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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1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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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두영서, 1865.7.4.-1928.6.15.) 

 

1865 7 4일 영국 웰링톤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구세군 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90년 스웨덴 출신 힐다랄손(Hildaralson) 사관(정위)과 결혼하였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 북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및 인도 북부지방 사령관 등으로 40년간 봉직하다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부인 힐다랄손은 농아(聾啞)사업의 공로로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제임스 토프트(Toft, James)한국 구세군 제5대 사령관(參將)으로 1926 8 16일 내한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울 역에 도착하여 육아원 음악대와 많은 인사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곧바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는 등 활발하고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구세군사(장형일)”에 따르면 지방 순회 첫 일정은 1926 9 4, 고산지방을 시작으로 10일에는 충북 영동의 심천 주곡과, 11일부터 대구, 영덕, 13일에 의성, 26일에 충남 홍성, 29일에 개성을 순회하였다. 그리고 10 7일 전주, 14일 해주 등지를 두루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였다. 1926 11 4일에는 세계 구세군을 통괄하는 브람웰 부우드(Bramwell Booth) 대장 일행이 방한하였다. 그는 초대 대장의 아들로 돈독한 신앙과 실천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온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아 그의 한국 방문은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부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여 자동차 위에서 구세군은 인종, 계급 상하를 불구하고 흑암 중의 죄인을 구원하고, , 욕심, , 도박보다 큰 힘을 준다.”고 연설했다. 그런데 부우드 대장의 한국 방문기간 중 구세군 분규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 사관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허곤 윤수만 등이 20개 항목으로 된 진정서를 낸 사건이었다. 진정 내용에는 한국인 사관의 참모권 부여, 차별 대우의 개선, 만행(蠻行) 사관의 축출과 선행(善行) 사관의 승진, 생활비 인상 요청 등이었다. 부우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분규행동은 비 복음적, 비 구세군적이라 지적하고 이 사건으로 배운바가 많아 1927년은 전능의 해로 삼기를 기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20여명의 사관들이 면직되었으며, 그는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며 구세군의 명예를 손상시킨 충격으로 병을 얻었다. 그가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반 만에 겪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며, 책임이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이었다. 결국 이로 인하여 1928 5 25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치료와 간호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1928년 6월 15 새벽 3시 별세하고 말았다. 1928 7월호 구세신문에는 구세군 조선사령관 참장 두영서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차드(Robert Chard, 한국명: 車宇道) 서기 장관은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참장께서 조선에서 일하신 것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와 형편 아래에서 나아가게 되었는데 조선 임명 첫해에 당하신 그 고난과 낙망은 육체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나, 그것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별세 2주일 전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종말에는 이 세상을 영영 하직하고 영원한 나라로 가서 만왕의 앞에 계시게 되었도다... 참장은 일평생 선한 싸움을 싸우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셨고 이 세상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신이가 되었도다.” 그는 구세군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 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Harold Cooper, 한국명: 具佑保) 참모 정위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하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차드(Robert Chard) 서기장관의 인도로 거행되고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다(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한국 구세군>

한국구세군회관

 

한국 선교는 1908년 10월 영국 선교사 로버트 허가드(Robert Hoggard) 사관일행이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서대문구 평동에 본영을 설치하고 서대문 영문(제1영)을 세워 복음전도와 사회봉사 활동을 펼쳤다. 1909년에 창간호를 낸 『 구세신문』(지금의 『 구세공보』)은 여성교육, 구습타파, 계몽운동, 농사교육, 성경교육, 한글사용, 금주운동 등을 펼쳤고, 지속적 의미로 최장수 신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1910년에는 구세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사관을 양성하기 시작하여, 1925년에는 170개의 영문, 218명의 사관, 9,000명의 병사로 교세가 급성장했다. 1928년에 자선냄비운동과 고아원 · 병원 · 학교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벌였으나, 1939년부터 일제의 강압으로 구세군이 구세단으로 개편되고, 1944년에는 모든 교회가 ‘합동교단’으로 편입되어 명맥을 잃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재건된 구세군은 다시 6·25전쟁으로 무려 78개의 교회와 많은 사회사업시설들을 북한에 남겨두게 되었고, 노영수 참령을 비롯하여 많은 사관이 순교하였다.

