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陛仁, 1869.2.21.~1909.9.25.)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陛仁, 1869~1909) 여성 선교사는 미국 마사츄세츠주 보스턴에서 1869년 2월 21일 출생했다. 보스턴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뉴잉글랜드 교사양성소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보스턴 상업도서관에서 사서로 잠시 일 할 때에 한국에서 귀국한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사로 지원했다. 1891년 11월 뉴잉글랜드 지부에서 한국 파송 선교사로 선임되고, 1892년 8월 미국 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고 1893년 9월 18일 제3대 이화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 간 여성 교육에 이바지했다. 구약 성경을 가르쳤으며, 교과과정의 편성과 정비에 힘썼다. “여자가 공부는 해 무엇 하느냐”하는 시절에 여성 교육에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그의 주요 업적과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1899년 생리학(生理學) 교과서를 한국 최초로 프라이(Frey)와 공동 저술했다. 이 책은 “젼톄공용문답(全體功用問答, Lessons on the Human Body)"이라고 했다. 젼톄(全體)란 온 몸이며, 공용(功用)이란 신체 각 부분의 쓰임세(機能)를 의미한다. 68쪽의 총10장으로 분류하여 사람의 몸 즉 인체(人體) 각 부분의 구성과 기능 및 위생에 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만든 교과서이다(자료: 이화100년사1994). 생리학(生理學)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전에 인체의 기능에 관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둘째, 1904년 9월 중학과(중등과정)를 설치하였으며, 교과과정(敎科課程) 정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은 배워야 나라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교육열이 점차 높아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이나 학생들의 연령, 지식 수준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교과 과정을 편성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이 때 페인은 산수 등 기존 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운동과목을 첨가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여성의 걸음걸이가 뒷 발꿈치 높이 정도로 걷는 것이 미덕(美德)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온몸을 흔들어 대는 체육운동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이 같은 체육운동 때문에 양반층에서 처음에는 크게 반발하고 “집안 명예가 손상되고, 혼사 길이 막힌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학생을 집으로 데려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셋째, 학생수 증가로 1900년 11월 정동에 2층 양옥 본관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규모가 크고 서양식으로 미려하게 건축되어 장안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공부하는 교실과 생활하는 기숙사가 함께 있어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페인 선교사는 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도 엄하게 훈육하여 학생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식료품 조달을 위한 <장보기>도 직접 담당하였는데 그의 시장 행렬은 “앞뒤에 각 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四人轎) 가마를 타고 기수(護身人)를 앞세웠다.” 늘 흰밥(쌀밥)을 해주니까 학생들이 팥밥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시장에 나가 팥을 사다 팥밥을 해 먹이기도 한 무척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자료:이화70년사) 넷째. 학생을 보호하고 신앙을 통한 기도회 등으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1904년 러ㆍ일전쟁이 있었을 때 학생들을 기숙사에 보호하고 쌀, 콩, 어포 등 각종 식량을 구입 비축하여 안정된 생활 속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을 때는 신앙을 통한 기도회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서 가냘픈 소녀들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주권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회를 가졌다. 다섯째, 1907년 이화학당장 자리를 프라이(Frey, Lulu E., 富羅伊, 1907-1921)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인천, 평양, 서울의 기독교 학교의 관리와 전도를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그녀는 교장을 사임 후 인천을 중심으로 복음 사역에 매진하였다. 과로로 쓰러지기 전 2년간 강화도 및 해주 지역에 순회 전도 활동을 하며 활발히 복음을 전하였다. 해주 인근 지역 75개 교회에서 강연을 하였고, 강화도 주변 61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녀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신앙이 돈독한 그는 험한 길을 수 백리가 넘도록 걸으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열정적인 설교와 전도는 감동을 주었으며 여성 해방 운동에 공헌했다. 40세를 일기로 1909년 9월 25일 해주지방 전도사업 순회 중 콜레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이화학당, 이화여자대학교>

초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화여고(옛 이화학당) 정문과 심슨관.
이화학당을 개설한 후 1888년 선교보고에는 ‘강한 어머니’ 메리의 불안이 잘 나타나 있다. ‘군중이 몰려와 아이들을 유괴해서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며 우리를 죽이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금도 낙담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밤 (선교)금령이 내려져 있는데도 한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매일 와도 되는지요. 허락해 주세요. 좋은 말씀 듣고 아름다운 노래 들을라치면 마음이 가벼워져요”라고 말했다.’

