이 졸업하신 1892년경의 맥코믹의 신학은 전통적인 보수신앙으로 무엇이나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살려고 애쓰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천민의 차별철폐와 사회 정의를 부르짖게 된 것은 어떤 신학의 영향 때문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말씀대로 살려고 하셨을 뿐입니다. (출처- 승동교회)
<서울 승동교회> 1893년 설립 제1대 담임목사

승동교회 (출처- 승동교회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볼만한곳)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곽안련 선교사 건축)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1894~1928)을 비롯한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를 열었던 곳이다. 2월 28일에 열린 제4회 회의에서는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다음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22년에는 이 교회에서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가 설립되어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장로회 역사의 중요한 상징인 승동교회는 제101회 총회에서 역사사적지 1호로 지정 되었다. 승동교회는 선교초기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영욕의 현장에 서있으면서, 단 한 번도 선교사를 통해 전수된 복음과 총회의 본류에서 이탈하는 일 없이 본 교단 역사의 산실로 역할을 감당해왔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승동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만세운동의 중심이 된 탑골공원 및 태화관 등과 인접해 있었기도 했지만, 교인들 중에 차상진 목사와 면려회장 김원벽을 비롯한 충군애국(忠君愛國) 인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9년 3월 2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백방으로 독지가를 물색하던 중,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제휴되었다. 김 장로는 흔쾌히 학교를 위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하기로 하고 상당한 부동산과 헌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조선신학교는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와 깊이 관련된 자들은 195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로 분열될 때 모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떠났다. 그러나 승동교회는 떠나지 않았다. 조선신학교에 장소를 제공해 주기는 했어도 신학적 정통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승동교회의 정체성이었다. 1942년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폐쇄되고,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경기교구가 소집될 때 승동교회는 회집장소로 선정되는 비운을 맞는다. 하지만 일제가 만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해방 후 해산하고, 대신 남부총회가 회집됐다. 1946년 6월 11일 개회한 제1회 남부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로 명명된다. 승동교회는 남부총회가 회집된 장소로서, 또 한 차례 역사적 현장의 중앙에 섰다. 1959년 제44회 총회는 WCC 문제로 분열되었다. 당시 WCC를 반대하며, 장로회 신학과 역사적인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승동교회가 속회 총회 장소를 허락했다. 이듬해 9월 22일 제45회 총회가 고신 측과 합동총회로 회집될 때 장소도 승동교회였다. WCC를 지지하는 쪽은 연동 측으로, 반대하는 쪽은 승동 측으로 불릴 만큼 승동교회는 한국교회 본류를 이끌어가는 상징이자 희망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승동교회는 설립 100주년 기념의 해인 1993년에 신학적인 정통과 전통에 기초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이를 후대에게 계승하기 위하여 여러 자료들을 집대성했다. 2010년에는 역사관을 개관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제101회 총회는 승동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1호로 지정했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서울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옛 곤당골교회)와 주변 모습. 근대식 적조 예배당과 한옥 교회 부속 건물(주차 차량 쪽)로 구성돼 있다. 교회 초기 백정 출신이 많아 ‘백정교회’로도 불렸다. 강민석 선임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258089
(교회연혁 )
1893.06. 선교사 사무엘 무어(S.F.Moore) 목사가 곤당골에 교회를 설립하고 제1대 담임목사로 시무
1895. 양반교인 중 일부가 홍문섯골에 교회를 분립하다
1898.06. 곤당골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다
1899. 곤당골교회의 교인이 홍문섯골 교회로 합류하다
1902.02. 선교사공의회에서 홍문섯골교회 치리하여 교회를 패쇄하자 교인들이 제중원(구리개병원) 내의 예배처소로 가서 예배를 드리다. 그리하여 동현(구리개)교회가 설립되다
선교사들은 동현교회를 중앙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다
1902.09. 곽안련 동현교회 부목사 부임하다
1902.10. 이눌서(W.D. Raynolds) 목사 서울지역 연합당회(새문안교회) 임시당회장 부임
1908. 이여한을 초대장로로 장립하고 김소(J.F. Genso) 장로와 함께 당회 구성
1905.08. 현 위치인 인사동 137번지로 옮기면서 중앙교회로 개칭하고, 제2대 담임목사로 곽안련 목사(Rev. Charles Allen Clark) 시무(1906년 3월 위임)
승동기독학교(현대식 초등학교) 시작
1907.09.17. 대한예수교독노회가 평양장대현교회에 창립될 때, 곽안련 목사가 총대로 참석
1909.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1911년에 자립시킴
1911.12.04. 경충노회 창립노회가 새문안교회에서 회집되었을 때, 곽안련 목사께서 부회장으로 당선되고 이여한 초대장로가 총회총대로 피선, 제2대 박성춘, 김일선 장로 장립
1912.09.01.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가 창립될 때 곽안련 목사와 이여한 장로 총대로 참석
1913.02.16. 예배당 건축을 마무리하고 헌당식을 거행
1913.09.07. 소안동예배당에서 개회예배를 드린 제2회 총회가 본교회당에서 회집함
1915.07.02. 이여한 장로, 목사 장립 후 곽안련 목사와 위임동사목사(제3대 담임목사)
1916.05. 청년면려회 조직
1917.06.19. 제4대 담임목사 차상진 목사, 곽안련 목사와 위임동사목사로 시무
1919.02.20. 청년면려회장 김원벽, 본교회 하층 소학교사무실에서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 열고 독립운동 숙의
1919.03.14. 차상진 목사, 11인의 동지들과 함께 ‘12인의 장서'를 조선총독에게 제출 후 체포 투옥
1922.09.09. 제5대 담임목사 김영구 목사, 곽안련 목사와 위임동사목사로 시무

▲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포먼 무어의 곤당골 교회로 시작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 1912년 적벽돌을 쌓아 박공지붕을 얹은 로마네스크풍의 신축 교회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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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축 기공식 및 상량식 / 1958년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이후 출입문 쪽 신자석 공간을 늘리는 증축공사로 교회 정면부의 원형창과 아치창은 사라지고 두 개의 출입문도 한 개로 통합되었다. 그렇게 초기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3.1운동의 진원지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본당은 200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 / 2001년 지정
(출처 :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

3.1 독립운동 기념터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추모비 (승동교회, 동막교회 일동)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전면
묘비에는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Devoted servant of Jesus Christ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 unselfish in his love for the Korean people)'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이 6·25 전쟁 때 총탄으로 파손되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후면
묘비에는 우리말로“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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