윌리엄 부스 기념 훈련 대학, 덴마크 힐, 런던: 영국 구세군 사관 훈련 대학

구세군 창시자, 캐서린 부스와 윌리엄 부스

 

구세군은 1865년 런던 이스트엔드오브런던에서 한때 감리교 개혁교회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에 의해 동런던 기독교 선교회로 설립되었으며, 이 이름은 1878년까지 사용되었다. "구세군"이라는 이름은 1878519일과 20일에 있었던 사건에서 유래했다. 윌리엄 부스가 그의 비서 조지 스콧 레일턴에게 편지를 구술하면서 "우리는 자원 군대입니다."라고 말했다. 브램웰 부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원? 저는 자원자가 아니라 정규군입니다!"라고 말했다. 레일턴은 "자원"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구세"라는 단어로 대체하도록 지시받았다. 구세군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자체 깃발(또는 군기)과 자체 찬송가를 가지고 있었는데, 찬송가는 종종 술집에서 불리던 인기 있는 민요 곡조에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부스와 "하나님의 군대"의 다른 병사들은 집회와 사역 활동을 위해 구세군 제복을 입었다. 그는 "대장"이 되었고 그의 다른 사역자들은 "사관"으로서 적절한 계급을 부여받았다. 다른 구성원들은 "병사"가 되었다. 윌리엄 부스가 대장으로 알려지면서, 캐서린은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윌리엄은 런던의 가난한 사람들, 즉 매춘부, 도박꾼, 알코올 중독자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동기를 부여받았는데, 이들은 정중한 기독교 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부적절한" 사람들이었다. 캐서린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강연하며 그들의 사역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었다. 그녀는 또한 당시로서는 드물게 종교 사역자로서 활동했다. 기독교 선교회의 설립 증서에는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설교 권한을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윌리엄 부스는 조직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S는 구세군이 '낙오자'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를 가장 잘 나타낸다. 첫째는 수프(soup), 둘째는 비누(soap),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salvation)이다." 1880, 구세군은 호주, 아일랜드, 미국 세 다른 국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구세군원들은 1880년에 미국으로 향했다. 조지 스콧 레일턴과 그의 팀은 1880314일 해리 힐의 버라이어티 극장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주목할 만한 개종자는 술에 취해 여러 번 유죄 판결을 받아 판사가 그에게 구세군에 참석하라는 선고를 내린 애시배럴 지미였다. 뉴욕의 영문은 지미의 재활 결과로 설립되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구세군을 시작한 것은 항상 구세군 사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구세군원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자신들의 권한으로 "구세군"으로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첫 공식 사관들이 호주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구세군원들을 발견하고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구세군의 조직적인 사회 사업은 1883128일 전과자를 위한 집을 설립하면서 호주에서 시작되었다. 구세군은 1885년부터 이민을 장려했으며, 1980년대까지 이 사업을 계속했다. 구세군 자체 자료에 따르면, 구세군은 "20세기 전반기 가장 큰 자발적 이민 단체로, 영국 제도에서 영국 제국 영토로 약 25만 명의 사람들이 이민하는 것을 도왔다." 1891, 윌리엄 부스는 에식스주 해들리에 농장 식민지를 설립하여 사람들이 런던 이스트 엔드의 과밀한 빈민가를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자체 시장 밭, 과수원, 우유 생산을 갖춘 완전한 농장은 기본적인 건축 및 가사 노동 훈련을 제공했다. 구세군의 주요 개종자들은 처음에는 알코올 중독자, 모르핀 중독자, 매춘부, 그리고 예의 바른 기독교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다른 "부적절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부스 부부가 자신들의 교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부스 부부는 구세군 예배 형식에서 성사(주로 세례와 성찬)의 사용을 포함하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혜 그 자체보다는 은혜의 외적인 표징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신념으로는 회원들이 술을 완전히 삼가야 하며 (성찬은 행하지 않음), 흡연, 불법 마약 복용, 도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그들이 활동하는 국가에 맞춰진 제복을 입는데, 제복은 흰색, 회색, 남색, 황갈색일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사리 형태로도 제작된다. 일반 대중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구세군이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성장하면서 영국에서는 반대가 일어났다. 스켈레톤 아미라는 이름으로 뭉친 반대자들은 구세군 집회를 방해하고 돌, , , 타르 등을 던지며 구세군원들을 폭행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러한 반대의 상당 부분은 구세군의 금주 운동과 술집, 공공 주점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 때문에 사업을 잃고 있던 술집 주인들이 주도했다. 1882, 구세군은 아시아에서 첫 전초 기지를 인도에 세웠다. 구세군은 또한 1879년에 호주, 1895년에 일본, 1915년에 중국에 전초 기지를 설립했다. 워싱턴 D.C. 구세군이 운영하는 유색인 남성을 위한 호텔 및 카페테리아, 1917년 구세군의 미국 내 명성은 1900년 갤버스턴 허리케인과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후의 재난 구호 활동으로 인해 향상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만 크리스마스 전 몇 주 동안 붉은 냄비와 함께 25,000명 이상의 자원봉사 종소리 봉사자들이 소매점 근처에 배치되어 크리스마스 캐롤을 연주하거나 부르거나 종을 울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붉은 냄비에 현금과 수표를 기부하도록 유도한다. 이 교회는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여전히 매우 눈에 띄고 때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 구세군은 기독교청년회, 기독교여자청년회, 전국 가톨릭 지역사회 서비스, 전국 유대인 복지 위원회, 전국 여행자 지원 협회와 함께 USO를 구성하는 원래의 6개 단체 중 하나였다. 국립 구세군 주간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41124일에 제정했으며, 지난 75년간 미국에서 구세군의 활동을 기리도록 사람들에게 권장했다.