(출처-이 땅을 사랑한 예수의 증인들, 조선 여성을 일깨운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저장 - 파일썬)
1. 이화학당 시대 (1886~1910)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19세기 말, 한국사회에는 근대화의 여명, 개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은 여전히 봉건적인 틀에 갇혀 억압 받는 인고의 삶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때, 이화학당이 문을 연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여성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전혀 허락되지 않았던 인습을 깨고, 남성들조차 접하기 힘든 신교육의 기회가 당당히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화학당의 출발은 한국여성이 받은 은총이었고, 한국여성의 발전은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최초의 한옥교사

1887년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녀관

인체생리학 교과서 (조세핀 페인 총장)

이화학당 초기학생들

이화학당 수업광경

1908년 중학과 1회 졸업생

1908년 창립기념행사
2. 대학과 시대 (1910~1925)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1910년, 한일합병조약 조인으로 기울어 가던 국운은 막을 내립니다. 이 망국의 한을 박차듯이 이화학당에는 대학과가 설치되었습니다. 사회 일반은 물론, 동료 선교사들조차 한국에서 여성고등교육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프라이 당장은 대학과와 유치원 사범과를 설립해야 한다는 신념에 불타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조혼풍습으로 지적·신체적으로 성숙되기 전의 어린 여성들이 가정에 갇혀야 했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룰루 E. 프라이 당장은 한국여성에게 보다 광범위한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바로 질 높은 교육을 받은 한국 여성 지도자 배출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예상과 기대는 적중했습니다. 이화 학생들의 향학열과 소명감으로 1914년부터 1925년까지 배출된 대학과, 대학예과, 유치원 사범과를 졸업한 이화의 졸업생들이 이땅의 근대화 과정의 제1세대 여성지도자군을 이루어 뚜렷한 업적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대학과를 설립한 제4대 룰루 E. 프라이 당장

대학과시대 학생 단체사진 (1910)

대학과 제1회 졸업생 (신마실라, 이화숙, 김애식 1914)

대학과시대 선생님과 학생들

대학과 전용건물 프라이홀 (1923)
3. 전문학교 시대 (1925~1945)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의 대학과가 목표한 것은 선진국들이 실시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대학교육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화학당 대학과를 각 교파가 공동후원하는 기독교연합여자대학으로 성장시키려는 논의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대학교육 기회를 제한하려는 일제 식민지교육정책으로 말미암아 이화는 대학의 꿈을 접어두고 전문학교 인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당 내에서는 대학이 전문학교로 격하됨을 슬퍼하기도 했으나,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정식출범은 전국에서 고등교육을 갈망하던 여학생들의 열렬한 호응과 기대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전문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지는 삶을 스스로 택하는 특별한 것이었고, 이화여전 출신들은 식민지하의 한국 사회 여성 선각자로서 각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전문학교를 설립한 제6대 앨리스 R. 아펜젤러 교장

4개 국어로 진행된 수업

정동 채플

신촌캠퍼스 이전 (1935)

신촌캠퍼스 전경 (1935-1949년)

신촌캠퍼스 복구 (1953-1959년)