 

<양화진외국인묘지 구세군 묘역>  (출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Ⅱ - ▣성공회 묘역.. : 네이버블로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의 구세군 묘역

 

구세군(The Salvation Army)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 4. 10~ 1912. 8. 20)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 혹은 군우라고 부른다.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를 함께 실천한다. *자선냄비(Christmas Kettle, Red Kettle) 우리에게 친숙한 자선냄비 모금 운동은 1891년 구세군 사관 죠셉 맥피(Joseph McFee)에 의해 시작되었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던 미국 샌푸란시스코에서 도시 빈민들과 갑자기 당한 재난으로 인하여 슬픈 성탄절을 맞이하는 천여명의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그는 부두로 나가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서 붙였다.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얼마 지나지 않아 솥에는 불우한 이웃에게 따듯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기금이 모아졌다. 이렇게 시작된 자선 냄비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펴저나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세계 100여개국의 거리에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대한민국은 192812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단 박준섭 (죠셉 바아) 사관이 서울 명동에 자선냄비를 처음 내걸고 불우 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세군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부부의 파송으로 시작되었다. 양화진 성지에는 구세군선교사 묘역이 특별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009구세군순교성지기념사업회가 양화진 제2묘역 서쪽 언덕을 대상으로 대구와 충북(영동)에 묻혔던 구세군 선교사까지 이곳에 이장하여 집단화하며 성역화 사업을 시행했다. 한국에서 구세군 소속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헌신하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는 8명에 이른다. 프릭(Frick), 코흘러, 리처드, 에이커홈, , 토프트, 위더슨(Widdowson), 홉스(Hobbs) 선교사 등이다. 그리고 선교사 가족도 7명에 이른다. 실베스터 선교사의 두 아들(Douglas, Goldon)을 비롯하여 힐의 아들(W. O. Hill), 프랜치의 아들(Lincoln), 스미스의 딸(Dolleen), 폭스의 아들(Norman), 본윅의 딸Cathie)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을 국적별로 구분하면 영국인이 9명으로 가장 많고, 스웨덴 3, 미국, 호주, 남아공이 각 1명으로 모두 15명에 달한다. [출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1]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1886.9.16-1912.4.29) 사관

구세군 프릭 사관 묘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1886.9.16-1912.4.29)묘비

묘비에는 “1886년 8월 10일 출생하여 1912년 4월 29일 승천”이라 기록되었다. 한국에 파견된 구세군 선교사중 최초로 양화진에 묻혔다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기념비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1886-1912)은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제1진인 프릭(Frick, Sofia), 코흘러(Kohler, Magda), 우을선(Olsson, Verna) 등 3인가운데 한 1인으로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이 중 프릭 사관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1912)로 양화진에 묻혔으며 코흘러는 다음해(1913) 안장된 독신 여성 선교사이다.

프릭 사관은 1886년 8월 16일 스웨덴 텔례북에서 출생하였다.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11월 20일 참위 직분을 받았으며,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을 한국에 파송하면서, 프릭이 한국으로 갈 수 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말했다.

그 사유는 “본래 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로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프릭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울 평동에 머물면서 한국말을 익혀 빠른 기간에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들에게 “자기는 도저히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갖지 아니하며, 오직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인을 위하여 죽을 줄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쪽 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주며 문서 전도와 노방전도에 힘썼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한 뒤,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한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던 프릭이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1912년 4월 29일 오전 4시 45분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구세군 본영에서 호가드(R. Hoggard, 許嘉斗) 사령관에 의하여 집례되었고 유해는 양화진에 운구되어 호가드 부부와 여러 조문객들이 모여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프릭 선교사는 한국 체류 활동 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선교사였다.

그의 장례식 때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진심으로 슬퍼하였으며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구세군 선교사였다. 묘비에는 “1886년 8월 10일 출생하여 1912년 4월 29일 승천”이라 기록되었다.

2-1]워더슨 M. (Widdowson, Mary(198~1956) A-31-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선교사

마리 위더슨 부인( Mary Ann Widdowson 1898,4.4~1956.5.10) A 31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묘비

 

워더슨 M(Widdowson , Mary)의 묘비 후면과 전면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부부가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양화진에는 몇 명의 구세군 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묻혀 있는데 위더슨 부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리 위더슨은 1898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1926년 약혼하였다.

1927년 가을 한국에 먼저 나간 약혼자 크리스 위더슨과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먼 길을 외롭게 떠나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결혼했다.

남편(Chris)을 내조하며 선교사로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1934년까지 7년간 한국에 살았으며 이때 첫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서울 변두리의 고아원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줄곧 고아들과 같이 생활하였는데, 이들의 첫아들도 물론 고아들과 친구로 같이 자랐다.

이들은 늘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었 있었는데,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들이 여러 가지 병균을 묻혀 왔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결국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시달리게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고아들을 걱정하였다. 위더슨 부부는 7년의 한국 생활 후 이번에는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7년 동안 고아들을 돌보았다.

아들과 마리는 발진티푸스로 앓아눕게 되어 그녀는 헛소리를 하며 며칠간을 앓은 적도 있다. 그러함에도 그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안고 아이들을 잘 보살폈다

 

부부는 한국서 7년 봉사하고 1934년 2월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7년간 고아들을 위해 봉직하였다.

어느날 “너희는 이제 전과 같이 젊지 않다. 만약 내가 다시 한국으로 가라하면 어찌하려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6.25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1953년 1월 19일 부부는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부산으로 다시 돌아 왔다.

 

6∙25전쟁으로 폐허화된 상황 속에서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1927~1934, 1953~1956)

남편 크리스 위더슨은 구세군 사령관으로, 위더슨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로 봉직하였다

부부는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헌신하였다.

위더슨 부인은 위암으로 투병하며 죽음이 임박했을때 사령관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라고 유언 했다.

 

1956년 5월 10일 서울에서 소천하여. 장례식 때에 이승만 대통령과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객록이 작성되었다. 남편은 양화진에 묻힌 부인 묘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은 뒤 1957년 한국을 떠났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한창 전쟁 중이던 한국으로 가라는 음성을 듣려 주셨고 이들은 망설임 끝에 순종하였다.

1953년 1월 부산에 도착해서 한국 구세군 사령부를 조직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계속 하였다.

하지만 위더슨 부인은 위암에 걸려 얼마 후인 1956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소천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편에게 남겼다.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내가 죽는다고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2-2]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 묘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은 1926년 11월 내한하였다.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중위로 8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2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케냐에서 총무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한하여 사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해군 장교 구락부에서 한국 기독교 연합회와 한국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으로는

첫째 54명의 사관을 배출하고 13개소의 전장부를 신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둘째 19개소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수하고, 7개소의 사회사업소를 개설하였다.

셋째, 서울(아현, 마포, 돈암, 영등포 등), 부평, 춘천, 대구, 부산 등지에 급식소를 신설하여 월 평균 5천명에게

음식을 나눴다.

이밖에 245,673명에게 일반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영동병원을 통하여 입원 및 외래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한국에서 사별하고 1957년 8월 1일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돌아갔다.

3] 윌리엄 리처드(Brigadier Williams. Richards, 이도식1878~1920.2.5)

윌리엄 리처드(Brigadier Williams. Richards, 이도식1878~1920.2.5) 묘비에는

"Duty done Victory Won" 의무를 다하고 승리했다

윌리엄 리처드(Richards, Williams J. 한국명 : 이도식) 묘비

윌리엄 리처드(Richards, Williams J. 한국명 : 이도식)는 1878년 영국 런던에서 윌담스토우 출신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열두 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Catherine)의 묘 앞에서 헌신을 다짐했다.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7년간 선교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09년 2월 8일 메리 킬로(Richards, Mary K.) 부관과 결혼하였으며 만국 본영의 문학부에서 봉직했다.

1913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선교사관으로 파송되어 지방장관과 청년부 서기관으로 봉직하였다.

1918년 6월 2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명령을 받아 내한하였다.