2000년- 현재 이화여대캠퍼스
(학교연혁)
1886.05.31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 여사가 서울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학생으로 수업 개시
1887.02 고종황제로부터 [이화학당] 명칭 하사
1904 중학과 설치
1910 대학과 신설
1912 보통과·고등과·중학과 및 대학과 설치
1914 이화유치원 신설, 대학과 1회 졸업식
1915 유치원 사범과 설치
1917 중학과를 대학예과로 개칭
1918 고등과, 보통과를 이화학당에서 분리하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보통학교로 11월 1일 개교
1922.10 제6대 이화학당장에 앨리스 R. 아펜젤러 당장 취임
1925.04 대학과 및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고 문과 및 음악과 신설

제7대 김활란 교장 취임 (1939)

재단법인 이화학당의 설립 (1943)
(역대총장) (출처- 이화여자대학교)

제 1대 메리 F. 스크랜튼 (1886.05 ~ 1890.05)
미국감리회해외여선교회(W.F.M.S.) 최초의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1885년 조선에 건너와 1886년 서울 정동에서 한 명의 여학생과 함께 최초의 근대식 여성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의 여성 교육사와 여성 근대사를 이끈 이화의 위대한 시작이었다. 제 1대 당장을 맡은 스크랜튼 선생이 주력한 것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인습에 얽매여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소녀들을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남녀간 내외로 인해 남성의사들을 기피하는 여성들을 위한 전문 진료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梨花學堂)’과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이 설립되었다. 스크랜튼 선생은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라는 신념 아래 한국인을 외국 환경에 맞도록 변화시키기보다 한국적인 것에 대해 학생들이 긍지를 갖도록 교육하였다. 그가 뿌린 교육의 씨앗은 이 땅의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이 여성임을 긍정하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뜻깊은 미래로 이어졌다.

제 2대 루이자 C. 로드와일러 (1890.05 ~ 1892.06)
제 2대 로드와일러 당장은 교원 경력이 있는 교육 선교사 출신으로, 이화학당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자 학제를 구비하기 시작하였다. 학과목을 구분하고 정식화하여 지지(地誌), 산술, 과학, 영독본, 영문법 등 근대 학문체계를 마련하였고,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생활과 기숙사생활을 구분하여 학당의 규칙을 강화하였다. 로드와일러 당장은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라는 스크랜튼 선생의 교육이념을 이어받아 한글 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실용적인 지식 습득을 주장하였다. 당장직 퇴임 후에도 1899년까지 주한감리교 여선교부와 문서선교 분야에서 활동하며 지도에 전력하였다.

제 3대 조세핀 O. 페인 (1892.09 ~ 1907.06)
제 3대 페인 당장은 탁월한 사무능력과 사업능력을 발취해 15년간 이화학당의 발전을 이끌었다.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하고자 1897-1900년에 걸쳐 이층 양옥교사 ‘메인홀’을 건축하였고, 강당과 기숙사를 갖춘 메인홀은 학생들의 학습 및 문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1900년을 전후로 학당에서 자체 저술한 교과서와 번역·개편된 미국 교과서를 사용하는 등 정부의 교과서 편찬보다 앞선 진보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4년에는 처음으로 정부 인가를 받아 4년제 ‘중학과’를 설치하였고, 이화학당 최초의 교칙이라 할 수 있는 ‘당칙’을 만들었다. 중학과 설치는 이화의 교육이 여성 고등교육을 지향해 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제 4대 룰루 E. 프라이 (1907 ~ 1921.04)
제 4대 프라이 당장은 조혼이 만연하던 당대에 여성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임 초기부터 대학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이화학당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한 데 이어, 일제의 교육 탄압과 여성 고등교육은 시기상조라는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고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신설하였다. 대학과 설립과 이에 따른 여성학사 배출은 한국 여성이 고등교육을 통해 유능한 여성 지도자로 성장하는 가능성을 연 획기적 사건이었다. 또한 1914년 유치원을 설립하고 1915년 이화학당에 ‘유치원 사범과’를 설치해 한국의 유아교육을 선도하는 한편 전문적 직업 교육인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교수진 강화, 교과과정 정비, 제반규칙 제정 등 학교 행정의 현대적 기틀을 마련하며 이화의 견고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양화진외국인묘지 페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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