이 무렵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한국의 첫 인상과 예배의 모습을 그의 딸은 <선교사관 자녀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버지(리처드),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은 1918년 6월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만 보다가 한국에서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 눈도 많이 와서 겨울에는 난로를 피웠다.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 보자기에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그리고 책보를 풀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낸 뒤에는 그 책보를 착착 개어서 앞에 놓았다가 다시 싸가지고 가곤했다. 마루 바닥에 앉아 “찬송합시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어떤 할머니는 남이 다 부른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길게 여음을 끄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에 부임한 리처드 서기장관은 구세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선교자금을 조달하고 한국 여성사관을 양성하였으며 고아원(육아원)을 개원하여 구제사업에도 공헌했다.

그는 브래지(George French, 한국명 : 夫來智) 사령관이 갑자기 전근되어 사령관 직무 대리를 수행하면서 1918년 한국 구세군 개전 10주년 대회 준비에 과로하며 힘썼다.

구세군 고아원 운영 과정에 대하여 그의 딸 기록에는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서울의 고아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관학교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놀랬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결국 고아원 운영과정에서 퍼진 천연두 때문에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이 사망하고 리처드 자신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 무렵 구세공보와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여러 명이 희생 되었다.

리처드가 서울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거리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이미 천연두에 감염된 아이를 고아원에 수용하므로 인하여 천연두가 확산된 것으로 해석된다. 실베스터(설 보덕) 정령 집에도 천연두가 전염 되어 실베스터 선교사 두 아들이 앓아눕게 되었다.

이때까지 리처드는 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아니하여 그는 매일같이 실베스터 가족의 심방을 비롯하여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월 19일 실베스터의 셋째 아들 더글러스 실베스터가 두 살의 어린나이로 천연두에 의하여 사망하였다. 뒤이어 같은 해 1월 28일 실베스터의 큰 아들 고던 실베스터도 사망하였다.

이때 리처드는 두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 하였으며, 눈 위로 먼 길을 걸으며 평동에서 양화진까지 왕래하게 되었다. 결국 리처드도 이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병에 걸렸으며 얼마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도 천연두로 인하여 1920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실베스터 가족에 뒤이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구세공보에 보도된 ‘한국에서 순직한 선교사관 리처드 부령의 감화’라는 제목에서 뿌람월 푸드는 리처드의 죽음에 대하여 “리처드 부령은 강직하고 열렬한 구세군 주의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헌신하여 그의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디든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봉사 순종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라 했다.

리처드는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 후 그의 부인과 4자녀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캐나다 사령관)와 캐나다 구세군의 헌금으로 아영 영문에 1922년 12월 8일 ‘리처드기념관’ 이 건립되었다. 묘비에는

"Duty done Victory Won" 이라 쓰여 있다.

4] 마그다 코흘러( Magda Kohler,高月羅, 1886.6.10-1913.5.23)

마그다 코흘러( Magda Kohler,高月羅, 1886.6.10-1913.5.23)

 

마그다 코흘러(Kohler, Magda)는 1887년 6월 10일 스웨덴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스웨덴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제1진의 구세군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독신으로 내한하여 제1대 사령관 호가드의 비서로 일했다.

선교에 열성이 대단하여 한국말을 배운 뒤, 시골로 다니면서 많은 한국인과 가까이 하려 노력했다. 순회 전도를 마치고 경북 의성(원당) 지방에서 자원하여 담임사관으로 헌신했다. 호가드(Hoggard)사령관 부인과 함께 경북지방(노매실, 원당, 소일)을 순회하면서 5-6백리의 멀고 험한 길을 마다 않고 걸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장티프스 때문에 숨진 사람들을 수습해 주는 등 원당지역에서 주민들에게 많은 감화를 끼쳐 그를 아는 한국인들은 ‘고월라(高月羅)’라는 한국 이름을 모방하여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본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열정적인 봉사와 사랑으로 감화를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13년 그는 의성에서 장티푸스 환자를 돕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의성(원당)에서 대구에 이르는 150여리를 들것에 실려 대구 동산 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하였지만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913년 5월에 소천하였다.

호가드 사령관은 그의 시신이라도 서울(양화진)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그 후 그의 유해가 대구 동산병원 구내에 묻혀있는 것을 확인하고 2000년 9월 27일 구세군 선교사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양화진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별세 한 뒤 그를 추모하여 플로렌스(Florence Riley)는 1913년 7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

“Memorial Tribute to Captain Magda Kohler”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전도 행적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가 남긴 어록으로는 "예수를 위한 고난을 감수할 것과 예수의 십자가를 나누기를 원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기 원한다"이다. 그는 순직 후 일 계급이 특진되어 정위가 되었다.

5-1]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1898-1923) 구세군 선교사

조지 프렌치 구세군 사령관의 아들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1898-1923) 묘

구세군 선교사 가족 가운데 링컨 프렌치(French, Lincoln)의 삶은 특별하다. 1898년 3월 1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년기가 시작되는 18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한국 사령관으로 전임(轉任)되었을 때, 여동생 등 4명의 가족이 1916년 10월 2일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아버지 조지 프렌치가 1919년 11월 인도의 서 군국 사령관으로 전임하게 되어 한국을 떠난 후에도 그는 한국에 계속 머물러 독립생활을 하면서 한국인을 일깨워 주는 어학선생으로 봉사하였다. 결국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 생활 7년 만에 25세의 나이로 1923년 4월 18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정동교회에서 스티븐스(Stevens, William, 한국명: 신태빈) 구세군 사령관 인도로 집례 되었으며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 건립된 그의 묘비에는 ‘평안히 잠드소서(Rest in Peace)’라고 기록되어 있다.

5-2] 조지 프렌치(French, George) 구세군 사령관 -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아버지

조지 프렌치(French, George, 한국명: 부래지)는 영국 브리스톨 출신으로 1882년에 임관되었으며, 미국 서부 군국 서기 장관으로 봉직하다가 허가두(Hoggard)의 후임으로 1916년 6월 30일 제2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10월 2일 밤 9시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 추수감사 예배와 10월 8일 주일 예배에 설교하고 10월 13일부터 3회에 걸쳐 지방을 순회하였다.

첫 일정은 충남의 공주(유구)였다. 그는 서울과 지방 순회를 통하여 신실한 사관과 교우들이 힘써 일하고 희생한 결과로 이루어 놓은 훌륭한 선교 업적을 확인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수 백 만 한국인이 요망하는 바를 깨닫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간절한 뜻과 생각이 마음 가운데 가득하다고 했다.

많은 무리를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능력이 생기리라고도 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지만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만 의지하고 나아가면 성공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힘써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구원 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자고 하였다. 그는 3년간 제2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봉직하다가 1919년 11월 5일 인도 서부 군국 사령관으로 전보(轉補)되어 한국을 떠났으나 교회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1919년의 교회 수는 3,279개였고 교인 수는 355,114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의 임기 중 신설된 구세군 교회는 1916년에 교하, 옥천, 부토리를 비롯하여 1917년 건주리, 천흥, 안성, 김천, 광평, 연안 진남포, 낙평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 3영, 맹해리, 수원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특히 사회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육아원 개설에 공로가 있다. 그는 성결을 주장하며 “성결의 길(이사야 35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여기에는

첫째, “정결(淨潔)의 대로(大路)”를 통하여 사상과 언어와 행동이 정결하면 언행이 변화되어 선행(善行)을 한다

둘째, 분명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걷게 되면 곤란이 없을 것이며,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 명령을 잘 복종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다고 했다.

셋째, 안전대로(安全大路)처럼 우리 마음의 중심이 정결하여야 안전하다고 했다.

이밖에 희락이 충만한 영광(榮光) 스러운 길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자고 하였다.

6-1]에이커홈(Earland Akerholm, 玉居欽 1888.3,13~1920)

에이커홈(Earland Akerholm, 玉居欽 1888.3,13~1920)

 

에이커홈(Earland Akerholm, 玉居欽)은 구세군 선교사로 헌신한 영동병원 설립자이다

 

1888년 3월 13일 스웨덴(Barkeryd)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4년 3월 9일 구세군 사관(正尉)으로 내한하여

처음에는 개성 지방관으로 봉직하였다.

1916년 6월 스웨덴에서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 나탈다(Natalta)와 ‘경성 제일 영내’에서 결혼하였다.

부흥회의 배경과 성과에 대하여 1918년 7월 1일자 구세신문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보도하였다.

개성지방관 에이커홈(Akerholm)과 그 부인, 경성 본영의 어륵손(Ericsson)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합심 협력하여 가두 전도와 영내 예배를 통하여 1,430명이 복음을 접하고, 31명이 회개하였으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토요일(18일)과 주일에도 여전히 계속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에이커홈 선교사는 1920년 충청북도 지방관으로 전임 되어 선교 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그는 사재를 출연하여 조성한 기금으로 영동 병원을 설립하여 농촌 지역에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충청북도 지방 활동 중 1920년 3월 15일 장티푸스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영동 계산리(향교 건너편) 뒷산에 안장되었다.

2000년 구세군 대한 본영은 이들 선교사의 숭고한 신앙과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는 취지에서

‘구세군 순교 성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2000년 9월 27일 에이커홈의 유해를 충북 영동에서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朝鮮忠淸北道 救世軍地方營 族官 玉居欽 主降生 一八八八年 三月 十三日生 一九二十年 三月 十五日 別世" 그리고 ”復生者 我生命者 亦我信者 雖死必生而 信我者 永不死爾信否"

"조선 충청북도 구세군 지방영 옥거흠 주강생 1888년 3월 13일생 1920년 3월 15일 별세"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을 입게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셨으니 우리 대신 죽으시어 저와 함께 살게 하시니라”라 기록되었다.

 

6-2] 부인: 서울 여자 관장 나탈타 에이커 홈(Natalta Akerholm 1965.1.10)

 

스웨덴 출신의 여성 사관으로 1914년 3월 9일 내한하였다. 에이커홈과 서울에서 1916년 6월 결혼하고.

1920년 남편이 소천한 후에도 한국에서 구세군 선교사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1922년에는 전도를 위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자비로 사서 나누어 주었으며

1925년 7월 경성 제2영 담임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25년 9월 19일 정위에서 부관(副官)으로 승진하여 함경도 고산 구역관(區域官)으로 임명되었다.

구역관 취임식에는 서기장관 등 많은 구세군 사관과 병사들이 참석하였다.

 

1928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구세군 사관학교가 개관될 때는 여성 사관의 교관이었다.

1930년 영국 만국 사관 대학 연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여자 관장(1933),

서울혜천원(1938)에서 폭넓게 활동하면서 1934년 4월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밖에 그는 구세군 본영 사관 부인들로 조직된 자선위문단 책임관,

원산 선교사 휴양 관장, 여성 사업부, 사회사업부에서 봉직하였다.

1940년 12월 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출국되었다가. 그 후 스웨덴에서 80세 고령으로 1965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양화진에 잠든 구세군 선교사는 6명으로 가족까지 하면 12명이 잠들어 있다.

7] 플로렌스 힐(Riley Florence, Hill,許日夫人, 1891-1922.1.5)

1891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만국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1909년독신으로 한국에 왔다

호가드 사령관의 비서로 일하면서 호가드 사령관의 부인과 충정지방 전북 지방.경북지방들을 말을 타고

때로는 걸어다니며 전도와 집회를 인도하고 부인 사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1910년에 구세군 선교사로 입국한 윌리엄 알프레드 힐(허일)과 동역하다가 1913년 결혼했다. 남편 윌리암이 충정 지방관에서 한국의 구세군 사관학교 3대 교장에 임명되어 부부가 함께 남녀 사관 양성에 동역하였다.

서울로 옮겨 부인회 집회 인도와 여자 사관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순직 선교사에 관한 글도 썼다.

1922. 1. 5 사관학교 사택에서 빈혈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라일리 사후, 남편 선교사는 재혼하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세 살 되던 해에 사망하여 첫 부인 라일리 사관 옆에 안장되었다.

플로렌스 힐(Riley Florence, Hill,許日夫人, 1891-1922.1.5) 묘비

 

오벨리스크 형식의 묘비에는 "東出十三年餘之生命 爲朝鮮民族獻身日日歡迎",

(한국에서 13년 동안 자신의 생명을 조선 민족을 위해 날마다 헌신했다)

하단에는 “Jesus, Jesus, Precious Jesus(예수, 예수,존귀한 예수)”라 쓰여 있다.

옆 자리에는 아들(윌프레드 힐,남편이 재혼하여 낳은 아들)도 묻혀있다

8-1]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묘비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토마스 홉스의 부인

엘렌 P. 홉스 (Hobbs, Beatrice Ellen Pugh) 선교사는 1880년 8월 24일 영국에서 출생하였다. 토마스 홉스와 결혼하였으며 1910년 9월 16일 남편과 함께 구세군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남편의 성서공회사업 등 선교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기독교 부인절제연합회 회계(외국인부서)로 봉사하고, 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했다. 동물학대방지협회 등에서 사회활동도 하였다. 진명여학교 등 2개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육체적 힘을 능가하는 열정을 가진 헌신적인 선교사’로 전해진다. 이질에 걸려 서울에서 치료하다가 해외 치료가 필요하여 1924년 11월 서울을 떠나 1925년 2월 돌아오기도 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1932년 1월 30일 남편과 함께 서울을 떠나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1933년 2월 7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34년 4월 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성서공회 외국인 선교사로는 첫 번째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 홉스를 내조하면서 22년간 봉사했던 성서공회와 한국교회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5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8-2] 영국성서공회 총무 토마스 홉스( Hobbs, Thomas ,許曄 , 1880~? )선교사

토마스 홉스( Hobbs, Thomas 한국명: 許曄 )선교사는 1880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영국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9월 16일 구세군 선교사(사관)로 부인(엘렌 P. 홉스)과 함께 내한했다.

1911년 구세군 한국 본영에서 활동하고 개성 지방관으로 전임하였다. 원당 사평 장단 등 지방 군영을 개설하거나 관리와 순회 전도를 하였다. 문맹 퇴치와 사회 계몽 활동에도 힘썼다.

1913년 1월, 저다인(J. L. Gerdine)선교사와 밀러(Miller, Hugh 閔休) 총무의 추천에 의하여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부총무로 선임되었다. 그가 선임된 배경에는

'구세군 사관(정위)으로 2년간 근무한 32세의 기혼자이며, 한국어를 잘하는 동시에 이미 한국인 권서와 함께 전도를 해오고 있고, 권서 사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며 그 부인도 권서인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공회 사업을 관장하면서 특히 권서인(勸書人)의 조직과 관리를 주관하였으며, 전도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의 권서 방식은 ‘모든 가정, 모든 사람(Every home, and Every man)’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호별 방문 형식의 권서 보급 운동을 장려하여 많은 성경을 보급하였다.

1921년에는 권서인을 위한 잡지 를 편집, 발간하였다. 밀러의 안식년 때(1916.7~1917.8)에는 대리 총무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자 지원 입대 한 후 제대하여 1919년 9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1937년 10월 제2대 밀러 총무가 정년으로 은퇴하게 되어 후임으로 제3대 영국성서공회 총무가 되었다. 부총무로 25년간 경륜을 쌓은 뒤 57세의 나이로 총무직을 맞게 되었으므로 이미 성서사업에 노련한 전문가로서 한국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밀러 총무가 추진하던 개역성경 번역작업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고 신ㆍ구약을 합본하여 <성경 개역>으로 출간하는 등 성서 출판과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8년 '영국성서공회'(BFBS)의 명칭을 '조선성서공회'로 바꾸는 등 대한성서공회 발전에도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1년 3월, BFBS에 속했던 모든 성경 재고와 조성된 자금을 조선성서공회에 기부했다.

그는 1934년 엘렌 부인과 사별한 뒤, 1935년 9월 11일 이화여전 교수 밴플리트(Van Fleet, Edna Marie)와 재혼하였다.

1941년 5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미국 성서공회 임시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 성서사업의 계속 수행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9]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두영서 1865-.7.4~1928.6.15)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두영서 1865-.7.4~1928.6.15)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다.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 묘비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는 1865년 7월 4일 영국 웰링톤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구세군 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90년 스웨덴 출신 힐다랄손(Hildaralson) 사관(정위)과 결혼하였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 북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및 인도 북부지방 사령관 등으로 40년간 봉직하다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부인 힐다랄손은 농아(聾啞)사업의 공로로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제임스 토프트(Toft, James)는 한국 구세군 제5대 사령관(參將)으로 1926년 8월 16일 내한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울 역에 도착하여 육아원 음악대와 많은 인사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곧바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는 등 활발하고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구세군사(장형일)”에 따르면 지방 순회 첫 일정은 1926년 9월 4일, 고산지방을 시작으로 10일에는 충북 영동의 심천 주곡과, 11일부터 대구, 영덕, 13일에 의성, 26일에 충남 홍성, 29일에 개성을 순회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 전주, 14일 해주 등지를 두루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였다.

1926년 11월 4일에는 세계 구세군을 통괄하는 브람웰 부우드(Bramwell Booth) 대장 일행이 방한하였다.

부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여 자동차 위에서 “구세군은 인종, 계급 상하를 불구하고, 흑암 중의 죄인을 구원하고 죄, 욕심, 술, 도박보다 큰 힘을 준다.”고 연설했다.

그런데 부우드 대장의 한국 방문기간 중 ‘구세군 분규 사건’이 발생하였다. 생활비 인상 요청 등이었고 부우드는 유감을 표시하고 분규 행동은 비 복음적, 비 구세군적이라 지적하고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이 되어 토프트 사관은 큰 충격과 책임으로 병을얻었고 세브란스 병원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1928년 6월 15일 새벽 3시 소천하였다.

그는 구세군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 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Harold Cooper, 한국명: 具佑保) 참모 정위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하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차드(Robert Chard) 서기장관의 인도로 거행되고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두영서, 1865.7.4.-1928.6.15.)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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